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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여호와의 군대 대장/ 여호수아 5:13-15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fO9wpJBKlJQ&feature=youtu.be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듯이 요단강 물이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며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관문은 크고 견고한 여리고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를 점령해야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웠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그 말을 듣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난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웨슬리 형제의 기념비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첫째, “세계는 나의 교구다” 그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그가 가진 구령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특정한 사람에게만 매이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꼭 그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만한 축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서 천사나 사람의 모습으로 가끔 나타나셨습니다. 본문도 그런 내용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누구일까요?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이 보낸 천사라는 해석입니다. 또 하나는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해석입니다. 저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방편이 초자연적이었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현현’ 혹은 ‘신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 중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경우가 있고 사람의 모습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경우도 있습니다.
창세기 18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보니 사람 셋이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뒷부분을 읽어보면 세 사람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셨고 둘은 천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인줄 알고 정성을 다해서 이들을 섬기다가 나중에는 한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 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신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 떼를 치고 있던 모세에게 불꽃 가운데서 나타났습니다. 출애굽기 3:2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분명히 모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4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현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또는 사람의 모습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과는 달리 놀라운 두 가지 방법의 하나님의 나타남이 있었습니다. 성육신과 성령님의 내주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1:14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자기 계시이며 하나님의 신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 되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30세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33살의 나이에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짧은 기간 동안만 이 세상에 계셨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3위이신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같이 한 곳에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고, 그 소리가 그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임하신 성령님은 믿는 자들 속에 오셔서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16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도들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교포인 강동만집사님의 사냥개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강집사님은 사냥개 두 마리와 함께 사냥을 갔습니다. 그런데 사냥개가 짖어대는 소리에 달려가 보았더니, 집 채 만한 호랑이가 소나무위에 올라가 있고 그 밑에서 사냥개들이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총을 쏘아서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강집사님의 사냥개들은 사냥을 하면서 주인의 총 앞에 수많은 맹수들이 쓰러지는 것을 봤습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사냥개들의 머릿속에는 “내 뒤에는 주인이 있고, 주인의 총 앞에 쓰러지지 않는 맹수가 없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도 겁내지 않고 몰아붙였습니다. 호랑이는 당황했습니다. 모든 짐승이 자기만 보면 두려워 떠는데, 사냥개들이 얼마나 저돌적으로 덤벼드는지, 호랑이도 엉겁결에 도망을 치게 되었고, 다급해지자 소나무 위로 피했다가 강집사님의 총에 죽은 것입니다. 내 뒤에 주인이 있다는 사냥개의 믿음이 이런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호랑이를 몰아붙인 사냥개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내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사역기간동안 함께 하시며 모세를 도와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현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사역을 도와주셨습니다. 여리고를 점령하게 하셨고, 가나안을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나옵니다. 이 성호가 성경에 처음 나온 것은 사무엘상 1장입니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가 믿었던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였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던 내용이 사무엘상 1장에 나옵니다. 그때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나옵니다. 골리앗은 약 3m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청소년이었습니다.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담대하게 골리앗 앞에 섰고,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사무엘상 17:45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겼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국한된 종족신이나 지역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이십니다. 또 ‘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은 많은 군대를 거느리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용사이신 하나님, 대장이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도우셨으며 저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구약성경은 용사이신 하나님, 대장이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전쟁의 기록입니다. 구약 성경에 많은 전쟁이 나옵니다. 그 전쟁 중에는 하나님이 싸우신 전쟁이 있고 하나님이 빠지신 전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신 전쟁은 이스라엘이 승리하였고, 하나님이 빠지신 전쟁은 적들이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신 전쟁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4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홍해 바다 앞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철병거를 몰고 추격하지요. 앞에는 홍해 바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를 건널 능력이 없지요.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라.”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니 동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홍해가 갈라지고 땅이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현대사에도 이런 신기한 전쟁이 있습니다. 세계1차 대전 때인 1917년 12월 9일의 일이였습니다. 1,000년 동안 터키가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 땅을 영국군이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공격태세를 다 갖춘 알렌비 장군이 영국국왕 죠지 5세에게 보고했더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므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니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못하고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터키군은 영국군이 공격해 올 줄 알았는데 공격을 안 하니, 불길한 생각과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다 도망을 쳤습니다. 알렌비 대장은 찬양대를 앞세우고 총을 거꾸로 들게 하고 자신도 말에서 내려 도보로 조용히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알렌비 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신자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번처럼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하여 강하게 인식한 때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역사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이스라엘 가정의 저녁식사시간이었습니다. 군대 갔다 온 아들이 식탁에 앉더니 기도를 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아버지께서 물었습니다. “얘야! 너 전에는 기도하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된거냐?” 아들이 “네, 전에는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었죠.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요.”라고 하면서 네게브 전쟁에서 겪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게브에서 이스라엘군이 이집트와 전쟁하다가 한 20명만 남았습니다. 적군은 3개 대대 병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싸워서 이길 수 없었지만,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는데, 이집트 군 두 개 대대 병력이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한 개 대대 병력은 두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나중에 이집트 병사들은 이스라엘 병사가 20명밖에 없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있던 많은 사람들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이스라엘 병사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셔서 자기들을 지켜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입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작전을 세우면 이스라엘에서 그들의 작전을 눈치 채고 막아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아람 왕은 자기 부하 중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전을 세우면 그 작전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람 왕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알아보고 그를 잡으라”, “그가 도단성에 있습니다.” 아람 왕은 많은 군사를 보내서 밤에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다음 날 아침에 아람군대를 보고는 놀라서 엘리사에게 달려왔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가 보니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천사들이 엘리사를 둘러싸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인생은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의 적은 악한 마귀와 마귀를 따르는 귀신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읍시다.
3. 다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너의 편도 아니고 적들의 편도 아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싸움을 싸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신을 벗으라는 말은 두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는 죄악을 벗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은 인간 삶의 전체적 영역을 상징했습니다. 신에는 더러운 물질이나 먼지 등이 많이 묻기 마련이기 때문에 신은 더러움을 상징합니다. 신을 영적인 의미로 본다면 죄악에 오염된 온갖 더러운 행위와 성품입니다. 신을 신고 어디든지 갑니다. 신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묻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죄악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은 죄악을 벗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임재 앞에서 인간은 더러운 모습 그대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신을 벗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메시지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라.”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느냐 아니냐로 결정 됩니다. 다윗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은 싸움 실력이 대단했고, 놀라운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고, 기가 막힌 문학적 소양을 갖췄고,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정치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의 인생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행 13:36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다윗은 섬기는 인생을 살았는데 그 섬김이 자신의 사랑과 겸손 때문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섬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성공적인 인생인 것입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권세를 가졌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저는 워싱턴 대통령 이래 그 어떤 역대 대통령이 겪었던 어려움보다도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전임 대통령들이 항상 의지하였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결코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링컨은 주님의 통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 만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입니다. 곳곳에서 전투는 벌어지고, 양식은 부족하고, 전쟁은 길어졌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링컨에게 말했습니다. “각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편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링컨이 대답했습니다. “나의 관심은 지금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다만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를 묻고 있다네.” 링컨은 하나님의 통치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링컨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통치자가 되셔야 합니다.
발에서 신을 벗는 것은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메시지를 주는 사건 중에 하나가 룻기의 계대결혼에 나옵니다. 계대결혼은 이스라엘에 있는 특별한 문화입니다. 누군가가 자식이 없이 과부가 되었을 때에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죽은 남편의 대를 이어주는 풍습입니다.
룻기 4장에 보면, 보아스의 친척 중 보아스보다 우선적으로 룻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보아스가 죽은 엘리멜렉 가문과 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어도 우선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성문에서 장로들을 모아 놓고 그 친척에게 그의 권리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 친척은 처음에는 땅에 대한 권리만 생각하여 자신이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으니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권리를 이양한다는 의미로 자기 신을 벗었습니다. 신을 벗는 것은 이렇게 자기 주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의 인생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신을 벗은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작전권, 지휘권, 명령권, 군통수권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 지휘권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소서. 저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개인의 영성의 깊이는 능력이나 축복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굴복할 수 있는 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영성가 잔느 귀용은 극한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 굴복 시켰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잔느 귀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 나아갈 때는 연약한 아이처럼 나아가라. 온통 때가 묻고 상처투성이인 아이, 연거푸 넘어져서 다친 아이처럼 나아가라. 혼자서는 전혀 무기력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라. 스스로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라. 흐르는 눈물로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라.” 우리는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때 묻고 상처투성이인 어린아이처럼, 넘어져서 다쳐 우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꿈꿉니다. 진정한 부흥은 수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영국 웨일즈에서는 1904년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 부흥의 주인공은 이반 로버츠였습니다. 그는 당시에 가난한 신학생으로 작은 기도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기도모임에서 그는 주님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엎드리자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그에게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거꾸러져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 이 기도가 훗날 영국교회 부흥운동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 앞에서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엄위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으리라는 강력한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후로 그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 지금 굴복시키소서. 지금 굴복하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부터 영국교회 부흥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굴복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웨일즈 부흥 운동의 현장을 방문하여 목격한 하워드 존스톤박사가 1906년 9월 우리나라를 찾아와 선교사들에게 웨일즈 부흥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10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에반 로버츠를 이야기하였고, 그와 같이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을 사람은 손 들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손을 든 사람이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길선주 장로였고, 그가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에반 로버츠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시작하자 평양에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집회가 거의 끝날 무렵에 길선주 장로님이 앞으로 나오더니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친구가 유언하며 맡긴 돈 200원 중에서 100원을 가로챘습니다.” 장로가 그것도 1,500명이나 되는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이는 이런 회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길선주 장로님의 회개를 들은 성도들이 저마다 자기가 숨겨 놓은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피난을 가다가 자기 아이를 강에 빠뜨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 온 죄를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통한 죄를 자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 간음, 미움, 질투 등 온갖 더러운 죄를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성도들이 두려워서 교회에서 뛰쳐나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도망을 치다가 강력한 힘에 이끌려 도로 교회로 돌아와서는 뒹굴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죄를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가 예배당에 있던 모든 성도에게 임하였습니다. 저녁에 시작된 집회가 다음날 새벽이 되어도 끝나지를 않았습니다. 울부짖는 소리, 통곡의 소리가 장대현교회를 뒤덮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쌀가게 주인은 됫박을 속여서 판 것을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글을 가게 앞에 써서 붙이고 배상해 주었습니다. 고의로 빚을 떼먹은 사람은 채주를 찾아가서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술집 앞에는 “금일부로 이 술집을 폐업함. 어젯밤 주인이 회개함”이라는 광고가 붙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성령 충만을 받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자기의 주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부흥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 천국을 누리는 삶입니다.
오늘 설교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난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1.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2.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3. 다스리시는 하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