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Helena)는 250년경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의 드레파눔(Drepanum)에서 태어났다. 성 암브로시오(Ambrosius)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여관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270년경에 나중에 황제가 된 로마의 장군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ius I)를 만나 현격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다. 그들은 280년경 나이수스(Naissus)에서 외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이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1세는 289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성녀 헬레나와 이혼하고, 그리스도교 박해자 중 한 명인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여 292년에 황제 휘하의 카이사르(Caesar)가 되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성녀 헬레나는 당시 박해를 받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306년 콘스탄티우스 1세가 오늘날 영국의 요크(York)에서 사망하자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황궁이 있는 독일의 트리어(Trier)로 모셔와 그녀를 ‘아우구스타’(Augusta), 즉 황후라 부르도록 하고 그녀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였다. 312년 10월 12일 ‘밀비오(Milvio)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로 입성하였다. 그리고 60세가 넘은 어머니 헬레나를 설득해 세례를 받도록 했다. 성녀 헬레나는 개종한 순간부터 신앙생활에 전념했고,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밀라노(Milano) 칙령’을 반포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투옥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를 석방하며 빼앗은 교회 재산을 반환하였다.
326년 총애하던 맏손자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번째 부인을 잃는 가족의 비극을 겪은 후 성녀 헬레나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티나로 순례를 떠났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그녀는 ‘왕 중의 왕’이신 하느님께 충성과 신앙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녀는 막대한 후원금을 내놓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선행에 헌신하며, 그리스도교의 일을 돕는데 적극적이었다. 특히 구세주의 발자취에 대한 경배를 표하기 위해 아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 성지 곳곳에 수많은 성당을 세웠다. 대표적으로 베들레헴의 ‘주님 탄생 기념 성당’과 올리브 산의 ‘주님의 기도 성당’을 짓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에 ‘주님 무덤 성당’(성묘 성당, Sacrum Sepulchrum)을 건립했다.
루피노(T. Rufinus, 345-410년)가 전해주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주님 무덤 성당을 지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십자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십자가가 발굴되자 성녀 헬레나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기 위해 한 젊은이의 시체를 모든 십자가 위에 올려놓게 했는데, 그때 한 십자가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젊은이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를 발견한 성녀 헬레나는 이를 셋으로 나눠, 하나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보내고, 하나는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마카리오(Macarius, 3월 10일)에게 주고, 남은 부분은 로마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성녀 헬레나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교회 미술에서도 그녀는 보통 왕관을 쓰고 성당 모형이나 십자가와 못 등과 함께 등장한다. 성녀 헬레나는 330년 8월 18일 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즈미트(Izmit)인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선종한 후 로마의 라비카나 가도(Via Labicana)의 화려한 무덤에 안장되었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사도 교회의 황실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함께 5월 21일에 성녀 헬레나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