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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실학 어떻게 할 것인가
글쓴이 조성환 / 등록일 2025-10-10
‘실학’이란 개념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현재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해결하는 학문’을 의미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성’이 당면 과제였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정약용이나 최한기와 같은 학자들을 ‘실학자’로 재해석하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략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 제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탈근대 담론’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에 서양에서는 그보다 더 큰, 그리고 더 근본적인 담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구 담론’이다. 이 담론은 1990년대에 가속화된 ‘지구화(globalization)’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라는 동시적 현상에 대한 학문적 대응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다.
‘탈근대 담론’, ‘지구 담론’, ‘인류세’ 개념 대두
그리고 2000년에는 서양의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인류세(Anthropocene)’ 개념이 제기되었다. ‘인류세’란 간단히 말하면 ‘인간에 의해 기후변화가 유발된 시대’를 가리킨다. 2009년에는 인도 출신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에 의해 인류세 개념이 본격적으로 인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왔다(「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 『지구사의 도전』에 수록). 아직 지질학계에서는 정식 용어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차크라바르티의 논문이 나온 이후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기후변화 시대’를 지칭하는 상징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물론 인문학 안에서도 이 개념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류세 개념의 등장은, 그리고 그것의 인문학적 수용은 그동안 우리의 사고체계를 지탱하고 있었던 ‘근대’라는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특히 서구 근대인들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자연’ 개념, 즉 인간의 배경이나 환경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던 대문자 ‘네이처(Nature)’ 개념이 비판받게 되었다. 아울러 종래의 근대적 세계관이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었다는 반성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동안 ‘근대’라는 틀 안에서 사유되었던 ‘실학’의 내용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서양에서 지구온난화와 함께 지구 담론이 대두되던 시기인 1990년에 한국에서는 종래의 실학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김용옥의 ‘실학(파) 허구론’(『독기학설讀氣學說』)이고, 다른 하나는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의 ‘실심실학론’이다(「기(氣)의 철학과 실학 - 홍대용의 경우」,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하)』, 창비)이다.
근대적 세계관의 반성으로 실학 담론도 시들
김용옥은 종래의 실학(파) 담론이 서구의 역사발전단계를 한국사상사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였고, 오가와 하루히사는 정반대로 조선후기의 실학은 근대 일본의 실용실학과는 달리 ‘실심(實心)’이 강조된 도덕실학이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비록 실학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로 갈라지지만, 양자의 공통점은 종래의 ‘근대적 실학 담론’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문제 제기가 나온 시점이 서양에서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 제기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뭔가 시대적인 요청에 대한 응답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렴풋이나마 21세기의 실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 나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단 ‘실심실학’에 대해서는 오가와 하루히사를 비롯하여 정인재나 한예원 등의 선구적인 논문이 나왔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서 실학 담론은 동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류세’ 개념의 등장과 함께 종래에 실학 담론을 떠받치고 있던 근대적 세계관 자체가 재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실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해답은 간단하다. ‘근대’가 ‘인류세’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그리고 실학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현실적 학문을 가리킨다면, 당연히 근대를 지향했던 실학 개념도 인류세라는 방향으로 재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인류세의 실학’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종래의 실학자들에 대한 해석이나 방점도 달라져야 한다. 가령 20세기에는 최한기 철학에서 ‘경험론’의 단초를 발견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거기에서 기후변화 시대의 인류세철학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실학자들에 대한 해석이나 방점 달라져야
실제로 최한기의 철학 체계는 ‘기화(氣化)’ 개념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데, ‘기후변화’는 기화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대기의 상태가 (인간에 의해서) 변화한 것이 기후변화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후변화에 해당하는 서양어 ‘climate change’에는 이러한 인식은 들어있지 않다. ‘climate’ 자체가 철학적 개념으로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화’는 최한기 이전부터, 가령 주자학이나 성리학에서도 자연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것을 인간과 사물, 심지어는 기술의 영역에까지 확장해서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 최한기의 기학(氣學)이다.
최한기는 ‘인기화(人氣化)’나 ‘물기화(物氣化)’ 같이, 인간과 사물(동물, 식물, 무생물)을 모두 ‘기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규정한다. 나아가서 인간과 사물, 그리고 지구와 천체는 모두 ‘활동운화(活動運化)’하고, 이것은 기(氣)의 본성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지구의 자전에 의해서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는 항상 회전하고(運) 있다(다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서구 근대의 자연과학자들, 가령 갈릴레이나 뉴튼이 생각한 ‘회전하는 물체’로서의 지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최한기는 지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활동(活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아니 인간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활동’한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활동’은 현대철학적 개념으로 말하면 ‘행위성(agency)’ 개념과 상통한다.
더 나아가서 최한기는 이 세계의 활동운화를 세 차원으로 나눈다 - 우주운화(宇宙運化), 인민운화(人民運化), 기용운화(器用運化). 여기에서 우주운화는 자연 세계의 기화 과정을 가리킨다. 가령 사계절이 바뀌고 밤낮이 교대되며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나가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인민운화의 인간사회 영역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기용운화’는 도구(器)의 사용(用)에 의해 생기는 기의 변화를 말한다. 여기에서 ‘도구’는 특히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준 산업혁명 이래의 과학기술을 가리킨다. 최한기는 이것도 기화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상의 세 차원의 운화를 ‘삼기운화(三氣運化)’라고 명명하고, 이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통합적 운화, 즉 ‘일기운화(一氣運化)’를 탐구하는 것이 ‘기학(氣學)’이라고 하였다.
최한기 기학, 인류세 실학의 가능성
이것은 인류세 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세란 인간의 산업활동에 의해 야기된 인위적인 기후변화를 가리키는데, 근대인들은 인간의 산업활동(즉 과학기술의 사용)이 대기의 변화를 일으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인류세의 인간을 ‘지질학적 행위자’로 규정한 과학사가 나오미 오레스케스의 다음과 같은 말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지구과정(earth process)이 너무 거대하고 강력해서 우리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지질학의 기본 교리였다. 인류의 시간대는 지질학적 시간의 광대함에 비하면 하찮고, 인간의 활동은 지질학적 과정의 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한때는 그랬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나무를 자르고 수십억 톤의 화석연료를 태우면서 이제 우리는 지질학적 행위자(geological agent)가 되었다.”(Naomi Oreskes, “Scientific Consensus on Climate Change”, 2004)
이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인간의 산업활동이 지구의 운화에 영향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지구의 규모가 너무나 거대하고, 거기에 비하면 인간의 활동은 매우 하찮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학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인간의 산업활동(기용운화)도 기화를 일으키고, 그것은 자연의 기화(우주운화)와 어우러져 하나의 ‘일기운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보면 기학은 인류세 시대에 요청되는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아가서 오레스케스가 말한 ‘지질학적 행위자’는 기학의 용어로 바꾸면 활동기화하는 ‘기화적 인간’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학은 현대철학과의 대화가능성도 풍부하다. 역으로 기학은 인류세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바로 이런 사상적 자원을 실학자들에게서 발굴하는 작업이야말로 21세기의 실학이, 특히 철학으로서의 실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 글쓴이 : 조 성 환 (원광대 철학과 교수)
- 『사상계』 편집주간
[주요 저서]
- 『한국 근대의 탄생: 개화에서 개벽으로』, 『K-사상사』,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 등
- 번역서로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인류세란 무엇인가?』 등
☞ 〈실학산책〉 10월 추석연휴 특집 은
2025 신(新) 경세유표 연구 및 교육 지원사업 의 하나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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