231225 성탄 대축일
이사52:7-10 / 히브1:1-4 / 요한1:1-14
이 세상에 온 말씀과 빛
매년 성탄 대축일 낮 예배 때마다 우리는 요한복음 1장말씀을 듣습니다. 흔히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의 시작부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혹은 공생애를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증언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한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처음’이라고 번역한 이 말은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란 단어로서 ‘원천’, ’시작’이란 뜻입니다.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실은 이미 처음부터 계셨고, 모든 만물의 원천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은 구약성경 첫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세1:1)”는 문장에도 ‘한 처음’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 말은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레쉬트(רֵאשִׁית)’라고 합니다. 이처럼 구약 창세기의 첫 단어인 ‘레쉬트’와 신약 요한복음서의 첫 단어인 ‘아르케’ 모두 만물의 처음과 근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은 통해 모든 교회가 믿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라고 신경(Creed)으로 우리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옥성당의 주련(柱聯)에도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한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無時無終先作形聲眞主宰)-시작도 끝도 없는 중에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으신 참 주재자.
이와 같이 성탄절 낮 대축일 예배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이미 계셨고(先在), 창조(創造)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세상만물과 인간은 창조를 통해 생겨났으며, 구원을 통해 온전한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여러가지 악과 불완전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서두에 나오는 이 선언을 읽고 들으며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후 방치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더욱 온전케 하기 위하여 우리의 불완전함 안으로 들어오심에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 들은 복음말씀을 ‘로고스 찬가’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그리스말 ‘로고스(λόγος)’는 말, 말씀, 도(道)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도리가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그런데 이 구절은 “말씀이 살(肉)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라고 직역하면 그 느낌이 더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추상적인 명사가 아니라 살덩이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할 때 더 감각적이고 사실감 있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가 이제 갓 태어난 아기의 포동포동한 살덩어리, 그리고 점점 자라서 성인인 된 살덩어리, 그리고 마침내 채찍과 가시관과 십자가에 못박혀 갈기갈기 찢겨서 처참한 살덩어리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생생한 사실로 느낄 때, 비로소 인간은 그 신비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는 구절도 사람의 병을 낫게 하고, 먹을 것을 주고, 자연현상을 변화시키는 기적에서만 영광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단식과 아파하심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약점을 통해서도 영광이 드러남을 뜻합니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살덩어리로 오셔서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우리의 슬픔, 고통, 심지어 죄로 인한 절망까지도 영광스럽게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창조에서 종말로 가는 여정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서 당신 친히 이 세상 안으로 뛰어든 엄청난 모험인 것입니다.
성탄 때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결단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고, 오늘 들은 로고스 찬가는 하느님이 이 계획을 아주 오래 전 태초부터 갖고 계셨다고 선언하고 고백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주보에 소개해 드린 성화, <세상의 빛(The Light of World)>은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께서 어둔 밤에 등불을 들고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의 손잡이가 없습니다. 손잡이는 문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노크소리를 듣고 문을 열 때, 주님은 안으로 들어오셔서 어두운 방을 환하게 밝혀 주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실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겁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오늘 복음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연상됩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1:10-12)”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이 말씀에 대하여 “태양이 아무리 빛을 보내더라도 맹인은 그 태양 앞에서 어둠밖에 보지 못하는 것처럼 죄인들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태초부터 우리를 구해주기 위해 권능과 초월의 지위에서 살덩어리가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더라도 우리가 문을 열지 않으면 구원에로의 초대와 기쁨은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간이 문을 열건 말건 전능하신 분이 우리의 문을 강제로라도 여시고 구원해주시면 되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속성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하느님 홀로 하셨겠 지만, 그 완성을 위해선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만들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심지어 주님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엄마, 아빠의 보살핌을 받으시기로 하셨습니다. 성탄은 이런 면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이 불완전하고 심지어 모순투성이인 인간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지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당신의 구원의 동역자로 영광스럽게 올려 주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자비만 바라는 피동적 존재에서 이제 하느님과 함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능동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 세상의 말씀과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성탄을 기념하며 태초부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분을 내 안에 초대해서 생명의 말씀으로 충만해지길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마리아와 요셉처럼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동역자가 되어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우리 일터에 평화의 사도가 될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