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
- 김춘수-
어느 날, 70년 전의 어느 여름저녁입니다.
어머니가 장독간에 간장을 뜨러 갑니다.
어머니의 치마 끝을 붙잡고 나도 아장아장 따라갑니다.
어머니가 어떤 동작을 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서쪽하늘을 바라봅니다.
나도 무심코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 서쪽하늘을 쳐다봅니다.
그쪽은 온통 놀로 물들어 있습니다.
놀로 물든 하늘이 어머니의 볼을 적십니다.
어머니의 볼도 놀빛으로 불그스름 물들어갑니다.
나는 또 그런 어머니의 볼을 눈을 뚱그렇게 뜨고 하염없이 들여다봅니다.
그러자 내 눈의 꺼풀을 젖히고 예쁜 간장종지를 든 어머니가 샤갈의 그림에서처럼 내 눈 안으로 선뜻 들어옵니다.
그 뒤로 어머니는 소식이 묘연(杳然)합니다.
부재(不在)
- 김춘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 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칸나
- 김춘수-
하늘이 밍밍하다.
눈썹이 없다.
낯 가리고 대낮에 반음 소리내던
까만 겉눈썹도 젖은 눈시울도 이젠
없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까치가 다 쪼아먹고
하늘에는 눈이 없다.
없는 것이 너무 많은 하늘이
남의 집 울타리에 하릴없이
다리 하나를 걸치고 있다.
의자를 위한 바리에떼
- 김춘수-
누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면 너무나 아득하다.
내 키만한 수렁이 있고
그 언저리는 언제나 봄이다.
게가 한 마리 거품을 물고 있고
키 큰 오동나무가 아물아물 꼭대기에 하늘빛 꽃을 달고 있다.
낮 달이 나를 자꾸 따라온다.
나를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서풍무[西風賦]
- 김춘수 -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너무 무거우니까
- 김춘수-
너무 무거우면 떨어뜨려야지
수다와 수사
수염과 수컷
수사 붙은 모든 것은 다
떨어뜨려야지
군살은 빼고, 지용의 시처럼
딴딴한 참살만 남게 해야지.
머뭇머뭇하다가도 거기서 행을 바꿔
말을 덜고 말을 달래듯
너무 무거우니까
보라,
이별도 슬픔도 다 솎아내고
겨울에
마지막 하나 남은
저 잎새.
장공만리(長空萬里)
- 김춘수 -
터널을 벗어난 기차가
꼬리 잘린 기적소리를 낸다.
한 번 더 낸다.
먼저 쓰고 목뼈 부러진 어떤 파랭이꽃
되 안됐다는 듯
말끄러미 나를 본다. 거기가
그런 길섶이다.
누가 죽었나,
두건 쓰고 상여 메고
개미들이 부산하다. 하늘
드높은 곳에
앙꼬빵 소 같은 누가 두고 갔나
구름 한 점. 그새
너무 너무 새큼해진
인동잎
- 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공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越冬하는 인동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나의 하나님
- 김춘수 -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세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고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3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가을 저녁의 시(詩)
- 김춘수 -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나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 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 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을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 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약력(略歷)
한국의 시에 관계와 존재라는 현대적 존재론을 선구적으로 탐색한 ‘꽃’의 시인.
경남 통영(구 충무) 출신인 김 시인은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유학해 니혼(日本)대학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중퇴했으며, 귀국 후 중ㆍ고교 교사를 거쳐 경북대 교수와 영남대 문리대 학장, 제 11대 국회의원,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에 이어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처용단장’ ‘쉰한 편의 비가’ 등 시선집을 포함해 25권의 시집을 남기며 우리 현대시의 한 획은 그은 인물이다.
이후 1981년부터는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며 자유아세아문학상, 경남ㆍ경북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은관문화훈장, 인촌상, 대산문학상, 청마문학상 등을 휩쓸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광주 항쟁 이후 태동한 5공화국 독재 정권 하에서 자신의 지론인 순수시와 무의미 시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그 ‘순수시의 순수성’이 폄훼 받기도 했다.
역사는 미당 서정주의 전두환 찬양 연설과 함께 당시 젊은 문학 지망생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