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시, 어려운 시, 달아나는 시 /이영숙
포털에 ‘좋은 시’를 검색하면 좋은 시 모음,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 OOO 시인이 추천하는 좋은 시 등의 카테고리가 뜬다. 좋은 시는 명시와 동의어로 쓰이면서 애송시로도 연계된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 목록은 대체로 겹친다. 좋은 시 관련 책 정보도 여러 개 뜨는데, 올해의 좋은 시 등으로 시의 발표연도를 한정시킨 경우를 제외하면 역시 앞의 사정과 비슷하다.
클릭해 보면 대부분이 ‘최남선에서 기형도까지’의 시들로, 19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인들이 이 자장 안에 들어있다. 2020년인 현재까지 최고 120년에 걸쳐 인기를 누려왔다면 좋은 시는 생명력이 강한 시이기도 하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과연 ‘좋은 시’는 좋은 시인 것이다. 올해도 좋은 시 쓰세요, 시인에게 보내는 새해 덕담은 얼마나 훈훈했던가. 그런데…! 6년 전쯤이던가, 문예창작과 시창작 수업 때의 일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무심코 이렇게 운을 떼었을 텐데, 한 학생이 물었다. 과연 좋은 시라는 것이 보편적일 수 있을까요? 사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공적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잘 쓴 시, 완성도가 있는 시를 묶은 개념어가 ‘좋은 시’ 아니었나? 그러나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니었다.
과연, 좋은 시가 보편적일 수 있을까. 교실에서 나온 한 때의 발언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이유는 시에 대한 태도는 저마다 주관적이어서 일반화할 수 없고, 전적으로 개별적이라는 학생들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폄훼하거나 그 가치를 부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는데, 돌이켜보면 ‘좋은 시’의 목록은 학습의 결과물에 가깝다. 청소년기에 접한 시 대부분은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아주 드물게는 그 시를 마중물 삼아 시의 드넓은 바다로 나아간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에게 시는 이해와 감상보다는 시험 성적을 위해 밑줄 긋고 달달 외워야 했던 여러 암기 과목 중 하나였을 뿐이다.
시대에 따라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려고 교과서에 게재되는 시가 있었는가 하면,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배제되는 시도 있었다. 교과서의 보수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시 역시 교과서가 개정되어도 별로 바뀌지 않고 세기를 넘겨 이월되었고, 청소년기에 외웠던 시는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좋은 시’의 플랫폼으로 모여들었다. 교과서에 실린 시만큼 생명력이 긴 시가 없어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21세기의 학생들은 ‘좋은’으로 포장되어 교과서에 배포된 시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교과서의 시를 마중물 삼아 시의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던 문학 선배들과 동종인 건 맞지만, 20세기에서 이월된 시들이 자신들의 어법, 감수성, 정신세계와는 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언어도 존재도 달라졌는데, 과거의 산물인 ‘좋은 시’를 어떻게 거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대론이 말해준다.
알다시피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세대 개념은 전후세대―4·19세대―베이비붐세대―386세대―X세대―Y세대―Z세대로 변화했다. 전후세대가 1930년대에 태어나 1950년대에 20대를 이루는 집단을, 4·19세대가 194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에 20대를 이루는 집단을 가리키듯 ‘~세대’라고 했을 때의 기준은 20대다. 대략 한 세대씩 건너뛰는 식으로 전후세대의 자녀세대가 베이비붐세대이고, 4·19세대의 자녀세대가 386세대, 베이비붐세대의 자녀가 X세대, 386세대의 자녀세대가 Y세대, X세대의 자녀세대가 저 교실에서 질문을 던졌던 학생들도 속해 있는 Z세대였다.
먼저, X세대가 누구인가. 서태지로 촉발된 문화혁명의 동시대에 그들은 ‘정의할 수 없음’을 뜻하는 X로 표상되면서 X-Y-Z로 이어지는 신세대들의 시초가 되었던 집단이다. 산업화 이후의 물질적인 풍요를 바탕으로, 부분의 민주화 속에서 성장한 그들이 반항파로 불린 것은 공동체를 중시하고 행복 추구를 위해 생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필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현실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모세대의 가치를 학습하며 자란 Z세대는 바로 전의 밀레니얼세대인 Y세대와도 차별성을 가진다. Y세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 시대를 경유하면서 성장했다면, Z세대는 디지털 시대가 고향이기 때문이다. 디지털화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격차는 고령화사회와 고령사회의 차이 만큼에 비유될 수 있을까. Z세대는 온라인매체에서 문화활동과 소비활동을 하면서도 부모세대가 겪었던 금융위기 시대의 교훈을 내면화하여 합리적인 삶을 영위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패턴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두려움이 없고,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하며, 권위에 머리 숙이지 않는다는 것.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은 단적으로 브랜드보다 상품의 품질을 더 우선시하는 소비 형태에서도 나타난다.
‘좋은 시’로 뭉뚱그린 기성 시인의 저명한 시들을 좋은 시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피력했던 학생과 그에 동의한 학생들이 Z세대였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다. 중요한 것은 ‘좋은 시’에 대한 그들의 불신이 문학 주변부 젊은 층의 태도와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때 젊은 층이란, 연령대보다는 2000년대를 전후한 일군의 새로운 시적 경향―소위 어려운 시라고 뭉뚱그린―을 보여주는 시인들을 가리킨다. X-Y세대에 걸쳐지는 이들의 영혼에는 20세기의 아날로그적 전통과 21세기의 디지털적 비전이 반반씩 섞여 있다. 일단의 평론가들이 2000년대의 최고 시인으로 꼽은 김경주나, 다른 평론가 그룹에서 선정한 황병승을 예로 들자면, 이들의 새로움은 전통적 가치에서 출발한 변혁이었다. 그러나 매해 유수한 문학상의 수상자들도 점차 젊어지고 있다.
일례로 24세, 25세에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황인찬(2012년 수상), 문보영(2017년 수상) 등이 그렇다. Y세대인 이들은 새로움을 자신에게서 출발시켰다는 점에서 앞의 문학 선배들과 다르다. 이들의 어법과 감수성과 정신세계는 Z세대와 가장 근접해 있을 수밖에 없고, 게다가 현재 그 시인층은 두텁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건조하고 그토록 합리적인 사이클을 가진,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으로 불리는 Z세대 문학도들이 2000년대도 아닌 그 이전 기성세대가 완성한 ‘좋은 시’라는 브랜드를 굳이 소비할 필요를 느낄까. 문학도뿐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또래의 일반 독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1990년대 초 힙합과 함께 빠른 속도와 라임이 듬뿍 들어간 랩(rap)이 대유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노래 가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젊은이들은 랩 자체가 자신의 정신의 속도이고 몸의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Y세대의 자녀세대는 아직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당분간 Z세대에게 직계 후배는 없다. 이는 문학도로서, 혹은 이미 기성 시인으로서의 Z세대의 독주가 더 지속될 것이며, 문제는 그동안에 이들의 정체성이 더욱 오롯해져서 기성세대와의 거리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후의 세대에 미칠 이들의 영향력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장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시인들이 다양한 시를 발표하고 있지만, 큰 줄기로 보았을 때 과거에는 비교적 그 경계가 뚜렷했던 순수서정, 리얼리즘, 모더니즘 계열의 시가 분화하여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형태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는 본래의 갈래 개념을 벗어나 혹시 쉬운 시와 어려운 시로 양분되는 것은 아닐까.
2.
언필칭 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점점 더’에 방점이 찍히는데, 사실 시는 본래 어렵다. 일상보다 조금 앞에, 혹은 조금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 ‘조금’의 거리를 비추는 건 햇빛은 아니어서, 달빛이기도 하고 별빛이기도 하다. 그 ‘조금’의 거리는 동네 마실은 아니어서, 초행길이기도 하고 방랑길이기도 하다. 그 ‘조금’에 다가가는데 걸리는 게 문자 독해의 시간은 아니어서, 한 시간이나 열흘이
걸리기도 하고 결국 도달하지 못하기도 한다.
시가 어려운 이유이다. 1920년대에도 시는 어려웠고, 30년대, 40년대, ……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도 시는 여전히 어려웠다. 시인은 우리가 슬쩍 보고 지나친 것을 허투루 놓치지 않았고, 우리가 보지 않은 세계를 발견해서 가시화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으로 인해 그렇게 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비루한 일상을 시에 헹구어 내다 널기도 하고, 일상을 연민하는 자(시적 화자)의 위로를 듣기도 하고, 일상을 벗어나 시의 높이로 가끔 공중부양하기도 하였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것으로 가득한 현실세계 속에서 시가 느닷없이 포착한 낯선 찰나를 통해 생이 감각적으로 구체화되는 경험을 공유해 왔던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고, 눈에 자주 밟혀주는 ‘좋은 시’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점점 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렇게 느끼는 건 일반 독자만이 아니다. 100세 시대에 걸맞은 사회 전반적인 현상이지만, 대학의 평생교육원이나 지역의 문화원, 문화센터, 사설 교육 기관 등에서 시를 공부하는 시인 지망생이 그렇고, 시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면서 한편 비평가이기도 한 기성
시인들조차 그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의 대중화 이후 10여 년이 지나면서 스마트 폰과
태블릿 PC, SNS가 활성화되면서 시인을 포함한 저자의 권위가 사라지고 독자들이
새로운 창작자로 등장하는 시의 일대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무도 청탁하지 않았지만,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월 만 원의 구독료를 받고 하루 한 편의 수필을 구독자의 이메일로 전송해주는 셀프 연재 프로젝트 <일간 이슬아>를 시작’한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이슬아 작가, 2010년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용광로에 빠져 사망한 기사에 댓글 형식의 시, 시 형식의 댓글을 남기기 시작한 필명 제페토 등이 그 주인공이다.
작업 결과물을 책으로 냈을 때 독자의 반응은 뜨거웠고, 이들은 일약 유명해졌다. 웹진이나 블로그, 카페, 팟캐스트, 트위터 등을 통해 시의 유통도 활발해져서 독자의 취향에 따라 문예지에 실린 시들이 신속하게 온라인으로 퍼져나갔다. 1980년대까지의 ‘좋은 시’ 목록과 더불어, 이후에 발표된 시들의 제목을 치면 대부분 검색이 가능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려운 시가 문제 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선택의 주도권을 쥔 독자들이 배제해버리면 그뿐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인 조건이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기기처럼 시도 복잡하게 진화하는 가운데, 진화의 주체는 누구일까.
우리 사회에서 어려운 시와 난해시는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난해시ㆍ대중시ㆍ통속시(《현대시》 1993. 11)와, 쉬운 시ㆍ잘 팔리는 시ㆍ어려운 시(김병호, <대전일보> 2018. 03. 06)의 갈래 구분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그것은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쪽에 홀로 자리를 잡는다. 소통 부재를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소통 부재를 지향하는 것으로는 보인다. 1930년대 이상의 「오감도」가 난해시의 기원을 연 이래, 초현실주의적인 시나 해체시, 21세기 초입 미래파의 시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충격과 비판과 탐구와 모방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난해시가 시의 외연을 넓혀온 것이 사실이다. 태풍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젊은 시인들이 있었다. 범위를 좁혀 미래파가 출현한 2005년 이후 현재까지를 돌이켜보자.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피해 복구가 이루어지듯, 미래파가 던진 충격도 (논의가 충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비판과 탐구의 시간 속에서 완화되고 조정되고 부분적으로는 폐기되는 과정을 거쳤다. 기성세대는 이것을 이른바 발전적 해체의 양상으로도 보았는데, 워낙 놀라웠던 체험이었던지라 그 여진은 젊은 시인들에게서 모방과 변형이라는 형태로 내면화되고 있었던 것 같다.
미래파 이후 젊은 평론가들의 약진과 결합하면서, 대부분 대학 이상의 고학력을 가진 젊은 시인들이 일종의 전문가집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 본래 어려운 시를 이제는 손댈 수 없이 어렵게 만든 전말이 아닐까.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 또 있다. 스타벅스가 입주하면 빌딩의 물리적 가치도 상승한다는 세간에서처럼 문예지의 지면 역시 이들의 유치를 열망한다. 문예지의 소비자는 문학도와 시인ㆍ작가ㆍ평론가 등 대다수 문학의 자장 안에 있는 인물들이어서 시 전문가집단이 포진하고 있을 때(소설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겠지만) 문예지의 가치가 상승하고 그나마 부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문예지의 기본 전략이다.
이러한 전문가집단을 많이 유치할수록 일류가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암묵적으로 이류, 삼류 취급을 받기까지 한다. 평론가도 마찬가지여서 평론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자신의 위상뿐 아니라 장차 평론집의 구색에 부합하느냐의 여부도 포함된다. 젊은 평론가들이 자주 호출하는 시인들이 같은 계절에 여기저기 비슷한 주제들로 본의 아니게 겹치기 출연을 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고, 자본으로나 시장 장악력 등에서 절대적으로 메이저 문예지가 유리한 것은 당연지사다.
어려운 시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 혹은 기성 시인의 입장에서는 지적 전문가를 겸하고 있는 젊은 시인 집단, 젊은 평론가와 젊은 독자의 필요, 문예지의 욕망이라는 이 사각의 프레임을 떠도는 지적 허영이라는 유령이 자신들을 시에서 소외시킨 요인들로 보일 수도 있다. 어려운 시들이 유통되는 저 매혹적인 방식들―엘리트적 이미지, 인기를 추동하는 자본의 힘, 매체와 출판이 선호하는 아이템들, 무엇보다도 그들의 젊음―에 대한 동경과 반발이라는 양가감정, 디지털 세계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등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굳이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어려운 시’라는 브랜드를 소비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어려운 시를 쓰는 소수에 비해 여전히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이 다수이고, 좋은 시는 일상에 신선한 영감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더욱이 시간은 흘러가고 유행은 바뀐다는 사실을 현대 문화사가 보여주기까지 했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여전히 남아 있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것, 그것이 생명력이다. “의미의 해체, 지속성과 유기성의 파괴, 미결정성과 중층결정성, 불완전성과 부분적 자립성”을 “시대적 화두”로 가지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황치복, 「새로운 작시술, 서사의 문법」《열린시학》 2020. 봄)에 쓰인 시들, 곧 인간은 거세되거나 사소해지고, 시스템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지와 몸체 없는 목소리이며, 시간도 관계도 여운도 사라진 낯선 시적 공간을 젊은 시인들은 어떻게 얼마나 지켜낼 것인가. 최대 120년의 생명력을 가진 ‘좋은 시’와 견주어보았을 때 말이다.
3.
좋은 시를 쉬운 시라고, 어려운 시를 나쁜 시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좋은 시를 나쁜 시라고, 어려운 시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다. 1부는 문학도의 입장에서 좋은 시가 나쁜 시의 뉘앙스를, 2부는 일반 독자와 기성 시인의 입장에서 어려운 시가 나쁜 시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만, 좋은 시와 어려운 시 사이의 괴리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 같은 것일 뿐 다소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다. 시 안에서 세대 간의 불화는 일정 부분 당연한 일이지만, 이쪽도 저쪽도 다 포괄하는 제3의 지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하다. 일명 ‘달아나는 시’라고 명명해본다. 먼저, 생활세계에서 춘천에 가는 방식으로.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진리와 형이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초중등학교 때는 우주의 신비와 시를 배웠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연애도 했는데
또 독재자를 뽑았구나.
춘천에는 호수가 있고 산이 있고 깨끗한 길이 있지.
여자와 남자와 개들과 소풍이 있고
할머니도.
인사를 하고 밥도 먹었네.
나는 춘천에 들렀다가 그리스와 신라시대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저는 종교적인 인간이라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고백성사를 한 뒤에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만
아아, 유물론이 옳았다.
춘천에서 나는 죽어가는 시절의 고독을 떠올리고
사후의 무심을 떠올리고
길거리의 개들과 눈을 맞추었네.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가는 일
그것은 할인마트에 내리는 석양처럼 신비로운 일
낮잠에서 깨어난 오후처럼
비변증법적인 일
열차가 북한강의 긴 교량을 건널 때 옆자리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어대자
바로 그 순간 온몸에 스며드는
정확한 일
—이장욱, 「생활세계에서 춘천 가기」 전문, 《현대문학》 2017년 8월호
재미와 놀이는 불가분의 관계다. 놀이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 공부도, 직장도, 가사도 일이 된다. 일에서 보람은 느낄 수 있을지언정 재미와는 거리가 멀어지는데, 시를 읽는 일이 놀이가 되려면 이장욱을 읽자, 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시적 재미란 소재 자체가 품고 있는 유머나 희화화된 대상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우선 첫인상이 좋아야 하고, 독자를 차별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시 앞에서 긴장하지 않는다. 시가 현실에 발 담그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독자는 시가 자신에 관해 말하려 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그다음에는 시가 자신을 환상이든 미래든 지옥이든 어디로 데려가더라도 맡기고 따라간다. 시적 체험이란 시가 놀이가 되는 과정인데, 어느새 보니 독자는 시의 손을 잡고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이렇게 리듬에 몸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구어체의 문장이 축지법을 쓰는 듯 몇 계단을 한몫에 건너뛰거나(“저는 종교적인 인간이라 매일 기도를 합니다만/ 고백성사를 한 뒤에 영성체를 모셔야 합니다만/ 아아, 유물론이 옳았다.”) 사건과 사유의 충돌(“공부도 열심히 했고 연애도 했는데/ 또 독재자를 뽑았구나.”), 시제의 불규칙한 변용(“나는 춘천에 들렀다가 그리스와 신라시대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등이 시에 재미를 불어넣기도 한다. 이를 적확하게 표현한 글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불연속적인 문장들”을 징검다리처럼 건너뛰고, “시제의 의도적 교란”을 퍼즐처럼 맞추면서 “두드러지는 형태 파괴적인 실험이 없이도 충분히 전위적”(이광호)인 그의 시들과 노는 방식은 독자의 취향대로 다양해진다. 놀이의 기본 조건이다.
내용에 몰두했을 때, 독자는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최소한 세 군데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세속 공간인 ‘생활세계’와 ‘춘천’으로 상징되는 비세속 공간, 그리고 세속을 초월한 “그리스와 신라시대”가 그것이다. ‘생활세계’에서는 교육ㆍ정치ㆍ종교 행위 등을 하지만, “또 독재자를 뽑”은 것을 보면 시행착오와 판단오류가 교육을 통해서도 타성적인 종교 행위를 통해서도 좀체 개선될 여지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춘천’은 “진리와 형이상학”의 세계를 소환하여 자연 사물이나 사람이 낱낱이 물자체로 있는 공간이다. ‘생활세계’에 대한 반성(“아아, 유물론이 옳았다”)과 시대에 대한 통찰(“죽어가는 시절의 고독을 떠올리고”), 철학적 사유(“사후의 무심을 떠올리고”)가 “길거리의 개들과 눈을 맞추”면서 대등해지는 세계. 그리하여 “춘천에 들렀다가 그리스와 신라시대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사유의 여정을 가능하게 하는 곳. “유물론”과 “비변증법적”이라는 용어로 인해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가는 일’은 “할인마트에 내리는 석양처럼” 일상적이었던 것이 “신비로운 일”로 재발견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독자에 따라 ‘생활세계’와 실제적 장소로서의 ‘춘천’만 발견할 수도 있고, ‘유물론’과 ‘비변증법’을 열쇠로 삼아 시를 철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거나, “우주의 신비와 시를 배”우고 “연애도 했”다는 것의 의미를 더 파헤칠 수도 있다. ‘생활세계’와 ‘춘천’을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변주하면서 관념/감각, 몸과 마음이 분리된 세계/합일된 세계에 대한 면면들을 살필 수도 있고, “할인마트에 내리는 석양”과 “낮잠에서 깨어난 오후”가 비변증법적으로 작동하게 된 단서를 ‘춘천’에서 찾아낼 수도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장욱의 시가 다의성과 다층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장욱의 시가 ‘달아나는 시’의 놀이적 속성들을 보여줬다면, 김이듬의 시는 파토시의 지경을 보여준다. 독자의 내면에 깊이 숨어있는 ‘시골 창녀’를 발굴하는 방식으로.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 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 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
—김이듬, 「시골 창녀」, 『히스테리아』, 전문 문학과지성사, 2014
제법 긴 시의 전문을 인용한 것은 각 행과 연이 빈틈없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유지되는 긴장을 허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삽이나 곡괭이가 부질없어지는 시. 그리하여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는 시. 접신한 시. 마음의 기생, 육체파 창녀, 감정 갈보, 늙은 천기의 파토스가 다 쏟아져 들어온 시. 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할 말을 다 한 시. 금기어들로 고귀해진 시.
시(詩)인 체하는 시가 부끄러워지는 시.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퇴폐와 유흥이 전염되는 시.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지 못해 자책하게 하는 시. 나쁜 피를 수혈하는 시. 독자의 양손에 칼을 들려주는 시. 달밤에 칼춤을 추게 만드는 시. 너도 늙은 천기가 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시. 시를 보여주는 시. 주석이 필요 없는 시. 달아나는 시.
4.
달아나는 시는 생명력이 있는 시의 다른 말이다. 제3의 지대에 속한 많은 시들이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어 오래 재미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