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다."
"살고 싶지 않다."
어쩌면 여태 까지의 내 평생을 관통해 온
삶을 회피하고 싶고 죽음을 동경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인지를 철 든 이후 여지껏
꾸준히 찾아오긴 했는데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어슴프레 인지한 것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김태형이 말하는 "관계"도 그 원인의 하나이긴 한데
단지 그것 뿐 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며, 내 존재의의에
관한 회의감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주 원인인 것 같다.
어려서는 그 '주변 사람'이 부모와 형제 간이었으며
지금은 아내를 주로 한 자녀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고
현재 나의 자존감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사람은 할매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남편을 "인간" 아닌 도구로
인식하면서 남편을 종인 양 노예인 양 취급하는, 사랑이 결여된
상황에서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 본질조차도 헤아리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남편을 여전히 돈 버는 데 소용되는 존재로만 알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한없는 의존심이 나로 하여금 능히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못하도록 시간과 정력을 야금야금 앗아가고 있다.
내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하건 알아듣지 못하는지 아니면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것인지 확연하게 알 순 없지만
자신이 편할 대로만 사고하려 하는 견고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래보려는 의지조차도 가지 않는 데서 절망하는 것이다.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을 가진 아내들이
살아 생전에는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철저한 의존심으로 인하여
나는 나의 시간을 찾지 못하며 나의 소양을 기르며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상실한 채 죽기까지 돈 벌어 부양하는 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어리버리 지내다가 죽어갈 것이라는 절망감으로 인하여 괴롭다.
어린 시절과 옛날의 젊었던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로 부터 벗어나
태초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오히려 나보다는 현대 한국인의 사고에
어울리는 <돈 숭배>에 젖은 할매를 이해하면서 인간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고려해 보기도 하지만 글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젊었을 때부터 남의 남편을 들먹거리며 그런 남편을 가진 여자를 부러워했고
지금은 TV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을 들먹거리며 "다들 그렇다며" 자기 남편을
별이나 다른 세계에서 온 별스런 이방인인 양 취급하는 할매와...?
할매와 유사한 사고방식을 견지하며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아들과 딸..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별스럽고 유난히 현실과 어긋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수시로 느끼는 이러한 이질감이 나를 죽음으로 유혹하는 걸까?
내 옷과 이불 등은 내가 세탁하고
내 방은 물론 3층을 빼고는 집 전체를 내가 청소하며
할매가 끝내 거부하는 미싱 까지도 내가 학원에서 배워오고
분리수거 및 다림질도 물론 내 손으로 하고 지내면서
세 놓고 집 수리하고 세입자를 들이거나 이사 정산해주는 일은 물론
전기요금, 통신요금, 수도요금, 가스요금 등등 공과금도 내가 부담하며
손자 인수 하러 새벽에 나가 어린이집 가기 까지 대기해야 하고
오후에는 손자의 방과 후 일과를 전담하면서 내 시간을 갖지 못한 채로
내 하고 싶은 일이나 능히 할 수 있는 경제 활동에 조차도 짬을 내지 못해
마냥 포기하며 지내는 나의 일상이 당연한 것이며 어떤 친구의 남편과 같이
운전기사 역할에도 충실해 주기를 기대하는 우리 할매랑 죽기까지 더불어
함께 지내야만 하는 것 역시 기왕의 부부 관계이므로 마땅하고 옳은 일일까?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 만이라도 서로 상의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다면,
그런 정도의 소양이나마 갖추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면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으련만 귀찮은 일은 "당신이 잘 하니까"하며 무조건 남편에게 미뤄 버린다.
텃밭은 어떤가.
나 혼자 어렵사리 짬을 내가며 홀로 가꿔서 수확할 때가 되면
따고 자르고 캐고 담아서 3층까지 가져다 줘야만 간신히 손질해 주고
그나마 때를 놓쳐 제때에 먹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니..
부부가 함께 밭에 나가 일하는 풍경을 보면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 저것 가리는 것도 많고 걸을 땐 남이 듣는다며 말도 큰 소리로
하지 못하게 하면서 나 혼자 산책 나가는 건 극구 못하게 하고 굳이
불편하게 함께 가야 한다면서 수시로 기다리게 하고 걷는 중에도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 놓는 통에 매일처럼 홀로 산책하던 습관도 사라져버렸다.
언제까지 견디며 봉사해야 하는 걸까?
병든 사회의 "관계"에서 원인을 찾은 김태형의 분석은 옳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나같은 유형을 비정상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한국이라는 비뚤어진 사회에서 원인을 찾는 것도 당연히 옳다.
여전히 나는 죽고 싶지만
가능하다면 죽음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글쎄 그게 가능하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