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아래 피어난 저녁
비가 오는 날이면 오래전 저녁들이 먼저 찾아온다.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한 줄씩 떨어지고, 마당은 어느새 잔잔한 연못이 되곤 했다. 기와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덮어 주었고, 열린 대문 밖으로는 흙냄새가 천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부엌 한쪽에서 저녁상을 준비했고, 할머니는 굵은 손마디로 완두콩을 까며 느릿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방 안에는 전깃불보다 먼저 등잔불이 켜졌다. 노랗고 작은 불꽃은 벽에 사람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고, 그 그림자는 마치 또 하나의 가족처럼 방 안을 함께 채웠다. 비 오는 날의 저녁은 언제나 따뜻한 불빛 하나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양푼에 토마토와 감자를 담아 씻으셨다. 물결을 따라 붉은 토마토가 둥실 떠다니고, 감자는 서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손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하루의 피곤을 함께 씻어 내리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옆에서 풋콩을 까며 “비 오는 날은 밥도 더 맛있다.” 하고 웃으셨다.
그 말의 뜻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비가 밥맛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밥맛을 바꾼다는 사실을 훗날에서야 깨달았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모두가 대문 앞에 모여 빗줄기를 바라보곤 했다. 마당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동그란 원을 그리고, 그 원은 하나가 되어 다시 사라졌다. 아이들은 비가 언제 그칠지 궁금했고, 어른들은 내일 논에 물이 충분히 들겠다고 안도했다.
같은 비를 바라보면서도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어둠이 조금 더 깊어지면 텔레비전이 켜졌다. 화면 속 만화영화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배를 깔고 엎드려 숨소리조차 죽인 채 바라보았다. 선풍기가 천천히 돌아가고, 할머니는 부채를 흔들어 손주들의 등을 쓸어 주셨다. 부채 바람은 시원함보다 사랑을 먼저 전해 주었다.
지금은 집집마다 에어컨이 있고, 손안의 휴대전화 하나로 세상 모든 영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시절처럼 한 화면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웃던 풍경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편리함은 많아졌지만 함께 웃는 시간은 조금씩 줄어든 것은 아닐까.
비가 오는 날이면 가족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집 안으로 더 가까이 모여들었다. 창밖의 빗소리는 대화를 재촉하지 않았고, 침묵조차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누구도 서둘러 말을 잇지 않아도 되는 저녁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가난 속에는 이상하리만큼 넉넉한 시간이 있었다. 기다릴 줄 알았고, 함께 앉아 있을 줄 알았으며, 한 그릇의 밥으로도 마음을 나눌 줄 알았다.
행복은 풍족함보다 둘러앉음에 가까웠다. 세월은 그 마당도, 그 등잔도, 그 낡은 텔레비전도 하나둘 기억 속으로 데려갔다. 할머니의 부채질도, 어머니의 손끝에서 흘러내리던 물방울도 이제는 다시 만질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신기하게도 그 저녁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기와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등불 하나가 다시 켜진다. 양푼에 담긴 토마토가 물결 따라 흔들리고, 할머니는 여전히 완두콩을 까며 미소를 짓고 계신다. 아이들은 만화영화가 끝날까 봐 눈을 반짝이고, 어머니는 말없이 저녁상을 차린다.
기억은 시간을 붙잡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은 오래된 저녁 하나를 평생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창문을 조금 열어 둔다. 혹시라도 그날의 흙냄새가 다시 찾아오고, 오래된 등불 하나가 조용히 내 마음속 저녁을 밝혀 줄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