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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開拓者)★
1. 노숙 [201~205]
201
“안돼.”
김명천이 머리를 저었다.
“난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나는 한랜드를 통치할 야망 따위도 없어. 그저 한랜드의 건립에 일조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거야.”
“한랜드는 당신이 만들어 낸거야. 일성그룹은 당신 덕분에 한랜드를 차지했다구. 당신이 없었으면 한랜드는 이미 일본이나 유럽 연합체 소유가 되었어.”
다부지게 말한 민경아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당신은 이 동토의 통치자가 될 자격이 충분해. 아니, 안회장이 당신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 당연해. 당신은 그 제의를 받아 들여야 돼. 그러기 위해서는 안세영과 결합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순리적이야.”
순리적이라구?”
눈썹을 모은 김명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 난 출세지향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하고 또 하나는.”
김명천이 손끝으로 민경아의 콧등을 가리켰다.
“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것이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명천씨.”
“시끄러.”
“객기 부리지마. 영웅심을 버려.”
김명천이 퍼뜩 눈을 크게 떴지만 민경아는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결혼도 현실이야. 현실을 무시하면 할수록 상처는 더 커져.”
그리고는 민경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명천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 그만해. 피로할 텐데 어서 욕실로가. 내가 안마나 해줄께.”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래. 안회장도, 안세영씨도 마찬가지야.”
그리고는 민경아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김명천의 시선이 알몸의 젖가슴에 닿자 민경아는 시트를 당겨 가슴을 가렸다.
“나도 그래. 나도 마찬가지라구.”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민경아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정당한 댓가를 받는 것을 원해. 한랜드 통치자의 여자가 되고 싶단 말이야. 건립을 돕다가 사라져서 금방 잊혀져버린 어떤 남자의 애인이 되기는 싫어.”
“욕심이 많군.”
“정당한거야.”
그리고는 민경아가 김명천의 손을 끌어 자신의 젖가슴에 대었다.
“날 가지려면 당신도 욕심을 가져야 돼. 안세영을 택하라구. 그러면 둘 다 가지게 돼.”
“백남철은 아무르강가의 숙소에 묵을 것입니다.”
사내가 손끝으로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하바로프스크 북쪽 교외의 도로에서도 4㎞ 정도나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은 경비망이 3중으로 되어 있는데다 숙소 안에는 요소마다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고 건물 밖은 지뢰가 쫙 깔렸습니다. 포사격으로 멀리서 건물을 쏴 부순다면 모를까 침투는 불가능합니다.”
“흥, 그렇군.”
코웃음을 친 마쓰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작은 키에 체격도 작았지만 눈빛이 날카로왔고 다부진 인상이었다.
고려인으로 야마구치조의 중간간부인 박태현이다. 마쓰다의 시선을 받은 박태현이 말을 이었다.
“따라서 백남철을 치려면 김명천을 만나는 장소나 아니면 이동 중일 때가 적당합니다.”
“그런데 이놈들의 회동장소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단 말이야. 놈들의 통화가 아직 잡히지 않고 있어.”
마쓰다가 힐끗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방 안에는 마쓰다와 박태현, 그리고 두 사내가 소파에 마주보며 앉아 있었는데 대화는 주로 마쓰다와 박태현이 했다. 그 때 마쓰다가 머리를 돌려 사내 하나를 보았다. 단정한 양복차림에 실내인데도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사내였다.
“가또, 백남철은 김명천과 회동 하고나면 바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회동이 끝났을 때나 회동중에 친다면 대번에 우리가 한 짓이라는 것이 들어나게 된다.”
길게 숨을 뱉은 마쓰다가 말을 이었다.
“따라서 기회는 백남철이 김명천을 만나기전 뿐이다. 그래야 김명천이 백남철을 쳤다는 혐의가 돌아갈테니까.”
“그렇다면 숙소 근처에 매복하고 있다가 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30대쯤의 미남이었는데 상사원의 분위기여서 살벌한 대화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또는 야마구치조의 회장 오오무라가 아끼는 암살자로 지금까지 13번의 임무를 모두 성공했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가또의 억양없는 말이 이어졌다.
“부회장, 서둘러야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위성통신의 전화 도청만 기다리고 있다가는 기회를 놓칠겁니다.”
“그렇다면.”
가또의 말에 자극을 받은 마쓰다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요시, 숙소 근처에서 저격을 하기로 하자. 박태현.”
마쓰다가 부르자 긴장한 박태현이 몸을 굳혔다.
“예, 마쓰다씨.”
“네가 가또를 안내해라.”
“예, 마쓰다씨.”
“가또.”
머리를 돌린 마쓰다가 가또를 불렀다.
“예. 마쓰다씨.”
“네 이번 일은 시베리아의 역사를 바꿔놓게 될 것이야. 부탁한다.”
그러자 가또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누가 백남철을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를테니 나에겐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마쓰다씨.”
“흥, 그런가?”
입술을 비틀고 웃은 마쓰다가 금방 정색하더니 머리를 숙였다.
“가또, 부탁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쓰다씨.”
답례를 한 가또가 그림자처럼 앉아있던 사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맡았던 일중에서 가장 큰일이군요.”
가또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둘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주고 받았는데 분위기에 이끌린 김명천이 빙긋 웃었다.
“그래 줄래?”
그날 밤 침대에서 김명천이 머리를 돌려 옆에 누운 민경아를 보았다. 민경아는 반듯이 누워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콧등에 가는 땀방울이 맺혀졌고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었다. 섹스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한랜드의 기반을 굳히는 것으로 만족해. 그것이 나에게는 현실적이야.”
김명천이 몸을 돌려 민경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몸을 늘어뜨린 민경아의 알몸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내가 한랜드의 통치자나 후계자가 될 꿈을 꾸고 있다면 지금처럼 몸을 던져서 일을 못하지. 목숨을 잃으면 그 꿈이 물거품처럼 꺼질테니까.”
“바보같이.”
민경아가 천정을 향한채 입술만 달삭이고 말했다.
“그랬다가 무슨일이 나면 누구 좋은 일을 시켜주려고 해?”
“그런건 상관없어.”
202
오후 5시가 되었을 때 백남철은 2층 숙소에서 아랫층 응접실로 내려왔다. 백남철은 50대 초반으로 마른 체격에 키가 컸다. 얼굴빛은 야전군 생활을 오래한 때문에 검게 탔지만 눈은 맑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은 백남철에게 안국철이 다가와 섰다. 안국철은 긴장으로 굳어진 모습이었다.
“부부장 동지, 30분쯤 후에 출발하시면 되겠습니다.”
“요란하게 움직일 것 없다. 두어명만 같이 가면 돼.”
백남철이 말하자 질색을 한 안국철이 한 걸음 다가와 섰다.
“부부장 동지, 그건 안됩니다. 제가 모은 정보에 의하면.”
“일본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나?”
말을 자른 백남철이 묻자 안국철은 침을 삼켰다.
“예. 거기에다 일류신의 잔당이 북남을 가리지 않고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서둘러야 돼.”
정색한 백남철이 말을 이었다.
“오늘 김명천과 만나 합의를 하면 한랜드는 북남이 공존하는 한민족의 새 영토가 될 것이다. 일본 조직의 배후에는 일본 정부가 있어.”
눈만 껌벅이는 안국철을 향해 백남철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야마구치조에게 이번일은 일본정부의 신뢰를 획득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겠지. 놈들의 첫번째 목표는 김명천을 제거하거나 매수해서 한랜드에 강력한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고 결국은 야마구치조의 조종을 받는 친일파가 한랜드를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이야.”
“예, 부부장 동지.”
“한랜드는 우리에게도 희망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백남철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을때 응접실로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부부장 동지, 아무르교역에서 손님이 오셨는데요.”
그러자 의외라는 듯이 안국철이 머리를 기울였다. 아무르교역은 김명천이 간판으로 내건 회사인 것이다. 백남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곧 사내가 다른 사내 하나를 데리고 다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예의 바르게 한국식으로 절을 한 사내는 김명천의 심복인 신해봉이다.
“어서 오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백남철이 정중하게 신해봉과 악수를 나누고는 자리를 권했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신해봉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의 약속 때문에 제가 찾아 온 것입니다.”
“무슨일입니까?”
백남철이 묻자 신해봉이 얼굴을 굳히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야마구치조에 심어놓은 저희 정보원의 정보를 듣고 저희 사장께서 저를 급히 보내셨습니다.”
신해봉이 백남철을 똑바로 보았다.
“부회장 마쓰다는 암살자 두 명을 불러 들였는데 오늘밤 부부장님을 저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허어.”
백남철이 쓴웃음을 지었을때 신해봉의 말이 이어졌다.
“암살자는 이곳 숙소 근처의 요소에서 부부장님이 외출하실 때를 기다렸다가 저격할 것입니다.”
그 순간 안국철이 거칠게 혀를 찼다.
“말도 안되는 소리. 놈들은 이곳을 알리가 없고 저격할 만한 위치는 우리가 모두 제압해 놓았소. 우리 기를 죽이려는 헛소문이요.”
지난 번 사건도 있었으니 안국철은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렇습니까?”
신해봉이 정색하고 안국철에게 묻더니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고는 탁자위에 펼쳤다.
그 순간 안국철은 물론이고 백남철도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것은 지도였던 것이다. 이곳 숙소가 위치한 지도였고 군데군데 표시를 해놓은 곳은 경계병의 위치였다.
“이건 우리 정보원이 야마구치조 내부에서 복사해 온 것입니다.”
손끝으로 지도를 짚은 신해봉이 안국철을 보았다.
“경비병들 위치가 맞습니까?”
안국철은 시선을 지도로 내린채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신해봉이 묻기도 전에 이미 표시된 위치를 보고 그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백남철이 대답을 하라는 듯이 가볍게 헛기침 소리를 내었으므로 안국철은 시선을 들었다. 굳어진 표정이었다.
“맞습니다.”
메마른 목소리로 안국철이 대답했을 때 신해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저격자들이 지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해봉의 시선이 백남철에게로 옮겨졌다.
“저희 사장님께서는 저에게 부부장님의 제의를 듣고 오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제가 사장님 대리로 온 것이지요.”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백남철이 소파에 등을 붙이더니 멋적게 웃었다.
“내가 김사장한테 빚을 졌군. 밖으로 나갔다면 머리에 총을 맞을 뻔 했어.”
백남철의 시선이 안국철에게로 옮겨졌다.
“저격당해 죽은 것만큼 싱겁고 허무한 죽음이 없지. 군인의 죽음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부부장 동지.”
헛기침을 한 안국철이 부동자세로 섰다.
“제가 경비병 위치를 직접 확인 하겠습니다.”
“미끼를 내걸고 잡아 보도록.”
던지듯이 말한 백남철이 정색을 하고는 앞에 앉은 신해봉을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협상을 하도록 하지.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더라?”
“예, 저는 신해봉이라고 합니다.”
조금 당황한 신해봉이 손바닥으로 뒷통수를 만졌다.
“사장님 보좌관입니다.”
그 시간에 마쓰다는 숙소의 식당에서 굴요리를 먹고 있었는데 이미 앞에는 굴껍질이 수북하게 쌓여졌다.
“굴 소스는 약할수록 좋아.”
굴을 입에 넣으면서 마쓰다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하면 굴맛이 달아나거든.”
“그렇지요.”
앞쪽에 앉은 로니전자의 하바로프스크 지사장 오가와가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는 오전에 불려와 지금까지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오늘밤 작전이 끝나야 돌아갈 것이었다. 작전 결과를 본국에 보고 하는 것은 오가와의 책임인 것이다.
“오가와씨, 하나 더 먹어봐.”
마쓰다가 권했으므로 오가와가 굴을 하나 집어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그는 지금까지 굴을 여섯 개 먹었을 뿐이다.
“부회장님. 저는 식욕이 없어서.”
“글쎄, 굴이 식욕을 촉진시킨 데도 그러네.”
“알겠습니다.”
다시 굴을 집어든 오가와가 마악 소스를 바르려고 할때 식당 문이 열리더니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부회장님, 연락이 왔습니다.”
“누구한테서 말이냐?”
마쓰다가 벽시계를 보면서 물었다. 오후 6시반이다.
203
“예, 로스토프씨 한테서.”
사내가 말하자 마쓰다는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
사내한테서 전화기를 받아쥔 마쓰다가 먼저 헛기침부터 했다.
“로스토프씨, 나 마쓰다야.”
“마쓰다 선생, 저는 통역 로젠입니다.”
서툰 일본말이 수화구에서 울렸으므로 마쓰다는 머리를 끄덕였다.
“로젠, 로스토프씨가 옆에 있나?”
“예. 지금 듣고 계십니다.”
“용건은?”
“일성 회장이 오늘밤에 한랜드에서 하바로프스크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목소리를 낮춘 로젠이 말을 이었다.
“로스토프씨는 오늘밤 일성 회장을 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일성 회장을.”
잇사이로 말한 마쓰다가 앞쪽에 앉은 오가와를 노려보았다.
이제 마쓰다는 식욕을 잃은 듯 멀쩡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오늘밤에 말인가?”
다시 낮게 마쓰다가 묻자 로젠의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렸다.
“일성 회장의 숙소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자꾸 숙소를 바꾸기 때문에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가?”
“로스토프씨는 이미 특공대 3개조를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당신들이 협조를 하지 않아도 단독으로 처리하겠다고 하십니다.”
로스토프는 죽은 일류신 추종자중의 핵심인물이었는데 이번에 마쓰다가 포섭해 놓은 것이다. 한동안 몸을 굳히고 있던 마쓰다가 길게 숨을 뱉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요시, 나도 3개조를 내지. 당신들한테만 일을 맡길 수는 없지.”
일성 회장 안재성이 피살된다면 한랜드의 건설은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일성그룹의 지휘체제가 흔들리게 되면 한랜드를 포기해야 될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전화기를 부하에게 넘겨준 마쓰다가 식탁에서 일어섰다.
“모리를 불러라. 다까하시도.”
마쓰다가 소리치듯 말했다.
“비상이다!”
그 시간에 한랜드 상공을 비행하는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 안에서 일성 회장 안재성이 옆자리에 앉은 안세영에게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말했다.
“이번에 국회에서 한랜드법이 통과되면 반년쯤 후부터는 투자 이민이 쏟아져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 동안 한랜드 안에서도 정부 조직이 갖춰져야 한다.”
안재성의 얼굴은 생기에 차 있었다.
“한랜드에서 나호트카와 블라디보스토크선까지의 철도가 5개월쯤 후에는 완공될 테니 물자 수송에는 지장이 없어.”
안세영이 안재성의 밝은 표정에 동화된 듯 얼굴을 펴고 웃었다.
“아버지는 요즘 활력이 넘치시더군요. 이런 분위기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렇다.”
안재성이 웃음띈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요즘처럼 생기가 나는 때가 드물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업에 뛰어든거야.”
그리고는 안재성이 심호흡을 했다.
“내 필생의 사업이다. 세영아.”
“제가 도움을 많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버지.”
“아니야.”
안재성이 머리를 젓고는 손을 들어 안세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김사장만 잡으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해.”
204
비행기가 하바로프스크 북쪽의 군용 활주로에 착륙 했을 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활주로 끝에는 이미 4대의 벤츠가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어둠에 덮인 공항을 떠났다.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때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있던 오규학이 머리를 돌려 안재성을 보았다. 오규학은 고려인으로 김명천의 추천을 받아 안재성의 측근 경호원이 된 사내이다.
“회장님, 회의는 내일 아침 10시 정각에 국제호텔 1203호실에서 하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또 바뀌었군.”
쓴웃음을 지은 안재성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저쪽에서는 불평하지 않던가?”
“예. 상황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국제호텔에는 한국에서 날아온 여야 국회의원 7명이 투숙하고 있는 것이다. 안재성이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 이유는 그들과 한랜드법에 대하여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오규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 숙소는 벨리야 마을 윗쪽 골짜기의 별장으로 정했습니다.”
“좋아.”
머리를 끄덕였다. 안재성이 정색하고 오규학을 보았다.
“김사장하고는 연락이 되었나?”
“지금 별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군.”
안재성이 만족한 표정으로 시트에 등을 붙였다. 테러에 대한 대비책으로 오규학은 지금까지 회담장소를 세 번째 바꾼 셈이었고 숙소는 두 번째로 변경시킨 것이다.
아직도 일류신의 잔당뿐만이 아니라 야마구치조, 거기에다 러시아 군부의 불만세력도 무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차는 가로등도 없는 어둠속을 속력을 내어 달려가고 있었다. 안재성의 옆에 앉아 앞쪽만 바라보던 안세영은 아까부터 자신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별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김명천 때문이었다. 물론 김명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것이다. 그때 안재성이 머리를 돌려 안세영을 보았다.
“김사장의 숙소에 여자가 있다고 하더구나. 하바로프스크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말을 그친 안재성이 입맛을 다시더니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박실장 한테서 들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민경아라고.”
“둘이 좋아하는 사이같더군.”
“괜찮은 여자거든요.”
앞쪽을 본채 안세영이 낮게 말했다.
“납치범들에게 제 행세를 하고 대신 잡힐 만큼 강단도 있는 여자지요.”
그러자 안재성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남녀 관계는 운명이다. 운이 맞아야 결합이 된다.”
그때 앞좌석에 앉아있던 오규학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귀에 붙였다. 그리고는 서너번 대답만 하고나서 상반신을 돌려 안재성을 보았다. 긴장으로 굳어진 모습이었다.
“회장님, 숙소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놈들이 숙소를 기습한다는 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안재성의 시선을 받은 오규학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일류신 조직의 잔당들과 야마구치조가 연합해서 공격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오규학이 서둘러 덧붙였다.
“별장에 계시던 김사장님도 아무르 강가의 은신처로 출발 하셨습니다. 그럼 저희들도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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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를 올려다 본 마쓰다는 창가로 다가가 섰다. 밤 11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어둠에 덮인 정원은 조용했다.
“30분쯤 후면 벨리야 마을 윗 쪽의 산등성이에 도착할겁니다.”
마쓰다의 심중을 읽었는지 뒷쪽에 서 있던 부하가 낮게 말했다.
“로스토프 일행은 북쪽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우리팀보다 10분쯤 빨리 합류지점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가또는?”
앞쪽을 바라본 채 마쓰다가 묻자 다른 부하가 대답했다.
“아무르강 숙소 근처의 숲에서 지금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지루한 밤이군.”
마쓰다가 입맛을 다셨다.
“도무지 운치가 없는 밤이야. 그렇지 않나 오가와씨?”
“예,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소파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오가와가 놀란 듯 대답했다. 상황은 시시각각 절박해지고 있었지만 본부격인 이곳은 이제 기다리는 입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북한 보위부 부부장 백남철을 저격하러 보낸 가또 일행은 지금도 잠복 중이었고 일성회장의 숙소를 기습하라고 보낸 3개 특공조는 30분쯤 후에 로스토프 조직과 합류하고 작전을 시작할 것이었다. 창에서 몸을 돌린 마쓰다가 둥근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러자 모처럼 부처같이 편안한 인상이 되었다.
“오늘밤이군. 오가와씨.”
“뭐가 말씀이십니까?”
“2개의 작전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어. 북한의 백남철과 일성회장 안재성의 제거 작전이 말이야.”
“아아, 예.”
오가와가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마쓰다의 말에는 열기가 띄워졌다.
“그렇게 되면 일성그룹은 선장을 잃은 배가 되어서 표류하게 되겠지. 최악의 경우에 일성이 중심을 잡아 다시 한랜드를 경영하게 된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우리가 한랜드 내부에 단단한 기반을 굳히고 난 후가 될거야. 그리고.”
마쓰다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오가와를 보았다.
“북한 백남철이 제거되면 용의자는 당연히 일성그룹이 고용한 아무르교역의 김명천이 돼. 일성은 북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한랜드는 혼란상태가 되지.”
“만일 두 작전이 다 성공한다면.”
마침내 오가와도 거들었다.
“그 효과는 더 크겠습니다. 부회장님.”
“당연하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마쓰다가 다시 부처같은 모습으로 웃었을 때였다.
부하 하나가 방으로 들어섰다.
“부회장님, 가또씨하고 연락이 안됩니다.”
조심스럽게 말한 부하가 마쓰다의 눈치를 보았다.
“10분전부터 호출을 했지만 무전기도 핸드폰도 모두 불통입니다.”
“안내역 박태현이 있지 않나?”
“박태현도 연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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