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마태오 2,13-15.19-23)
The angel of the Lord appeared in a dream to Joseph in Egypt and said, “Rise, take the child and his mother and go to the land of Israel, for those who sought the child’s life are dead.” He rose, took the child and his mother, and went to the land of Israel.
말씀의 초대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상쇄하는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의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권고한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대하라고 당부한다. 특히 가정에서 서로 존중할 것을 강조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예고된 것처럼 다윗의 고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나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셨다가 이스라엘로 돌아가시어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에 자리를 잡고 사셨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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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세 분이 보여 주신 가정 공동체의 모범을 따라 우리 각자의 가정 또한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하는 날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냅니다. 그렇다면 어떤 가정이 성가정일까요? 화목한 가정,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유지되며 기도로 끝맺는 가정, 모든 식구가 세례를 받은 가정 등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으로는 부족합니다. 많은 것으로 채워져도 그것은 성가정의 특징은 될지언정 성가정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성가정의 성화나 성상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가정이란 ‘예수님을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가정’이며, ‘예수님을 그 공동체의 중심으로 모신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가족 구성원 서로서로가 아기 예수님으로 알고 품에 안아야 합니다. 어느 한 가정의 부모와 면담한 내용이 기억납니다. 그 가정에는 신체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돌보는 일로 가족이 10년 넘게 고생해 왔습니다. “딸 때문에 식구들이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마음고생도 많지요?” 이러한 저의 위로에 그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딸이 우리 가정의 보물입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우리 가정은 기도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 딸의 오빠와 동생도 자기 욕심만 챙겼을 것입니다. 딸아이의 장애로 말미암아 식구가 모두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고, 각자가 시간을 쪼개어 딸에게 더 마음을 쓸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얘기였습니다. 이 가정에서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처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침묵할 때와 얘기할 때
-윤희동 신부-
가톨릭 교회의 가정 모습은 성가정(聖家庭)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 모범으로 예수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의 가정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신앙 공동체의 기초로서이다. 이 기초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본당,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우리는 가정을 이야기 할 때, 무슨 내용으로 대화하나? 자녀의 학교, 결혼, 직장, 아내나 남편의 직장, 가족 건강, 가족의 내력, 부부 관계, 자녀 관계, 부모 관계, 아기의 유아 세례, 첫영성체 교리 교육, 성(聖)가정 등등 많은 삶의 과제들이 다 얘깃거리다. 가정의 삶 안에서 식구들끼리 결합하고, 헤어지고, 가끔 만나고, 영원히 이별하는 죽음에 대한 얘깃거리도 있다. 그래서 식구들은 가족의 끈을 어떻게 유지하고 이어가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 중에 부부 관계와 자녀 관계는 중요한 관건이다. 왜냐하면 가정의 소멸과 생존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살림살이를 하다보면 식구들은 서로의 위치에서 불만 혹은 만족의 정도가 달리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이 불만의 강도를 높이는데 초점을 두면, 죽니 사니 하면서 가정의 소멸로 치달릴 경우가 커서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사나 명절 때 가족들 만남은 조상에 대한 예의와 기억에 대한 시간인 동시에 식구들간의 유대와 교류의 시간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그런데 이 시간에 가족 간의 불만의 소리를 높여 서로 냉대하고 마음 아픈 불상사가 발생할 때, 그 다음 후회의 시간을 어떻게 소화할지 너무나 가슴이 쓰라린다.
가정이란 부부 또는 부모를 중심으로 혈연 관계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이다. 가정에서 식구들이 서로의 위치, 자리를 어떻게 자각하고 익혀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힘든 교육이다. 그렇지만 이 교육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깨닫고, 함께 삶을 공유하는데 연장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관계, 자녀관계에서 대화의 표현 방법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므로 침묵할 때와 얘기할 때를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사랑의 방법이면서 가족의 끈을 이어주는 형태이다. 이 방법과 형태가 쉽지 않으니 오늘날 가정공동체의 삶은 하나의 순교 모습이다. 그래서 성 요셉,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모습은 침묵과 얘기함을 배우는 장이요, 성(聖)가정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오늘 가족들 함께
-전덕중 신부-
1. ? : 물음표 - 단순한 질문을 다시 한 번 제기하기 성가정의 특징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성가정을 이야기함에 있어 항상 예수님의 이름을 먼저 부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듯이 이것은 성가정의 가장은 요셉이었으되, 그 중심은 예수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 성가정은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집안의 가장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아가게 될 때 성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성가정인가?"라는 질문 앞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하느님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2. ! : 느낌표 - 우리의 삶에서 마음으로 느껴가기 예수님도 가끔씩은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부모님께 이야기하지도 않고 혼자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부모님이 다시 길을 거슬러 올라오게 만드는 수고를 겪게 하기도 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가정은 아무런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저 고요한 가정이라기보다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줄 수 있는, 그래서 긍적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몫을 일구어 갈 수 있는 그런 가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살며시 전해주고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 그것은 문제없음으로 일관된 고요한 바다 위를 다니는 커다란 배라기보다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파도를 헤치고 다시금 방향을 잡아 항해를 하는 작은 돛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가정이 무척이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음에 만족하기보다는 문제를 직시할 수 있고, 그 문제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심을,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의 중심이 되어서 그것과 함께 하고 있음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단순한 것이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요, 그것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 : 마침표 - 이제는 그것을 살아가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애인같은 아내가 있고, 오빠같은 남편이 있는 가정, 아버지가 늘 자랑스럽고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고운 가정, 사소한 칭찬에도 감격하는 아이들과 작은 말 한마디에도 큰 행복을 느끼는 식구가 있는 가정, 자식들을 위한 아버지의 기도와 어머니의 정성이 마르지 않는 곳, 이따금 찾아드는 불행에도 다시 일어설 줄 아는 가정, 이웃에게도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고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행복한 가정"(http://www.church.co.kr/ dongwon/zine/Clinic18.html)입니다. 이제는 이것을 살아갈 때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의 일을 이제 우리는 살아갈 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한해를 마치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우리들의 일입니다.
오늘 가족들 함께 자장면이라도 먹죠? 좋잖아요.
성가정이란?
-이용화 신부-
성탄의 기쁨을 잠시 뒤로하고 전례력으로 성가정 축일을 맞이한다. 성가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정은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삶의 기본 자리이며, 이곳을 통해 아이들은 책임과 권리, 평화와 기쁨, 평등과 자유, 희생과 사랑을 배운다. 이 곳은 못자리와도 같은 곳으로 올바른 인격이 형성되는 장이다. 교회에서 성가정 축일을 정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게 하려는 목적에 있다.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을 통해 성가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복음사가인 마태오는 긴박하고 암울한 사건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주의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준다. 요셉은 천사의 명에 따라 지체 없이 천사가 명한 것을 행동에 옮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셉의 단순하면서도 순종하는 성품을 엿 볼 수 있다. 고향을 떠나는 요셉은 아기 예수에 대한 보호의 의무감과 더불어(부모의 책임),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미 하느님에 의해서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에집트로의 피신 또한 하느님에 의해서 미리 계획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하느님께 순종). 하느님의 계획은 때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제1독서에서 집회서 저자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특히 가정윤리, 가정 규범을 강조하며,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 계명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비를 공경하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역경에 처했을 때도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15절). 결국 저자는 부모에 대한 효심은 필연적으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제2독서에서 바울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삶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이란 일반적인 윤리규범과는 달리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말한다. 그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자들이니 주님이 용서한 것처럼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라고 촉구하신다. 또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존중하며, 부모와 자식간에는 순종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정에서 가장 필요한 묘약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는 삼류소설에 나오는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슴도치도 자기의 새끼를 귀여워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자식이라 할지라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즈음에 자기 자식을 버렸다는 기사를 자주 접한다. 인간은 본능이 아니라 사고를 지닌 고등동물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참으로 세상 살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러한 때에 주님은 역설적으로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에게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부모, 부모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아이들.... 하느님 중심으로 기도하는 가정. 한 해를 마감하며 새로운 기운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자!
하느님과 함께 사는 건강한 가족
-권창현 신부-
오늘날 현대인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사회와 제도의 변화, 폭증하는 정보의 양에 맞서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가고, 가정의 안정과 가족의 건강을 지켜갈 것인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높은 인구의 유동성, 대가족과의 접촉감소, 교회 신자나 이웃과의 깊은 교류의 감소, 가족구성원의 관계의 약화와 대화의 감소 등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대가족, 교회, 이웃의 전통적 체계는 변화에 대처해 나가는데 있어서 완충역할을 해왔고, 의식, 이야기, 그리고 상징을 통해 삶의 의미와 방향감각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유동성이 많고 마음의 여유가 없이 가족들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요즈음 가족 이야기를 나누고, 휴일을 함께 보내며 가치를 전수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온가족이 함께 동참하여 경축하고, 여가를 즐기고, 미래의 삶을 대비하며 지혜를 나누는 사회적, 종교적 의식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대형 쇼핑몰과 극장가, 게임장소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미래를 투시하며 대비하는 안목과 지혜, 마음 깊은 곳에서 가족들이 나누는 풋풋한 이야기, 노래, 상호 관심과 배려 등의 기회를 앗아가곤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혈연의 가족과 신앙의 가족들이 서로 추억을 만들고, 참다운 의식과 전통을 지속시키고 발전시켜가야겠습니다. 가정과 신앙공동체의 의식은 가족의 정체성, 안정성, 변화, 시간, 의사소통, 그리고 치유를 안겨다 줍니다. 건강한 가족은 함께 축하의식을 행하고, 단란하며,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행합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헌신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위기에도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이러한 건강한 가족의 삶을 창출해 내기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와 서로에 대한 감사, 참된 대화의 장을 통해 삶과 지혜를 나누어야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 가족들은 물음을 던집니다. “어떻게 우리가 나자렛의 거룩한 가족을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동정녀이시고, 요셉은 독신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함께 생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성가족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은 가난, 불확실성, 갑작스런 변화들, 그리고 힘든 여정 등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방법을 아신 건강한 가족이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카이로까지 300마일, 3주정도 걸려 피신하는 동안 하느님은 사막의 낮의 무더위와 밤의 추위를 제거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분들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과 언젠가 당신들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이유를 알게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고 그 힘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갔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을 고통으로부터 막아주시지 않으셨지만, 그 어려움을 지고 갈 강인함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는 통찰력을 그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와 강인한 의지를 통해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셨고, 우리에게는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당신을 찾는 우리의 가족들과 특별히 함께 계십니다. 아멘.
성가정 축일
-장민휘 신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곳 중의 하나가 '가정'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가정에서 시작되고 가정 안에서 보내다가 가정 안에서 마치게 됩니다. 비록 남남으로 인연을 맺은 부부지만 가정 안에서 하나되고 사랑의 결실을 맺으며,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난 자녀들은 부모의 희망을 더해 줍니다. 이처럼 가정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우리 모두의 보금자리이며 안식처일뿐 아니라 생활의 전당입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인생살이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좋은 가정은 이 나라와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갑니다. 또한 우리 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들어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의 가정을 나자렛의 성가정처럼 소박하고 조촐하며, 성스럽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만들어 나간다면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성가정의 표양을 본받아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가운데 가족들을 애정으로 감싸주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도록 가족모두가 힘써야 합니다.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코 재산이나 명예나 지위가 아니라 가족들이 서로를 아껴주고 믿어주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 가족들을 이해하고, 자기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가족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서로를 위해서 봉사할 때 우리 가정은 분명히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마침 2독서의 내용이 가정을 위한 명확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분입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무슨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들을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어서는 안됩니다."(골로 3, 1. 18-21) 우리 모두에게 가정은 소중합니다.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가정이라는 공동체라면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바로 이 가정에서 싹이 트고 영글어 집니다. 연말연시 송년회다 망년회다하여 자칫 가정에 소홀하기 쉬운 시기입니다. 성가정 축일에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가정이 성실하게 지켜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 8일 축제 제 5일
-심탁 신부-
12월 29일 (토)- 성탄 8일 축제 제 5일 (1요한 2,3-11 ; 루가 2,22-35) 오늘 복음은 예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례를 치르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그것은 출애급기 12-13장에 자세히 나오는 이른바 <칠칠절> 혹은 <맥추절>로서, 맏아들을 주님께 봉헌하는 예식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첫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모세가 정한 이 법이 곧 <주님의 율법>이었다하는 대목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님의 율법>으로 동일시 될 정도로, 모세의 권위가 이만큼이나 높았다고 복음서는 증언합니다. 복음서에서 두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인격이 훌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늙어 가면서도 게으르거나 추해지지 않고, 누가 보더라도 의롭고 경건하게 자신의 삶을 잘 가꾸어 나갔습니다. 복음서에서 세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시므온의 신앙과 영적인 삶입니다. 그는 늙도록 초지일관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신앙인>이었고, 그는 항상 “성령과 함께”한 <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서는 증언하기를, <성령>께서 그에게 머물러 계셨고, 그에게 그리스도-즉 구세주 메시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 주신 분은 <성령>이시며, 아기 예수님을 첫 대면 할 때 그를 성전으로 인도하신 분도 <성령>이셨다고 합니다. 그가 스스로 노력한 <훌륭한 인격>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굳건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결국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소 두 팔에 받아 가슴에 안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구세주를 만난 그의 <인격과 신앙>은 결국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로 수렴되어 종결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즉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으로 승화됩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순간, 그의 수십 년간의 인생의 의미는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살면서 일생에 이루어야 할 과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고 생각하십니까 ? 일단 돈부터 좀 벌어 놓고 보자, … 일단 돈 많이 벌어 놓고, 나중에 좋은데 쓰면 되잖아,라고 생각하고 <돈, 돈>하고 사시지는 않습니까 ? 물론 나쁘지 않습니다. 대기만성이라, 큰 돈 모아 사회에 봉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언제 죽을 지도 모르면서, 일단 돈부터 벌자는 식은 더구나 사건 사고가 많은 이 시대를 살기에는 너무 위험성이 높습니다. 유비무환이라. 제 생각에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대비책부터 일단 마련해 놓고, 그 다음에 그간에 할 일들의 위계질서를 잡아 하나 둘 실천하는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인생을 걸고 단 한 가지 할일 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 그것부터 인생의 설계를 다시 해 봅시다.
우리는 나면서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몸들입니다. 영원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인생의 기본적인 분수를 잊지 맙시다. 방심하지 않고 부지런히 기도하고, 늙어 죽음이 다가오도록 구세주를 기다린 끝에 시므온은 주님을 만났음을 기억합시다. <늘 깨어 기다린 자만이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가슴에 안게 되더라>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배웁니다
주님 안에서의 가정
-서울대교구 사무처-
1. 성서이야기 제1독서인 집회서 3,5-7.14-17은 일종의 가훈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자녀들은 하인이 주인을 섬기듯 말과 행실로써 어버이를 섬겨야 죄의 용서를 받고 새 삶을 이루며 장수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이야말로 가정 윤리의 근본이라 하겠습니다. 제2독서인 골로사이서 3,12-21은 그리스도교 윤리로서 특히 가정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덕목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답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보여 준 사랑을 간직하고 ‘주님 안에서’ 가정을 꾸며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태오 2,13-15.19-23은 예수 유년기로서 예수가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자렛으로 되돌아와 정착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만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줍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아기 예수를 데리고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다시 주님의 천사가 꿈에 일러주는 말을 듣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 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정착합니다. 이로 인하여 아기 예수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23절). 여기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리리라”는 그리스 원문에 의하면 “그는 나조라이오스라 불리리라”입니다. “나조라이오스”는 나자렛 사람이란 뜻이지만 30일 이상 삭발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기로 서원한 “나지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가 태어날 무렵 유다인들 사이에는 메시아는 이집트를 다녀와야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분은 과거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낸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아기 예수가 이집트로 피신하여 살다가 돌아온 이야기는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되어 나온 민족의 역사를 상징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가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나중에는 나자렛에서 자라신 것은 하느님의 경륜에 따른 것입니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 내었다”는 말씀은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라는 호세 11,1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려고 요셉과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의 가계를 각별히 돌보신 것입니다.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본받아 성가정을 이루기로 다짐하는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회조직의 근간인 가정질서가 무너짐으로써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극도의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에 젖어 있고 어른들은 가정에서 삶의 만족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주기보다는 사랑이란 미명하에 그들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삼습니다. 사랑이 지나치면 지배나 소유로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또한 부모들은 결혼의 신성함을 깨닫고 부부일신을 실천하여 가정에서 삶의 만족을 높여야 합니다. 부부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곳에서 자녀들은 결코 건강하게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개인적으로 잘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좋은 관계를 맺으며 특히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성가정으로 거듭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가정의 교훈
- 김영수 신부-
우리가 쓰는 말 중의 거룩하다란 의미의 「성(聖)」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자르다」 「분리하다」란 말에서 파생된 말로서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인데, 이 말이 어떤 인물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 등과 함께 쓰이게 되면서 단순한 구별보다는 인물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 그 자체를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성」의 이러한 의미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성체 성사를 통하여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변화 되듯이 성령에 의해 사람과 사물이 거룩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거룩함)」이란 말을 그것과 함께 사용되는 사람이나 사물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다란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다양한 견해가 있기에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성」이란 개념을 다른 의미에서 해석해볼 여지는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성」이란 개념을 「하느님(초월자)과 관계된」 혹은 「하느님과 연결된」이란 의미가 더 적절치 않을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성서란 말도 책 자체가 거룩하다란 의미나 다른 책들 보다 우위에 있는 책이란 의미(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라도)보다는 하느님과 관계된 내용을 적고 있는 책, 하느님과 관계된 말씀을 전하는 책이란 의미로 알아듣는 것도 무리가 없는 이해이고, 「성지(聖地)」란 말도 땅 그 자체가 거룩하고 다른 땅에 없는 신성한 기운이 있는 땅이란 의미보다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었던 땅이란 의미가 더 타당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자주 오해되는 「성직」이란 말도 그 일 자체가 세상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무엇이거나 거룩한 무엇으로 존경받아야 하는 직업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느님과 관계된 일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울 것이고, 이렇게 받아들일 때 성직이 가지는 그릇된 권위나 거짓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성물」이나 「성가」란 말도 어떤 물건이나 노래 자체의 거룩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과 연결되는 어떤 부분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이란 말이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붙여 사용될 때는 그 자체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개념이란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는데 이 성가정이란 의미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흔히 성가정 하면 그 가정 자체의 거룩함을 떠오르기 쉽다. 그러기에 이 가정은 다른 가정에는 없는 신성함과 거룩함, 평화로움과 행복, 그리고 세상의 모든 선들이 가득한 가정이요, 그런 의미에서 성가정이거니 생각하기 쉽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성가정이란 말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용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일면을 보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성가정은 세상이 불행의 요소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가진, 너무나 평범하다 못해 불행한 가정이 바로 성가정이다. 가난, 갈등, 불화, 불효, 고통,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죽음 등 등 외적인 조건만으로 판단한다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가정이요, 우리가 환상 속에 그리는 핑크빛 가정이 아니라 어둠의 그림자를 동시에 가진 가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런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진 이 가정을 교회는 여전히 성가정이라 부르고 있고, 우리 모든 가정이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이 가정이 가졌던 「모든 것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눈」, 「불행의 요소마저도 하느님과 연결시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때문인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도, 이해 못할 아들의 행동과 불효의 순간에도, 혼전 임신으로 이혼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는 사건 자체에 집착하기 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받아들였고, 바로 이러한 삶이 성가정을 다른 가정과 구별짓는 가장 큰 특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가정 축일을 지내는 우리의 삶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가족과 우리 가정의 일을 하느님과 연결하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불평하는 아내와 사사건건 비판하는 남편, 부모의 속을 끓이는 자식과 자식을 이해못하는 부모, 그리고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모든 요소와 상황들. 그 모든 것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관계된 하느님을 발견하는 삶. 바로 이 삶이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묵상해야할 성가정의 교훈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성가정의 의미와 교훈
-홍금표 신부-
우리는 흔히「성가정」하면 뭔가는 모르지만 막연하게 나마 거룩하고 평화롭고 행복이 넘치는 가정,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가득한 무지개빛 가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본받는다 라고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의 한 부분은 우리가 가지지 못했지만 「성가정」이 지녔을 법한 행복이, 우리 가정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가정」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가정은 우리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상이한 가정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가정」은 우리가 기대했던 행복과 평화가 넘치는 무지개빛의 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정, 우리 가정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불행의 요소를 두루 갖춘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가정이었다.
요셉의 직업은 장인이었는데, 이 말은 막일을 하던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 오늘날 인건비가 비싼 한국 땅에서도 일일 노동자들의 삶이 고단하다면, 2000년 전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을 정도의 작은 도시 나자렛에서 막노동으로 삶을 살아갔을「성가정」의 경제적 모습은 쉽게 상상이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둘째로 이 가정은, 부부간의 불신과 오해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처녀가 정혼을 한 다음에도 동거생활을 하지 않고 약 1년간 친정에서 살게 된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된 시기는 바로 이 1년간의 친정에서의 생활 중 즉, 첫 번째 결혼과 두 번째 결혼 사이에 아기를 갖게 된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는 많은 오해와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요셉은 남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될 정도로 이 「성가정」에도 극복해야 할, 오늘날 우리 가정이 가지고 있는 불신과 갈등의 요소를 똑같이 가지고 있던 가정이었다.
세 번째로, 이 가정은 자식의 불효가 있는 가정이었다.
복음에도 그 한 면을 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열 두살 되던 해 과월절 때,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부모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리게 된다. 때문에 부모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어렵게 성전에서 그 아들을 되찾게 된다.
그 때 부모의 애타는 마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란 황당무계하기까지 하고, 성질 급한 한국 사람이라면 한 대 두드려 맞았을 소리,
그리고 더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시절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술주정뱅이요, 악령 들린 사람, 죄인들하고 어울리는 상놈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이 걱정되어 찾아간 어머니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라는 너무나 매몰차고 어미의 가슴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하다.
네 번째로, 이 가정은 고통이 있는 가정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주고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은 서양인들에게는 배우자의 죽음이고, 동양인에게 있어서는 자식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성가정」은 이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겪은 가정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외아들마저도 자신의 눈앞에서 처절히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만 했던 가정이 바로 이 가정이었다. 바로 이러한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던 가정이 바로「성가정」이었다.
그러면 무엇일까? 성가정의 이러한 모습이 분명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진면목은 아닐진데, "성가정"을 통해 우리가 본받아야할 교훈과 모범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성가정」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자리 때문이리라.
분명 「성가정」은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가정」은 「하느님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 중요한 선택과 결단의 순간 「하느님의 뜻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와 여백」이라는 참으로 우리 신앙인들이 두고두고 생각해야만 할 소중한 보물을 간직하고 있었던 가정이었다는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도, 이해 못할 아들의 행동과 불효의 순간에도, 이해 못할 임신으로 이혼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 가정을 이끌어 간 것은 인간적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그 가정을 이끌어 가는 중심축이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이 활동할 수 있는 자리와 공간을 마련해 드렸다는 것이「성가정」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 성가정과 향주삼덕 >
-전삼용신부-
소와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호랑이에게 대접했습니다. 호랑이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호랑이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다 참다 드디어 소와 호랑이는 다툽니다. 결국 둘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소는 소대로,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난 최선을 다했어.’였습니다.
호랑이와 소는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라고 엮어놓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기대했던 것만큼 녹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와 호랑이가 만나 하나가 되는 방법은 없을까요? 결국 소는 고기에 맛들이고 호랑이는 풀에 맛 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예수님과 나무가 한 몸이 되어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은 나무 위에 놓였지만 사람과 나무가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은 십자나무와 하나가 되어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 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는 덕을 믿음, 희망, 사랑이라 하여 향주삼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힘으로는 나무에 매달려 계실 수 없지만 못 세 개를 통하여 십자가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이 향주삼덕으로 당신 자신을 뚫어 십자가에 달려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소와 호랑이도 이 향주삼덕으로 자신들을 뚫는 아픔을 감수할 수 있다면 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먼저 ‘믿음’으로 서로의 오른 손을 뚫어야합니다. 믿음은 서로를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덕은 하느님께 가기 위한 덕이지 서로를 위한 덕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서로를 믿는다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몇 달 만에 본 마리아는 배가 불러온 상태였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와 혼인하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잉태된 것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성모님 또한 하느님의 정배로서 남편이 필요치 않았지만 성가정을 지켜줄 가장으로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남편이 요셉임을 믿어야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해주셨다는 믿음만 있다면 서로를 믿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서른이 될 때까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 그 이유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위해 정해주신 부모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해가지고...’가 아닌, ‘하느님께서 왜 이 사람을 나의 정배로 정해주셨을까?’를 생각해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이유를 깨달아 나갈 수 있습니다.
왼 손을 뚫는 두 번째 못은 ‘희망’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장인이 어떤 물건을 만들었다면 반드시 그 목적이 있듯이,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셨다면 합당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맺어주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인류구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대로 산 결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성가정으로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신다면 자녀를 낳아 번성하고 그 가정뿐만 아니라 그 가정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음화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디펙 쵸프라가 자기 두 아들에게 “너희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가만 생각하라.”라고 가르친 것이 우리 가정교육에도 모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을 신앙교육이 아닌 이 현 세상에서만 물질적으로 안녕 되게 살게 만들려고 한다면 올바른 희망을 지닌 가정이 아닙니다. 모든 성가정의 희망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처럼 세상 구원에 이바지하고 하늘나라의 천상가정으로 다시 모이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둘의 만남은 기찻길과 같습니다. 기찻길은 두 선로가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합니다. 서로 다른 희망을 지니고 있다면 벌어진다든지 아니면 붙어버려서 더 이상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즉 서로 같은 희망, 같은 목적지를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가장 중요한 못, 어쩌면 양 손의 힘이 빠졌을 때 온 몸을 지탱해주어야 하는 못이 바로 양 발을 박은 못입니다. 믿음과 희망이 두 날개라면, 그 날개로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몸통인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믿음과 희망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조금도 하늘로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해.’란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만이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사랑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누군들 사랑하면 행복한 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때는 미워지기 시작해서 용서가 안 될 때가 있고 그냥 냉랭하게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이는 사랑이 우리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내가 스스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운전자는 영혼이고 차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자신에게서 에너지, 즉 사랑이 솟아나오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그 힘을 받아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넣지 않은 차는 움직일 수 없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으면 둘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사랑은 우리 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만 그 ‘열매’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지 않을 때는 누가 나의 뒷담화만 해도 미워질 수 있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고정원씨처럼 자신의 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자신 양아들로 삼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생깁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세 개의 못으로 비유한 이유는 그만큼 내 자신을 죽이는 아픔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매일 여기에만 머무르려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줄 알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서로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태울 줄 모른다면 가정은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우리는 오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부부는 성탄절 선물을 고심하다가 남편은 가보로 내려오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를 위해 빗을 사오고, 아내는 자신의 자랑인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해 시곗줄을 사옵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내 자신을 그렇게 태우고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성령의 뜨거운 불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에 사랑이 있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구성원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성령의 불로 자기 마음을 채우는 좋은 신앙인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요셉이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고 또 이집트에서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이야기로 꾸민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구약성서가 약속한 바를 성취한 것이었다는 그들의 믿음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의 것입니다. 그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구약성서는 절대적 가치를 지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 안에 구약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그분 안에 구약성서의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옛날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공동체는 예수님도 태어나자 이집트를 다녀오게 만들어서, 예수님은 구약성서가 보도하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요약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천사가 요셉의 꿈에 세 번 나타난 것으로 말합니다. 요셉은 매번 천사의 말에 순종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천사와 꿈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는 표상(表象)들입니다. 천사와 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신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순종하였다는 말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이 되고자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인의 살인, 노아 시대의 타락한 생활, 바벨탑을 짓는 이들의 방자함 등, 불순종의 역사 후에, 아브라함은 순종의 역사를 시작한 인물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요셉이 순종하였다고 반복해 말하면서,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순종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만 믿고 길을 떠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이었고,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에게 신뢰하면서 길을 떠나 아기 예수의 생명을 보호하고 키우는 아버지가 된 요셉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에 아브라함의 순종이 있었듯이, 예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에도 요셉의 순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에게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순종은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피동성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영접하고 그 하느님을 중심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새롭게 보면서 감행하는 하나의 모험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자기도 자비롭고, 하느님이 사랑하셔서 자기도 사랑하는 노력을 하는 모험입니다. 그것이 모험인 것은 그 결과와 대가가 보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 하는 순종은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수작하는 노예의 비굴함이 아닙니다. 순종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능력을 얻어내고 자기 자신을 더 훌륭하게 포장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이 아닙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이 있자, 곧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여 새롭게 출발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아브라함의 순종이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얻어 그 후손들이 마음껏 자기의 삶을 펼치며 사는 계기가 되었듯이, 요셉의 순종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을 영접하고 자라게 하여,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을 마음껏 살아 보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영접하여 베풀고 나누며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0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축일입니다. 현대 산업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가정의 존엄성은 훼손되었습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가정은 소중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대 기술 산업사회는 개인 중심적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회는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예수님도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한 가정 안에서 자랐습니다.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사랑과 섬김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여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길을 떠난 요셉과 같이, 우리의 가정도 말씀을 영접하여 함께 길을 떠나는 곳이 되도록 하자는 축일입니다. 어린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그 말씀 따라 길을 떠나는 방식을 배웠듯이, 우리의 가정에서 자라는 생명도 말씀을 영접하고 길을 떠나는 방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한 사람 더 잘 되자고 노심초사하는 세상입니다. 자기 한 사람의 중요성만 알고 주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오늘의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씀은 가까운 곳에서 들립니다. 어려움을 겪는 친구를 위해 해야 할 바가 있다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는 친구, 아버지가 실직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 집안에 환자가 있어서 우울한 친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녀들이 깨달을 때, 그 자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가정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말씀을 듣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바를찾아서 길을 떠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경제적으로 크게 여유를 갖지 못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누고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렵게 사는 이들을 온 가족이 함께 찾아보고, 외로운 이들을 집안에 초대하여 위로하는 경우들을 우리는 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하는 가정들입니다. 가정은 그런 나눔과 섬김을 배우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욕심과 허세만 보고 배우도록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잘 먹이고 잘 입혀서 자녀를 위한 부모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만 잘 해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운 자기 주변에서 들을 줄 아는 생명이 되게 해야 합니다. 가정은 자녀들이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아침저녁 강제로 기도하게 하라는 성가정 축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자기가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일을 깨닫고 길을 떠나는 자녀를 키우는 가정이 되도록 하자는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하신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듣고 배워서 사랑하고 섬길 줄 아는 생명이 자라는 가정이라야 할 것입니다. ◆
성가정 축일 -조재형-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7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러시아의 문학가 푸시킨은 이렇게 노래를 하였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2007년도를 돌아보면 속상한 일도 있었을 것이고, 마음 아픈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입니다.
캐나다 겔프라는 곳에서 40일 피정을 하는 중에 새 한 마리가 키 큰 나무 위에 작은 나뭇가지를 부지런히 물어다 나르는 것을 보았는데 얼마 후 둥지가 완성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정 중에 둥지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새들이 둥지를 지을 때는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을 골라 짓는다고 합니다. 한겨울 세찬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을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앙상한 나무위의 얼기설기한 둥지는 거센 바람에도 끄떡없이 건재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새가 어찌 어려운 때를 미리 알고 바람 부는 날을 택해 집을 지을 줄 아는지 자연의 이치에 새삼 놀라움을 느낍니다.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이제 3주 된 아이가 유아세례와 병자성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눈물겨웠습니다. 세례를 주고, 기도를 하는 동안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그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라 믿었습니다. 정말 작은 손가락, 입술, 눈 보기만 해도 귀여운 아기였습니다. 작은 시련이 왔지만 그 시련을 통해서 온 가족이 모두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마리아, 요셉 예수님께서 이루셨던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힘들고 어려워지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원인은 가정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가정을 본받아 가정이 주님의 작은 교회로 거듭 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본당의 교우들이 태안반도에 기름 찌꺼기를 걷어내는 봉사를 가셨습니다. 그중에는 부부가 함께 가는 분도 있었고, 자녀와 함께 가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봉사를 간다는 것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각자의 일 때문에, 다들 바쁘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가정은 잠을 자는 하숙집으로 변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다면 비록 슬픔과 아픔 고통과 좌절이 있다 해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정교육의 모델이 되는 가문이 미국의 조나단과 사라의 가문이라고 합니다. 가난했던 신랑 조나단과 신부 사라를 위해 그 부모가 통나무를 베어 지어주었던 신접살림 집인 작은 시골 마을 통나무집이 유명한 관광지가 된 것은 조나단과 사라의 후손들이 5대에 걸쳐 엄청난 수의 유명인을 길러냈기 때문입니다. 부통령 1명, 주지사 3명, 대도시 시장 3명, 대학 총장 13명, 의사 68명, 교수 66명, 의과대학장 1명, 법과대학장 1명, 차관급 고급공무원 83명, 변호사 139명, 판사 33명 등이라고 합니다. 물론 무엇이 되었다는 것으로 교육의 성패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의 후손들이 모두 덕망이 높고 가정적으로 행복하며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도대체 이 가문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6명의 일치된 연구결과는 조나단과 사라 부부가 깊이 사랑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들 부부는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였고 그것이 훌륭한 후손들을 길러내는 원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자녀들은 안정감을 얻고 정서지수나 창의력뿐만 아니라 전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임을 부모는 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에페소서 6장 4절에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를 가장 노엽게 하는 것은 부부가 불화하여 아이의 평안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의 성서 말씀을 통해서 나사렛의 성가정을 본받는 길이 무엇인지, 그래서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길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분입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들을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성가정(聖家庭)의 비결>
-양승국신부-
나름대로 꽤 진한 사추기(思秋期)를 겪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상처받고 괴로워하던 제게 존경하는 수녀님께서 ‘현실요법’과 관련한 한 아티클(김인자 교수, 좋은 인간관계학회)을 읽어보라고 주셨습니다.
별것 아니겠지 했었지만, 첫 페이지부터 끝장을 넘길 때 까지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한 마디 한 마디가 구구절절이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어찌 그리도 제 가슴을 치게 하는 말들만 모아놓았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만병통치약입니다.”
“상대방이 바뀌어야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좋은 관계는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인간관계를 잘 유지해주는 주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조건 없이 자기를 사랑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으면 일시적으로 방황은 하지만 탈선이나 범죄, 정신질환이나 신경증 등 부정적인 행동들을 선택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중국 속담에 보복을 시작하기 전에 무덤 두개를 파놓고 하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보복은 결국 둘이 다 멸망한다는 뜻이죠. 우리의 만남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사이에서 생긴 문제는 서로 괴로워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문제를 극복해서 행복해지기 위해 생기는 것으로 보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 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되지요.”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가정(聖家庭)은 어떤 가정이었습니까? 모든 것이 다 갖춰진 평수 넓은 고급 아파트를 소유한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는 부유한 가정도 아니었습니다. 늘 안정과 평화가 깃든 원만한 가정도 아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 시초부터 성가정은 절대로 원만치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너무도 억울하고, 또 이상하게 여겼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까지 했습니다. 탄생한 아기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그 자체로 스트레스 덩어리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그날부터 갖은 죽을 고생을 다해야 했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내린 호구조사령에 따라 임신한 마리아와 함께 요셉이 자신의 본 고향 베들레헴에 들렀을 때, 하필 마리아는 해산을 해야 했습니다. 고향 베들레헴에는 친척도 꽤 많았을 텐데, 다들 요셉을 문전박대 했던가봅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해산할 방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한 요셉의 체면은 이만저만 구겨진 것이 아니었겠지요.
요셉이 목수 일을 했다고 하지만 성가정은 찢어질 듯이 가난했었던가봅니다.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 때 요셉이 예물로 바친 것은 고작 비둘기 새끼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로데의 칼날을 피해 마리아와 요셉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머나먼 타국 이집트로 이사 가야 했습니다. 안 그래도 궁핍했던 성가정이었는데, 남의 나라 땅에서 죽을 고생을 다 했겠지요.
성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두고 보면 참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지경이었습니다. 도무지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가정, 뭔가 이상한 가정이었지요. 엄밀히 따지면 서로 피 한 방 울 섞이지 않는 남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신비에 쌓여있었고, 성장하면서 가끔씩 보여준 돌출적인 언행들은 마리아와 요셉의 속을 사정없이 뒤집어놓기도 했고, 비수처럼 찌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가정의 구성원 각자 각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진 노력했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갔습니다.
상대방으로 인해 미칠 것만 같을 때, 상대방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순간에도 상대방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그렇게 각자의 신앙여정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성가정 축일에 이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원만한 가정은 절대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끊임없는 상호 인내와 지지, 계속되는 용서와 격려, 그 결과 이루어지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가정은 구성원 각자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는 장소입니다. 찌꺼기를 나누는 장소가 결코 아닙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