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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지난 주간은 피정 강의와 치유 기도가 대신 나갔었죠.
그래서 아마 요셉 이야기 1편 거의 잊어버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요셉의 이야기 2편 들으시기 전에, 아니면 듣고 난 다음에라도 1편을 다시 들어보시면 연결이 잘되리라 생각합니다.
요셉 이야기 첫 번째의 내용은 그거였죠.
야곱의 아들들.
물론 야곱의 막내 베냐민은 요셉과 같은 엄마에게 나온 동생이지만, 한참 뒤에 태어납니다.
요셉 입장에서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도 있었지만, 자꾸 형들을 고자질했습니다.
그래서 미움을 사서 구덩이 속에 파묻혔다가 지나가는 상인에게 팔려서
파라오의 경호 대장 보디발(성경, 포티파르)의 집에 종으로 들어갑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뭔가 좀 다르다’라는 것을 느꼈다고 그랬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왜 내가 이렇게 형들에게 미움을 사게 됐던가?’ 하는
자기 삶을 뒤돌아보는 것이 계기가 됐었죠.
그래서 하느님을 다시 만나고 회개하면서 아주 건실한 집사로 보디발 집에서 커 나갔습니다.
팔려 올 때가 17살이었고 한 10년 동안을 살았었죠.
보디발은 모든 것을 전부 요셉에게 맡겼다고 얘기를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감도장까지도 맡길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곤란한 일은 ‘요셉이 너무나 잘생겼다’라는 얘기입니다.
용모가 단정하고 아주 인물이 좋은 그런 미남자였죠.
요셉은 이렇게 외모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좀 전에 얘기했듯이 주인이 믿을 수 있는 일꾼 중의 일꾼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젊었죠.
17세에 팔려 와 10년 동안 그 집에서 일하고 있었어도 27살이죠.
이 젊고, 미남이고, 성실한 요셉과 음란한 사랑을 하고 싶어 유혹한 것은 다름 아닌 보디발 아내였습니다.
대개가 그렇듯 그 당시에 파라오가 살고 있는 궁전에는 소위 내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짐작하건대 보디발도 다 갖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내시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이쁜 아내를 얻었지만, 아내에게 성적 만족을 줄 재간이 없었을 겁니다.
또 이 보디발 아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었지만, 남편이 해줄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채울 수가 없었기에
늘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생각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년 전에 팔려 왔을 때 꼬맹이였던 요셉이 10년이 지나면서 정말 광채가 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로 성장하니,
성적 욕망에 굶주려 있던 보디발 아내는 요셉을 보면서 음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보디발의 아내도 분명히 미녀였을 겁니다.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훨씬 연하의 요셉을 유혹했을 겁니다.
성경에는 ‘나와 동침하자’ 이렇게 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읽으면서 비록 그녀의 모습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향기 없는 신선하지 못한 메마르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남성은 여자에게 유혹받으면 어떻게 처신합니까?
유부녀에게 요셉은 유혹받은 겁니다.
우스갯소리로 남자들이 그런 얘기를 하죠.
‘열 여자 마다할 남자 있느냐?’
준 밥상을 물릴 사람이 있느냐 이 얘기입니다.
즉 보디발 아내가 그토록 유혹하는데 거기에 안 넘어갈 남자가 있겠느냐는 뜻이겠죠.
이런 식의 말은 남자에게 유리한 말입니다.
이런 일이 남자의 수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겠죠.
어느 여자든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면 남자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대부분은 넘어간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주인마님으로부터 ‘동침하자’라는 말을 들은 것을 정말 큰 수치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단호하고,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부인, 주인어른은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시고 다 내 손에 위임하셨습니다.
주인어른을 제외하고는 이 집에서 내가 최고의 지위에 현재 올라와 있습니다.
주인어른은 부인 외에는 아무것도 내게 금지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렇지만 마님 당신은 주인어른의 부인이십니다.
어찌 내가 당신과 동침해서 하느님 앞에 대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릴 필요조차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확실하게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성적 유혹에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거절할 수 있는 남자들은 적을 겁니다.
만일에 설령 거부한다 해도 ‘나도 싫지 않습니다만’ 하면서 상대방의 비유를 맞추고 환심 사려하는 것이
아마 대부분 남자의 심리가 아닐지 생각됩니다.
또한 이렇게 분명하게 거절당하면 대부분 여성은 뒤로 물러설 겁니다.
그렇지만 보디발 아내는 수치를 모르는 여성이었죠.
그래서 성경에는 그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피했지만, 그녀는 요셉과 단둘이 있기를 늘 노리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모든 살림을 맡고 있는 집안의 집사였기 때문에 집안일을 해야만 됐죠.
또 집안일 때문에 마님을 만나야 할 때도 많이 있었을 겁니다.
그날도 집안에 들어가서 일하려고 할 때 집안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디발 부인만 있었던 거죠.
그 여인은 집안에 아무도 없는 오늘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요셉에게 다가와서 그의 옷을 잡습니다.
그러면서 나와 동침하자, 다시 또 요염한 눈으로 요셉을 유혹합니다.
인기척 없는 집 안에서 주인의 처에게 옷자락을 꽉 붙들린 요셉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매일 보디발 아내에게 요셉은 유혹받았지만, 그때마다 딱 잘라 거절해 왔습니다.
요셉의 의지가 견고한 것을 여인은 십분 알고 있었죠.
‘어지간하면 나한테 넘어올 텐데, 참 이놈 대단하다.’
젊은 놈이 그럼에도 부끄러움 없이, 이 여인은 요셉을 유혹하려고 옷자락에 매달렸던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요셉은 여자의 집념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도망치는 것밖에는 그녀의 유혹을 물리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자 그녀는 난폭한 태도로 변합니다.
앙갚음하려는 거였죠.
증거로 도망친 요셉의 옷을 움켜쥐고, 그녀는 즉시 소리쳐서 집안사람들을 모읍니다.
‘집안에 아무도 없어. 요셉이 나를 희롱해서 강간하려 했어. 그리고 의복을 버리고 도망쳤어.’
요셉의 옷을 증거물로 남편 보디발에게도 호소합니다.
남편은 대노하여 곧 요셉을 잡아 옥에 가둡니다.
주인 보디발은 요셉에게서 어떤 변명도 듣지 않고 그냥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주인으로서 아내 이외의 모든 것을 맡길 만큼 요셉을 신뢰하고 있었던 거였죠.
그 요셉의 옷을 손에 쥔 아내가 입술을 벌벌 떨면서 하소연하니,
보디발은 요셉이 정말 자기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고 믿고 노발대발하였던 겁니다.
무한히 신뢰하고 있던 사람에게 배반당하는 것보다 사실 더 큰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신뢰하지 않은 인간의 배반은 우리를 그렇게까지 격하게 노하게 하질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믿었던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그 분노는 산을 태우고도 남을 겁니다.
저는 이 대목에 보디발의 이러한 처사를 보면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그 인간 속에서
우리들이 저지르기 쉬운 약점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알다시피 보디발은 타국에서 팔려 온 노예 요셉을 집에 거두면서,
나중에는 그 집안 전체를 살림할 수 있는 집사, 가정 총무로 임명할 만큼 공평한 남자였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능력 있는 노예를 인정했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예에게 자기 재산 관리를 위임하는 일은 대단한 신용이 아니면 불가능했겠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토지나 가옥, 가재 이런 것들을 남에게 일임할 수 있겠습니까?
보디발의 요셉에 대한 신뢰는 집과 토지의 권리 문서, 예금통장 인감까지도 맡기는 그런 식의 신용, 믿음이었던 겁니다.
요셉을 이렇게 철저하게 믿었던 신뢰도 아내의 말 한마디와 요셉의 벗어버린 의복으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갖는 신뢰는 인감을 맡길 만큼 크다 해도,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깨질 때가 있는 겁니다.
우리들이 타인에게 오해받는 처지에 서게 될 때, ‘그 사람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사람들은 여간해서 변명해 주지 않습니다.
‘에이, 설마’ 하고 일단 생각하다가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게 되면, 증거 쪽을 사람들은 신용합니다.
맞죠? 그래서 인심이라고 하는 것은 참 믿기 어려운 겁니다.
요셉을 옥에 가둔 보디발은 아내의 말에 흥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보디발의 한계였고, 아마 우리들의 한계가 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누구를 믿었다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불러서 그것이 사실인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확인해 보기보다는, 나를 속였다는 그런 말,
주변 사람들의 이간질하는 말 때문에 내가 믿었던 사람을 죽은 사람 취급하고 또 분노를 가질 수도 있겠죠.
나중에 그 사람에 대한 그런 것이 아무 근거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참으로 미안해하고
또 내가 경솔했다는 자책감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요셉이 옥에 갇히고 난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기로 하고요.
요셉이 그 성적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느냐 하는 것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얘기죠.
성적 유혹은 분명히 극복하기 힘들고 어려운 유혹이지만, 그 유혹을 따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 속에 자기 자신을 방치하기 때문에 죄지을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우둔한 죄인에게도 마지막 결정은 여전히 본인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인간은 약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약함 속에 자신을 그냥 팽개쳐 두기 때문에 죄에 떨어지는 것이라는 얘기죠.
요셉은 보디발 아내로부터 정말 극복하기 어려운 성적 유혹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요셉이 성적 유혹을 극복하는 것을 정리해 드리면,
첫 번째가 유혹할 때 요셉은 단호하게 ‘싫습니다’라고 자기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무기가 ‘싫습니다’입니다.
겨우 네 음절에 불과하지만, 성적 유혹을 물리치는데 가장 단호한 무기입니다.
유혹이라든지 악 앞에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어중간하게 행동해선 안 됩니다.
어느 의사도 알코올 중독자에게 끊으라고 하지 저녁에만 조금 마셔도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느 판사도 상습 절도범에게 평일에는 좀 참고 주말에만 도둑질해도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적 유혹도 마찬가지죠.
성적 유혹은 적당하게 응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디발 아내가 이상한 눈빛으로 유혹할 때 요셉은 딱 네 단어로 거절합니다.
‘싫습니다.’ 확실하게 의사 표현합니다.
의사 표현하지 않고 어중간할 때는 상대편이 동의하는 것으로 전해지기도 쉽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이 ‘싫습니다’라는 첫 번째 무기에도 그 여인은 꿈쩍하지 않고 다시 유혹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요셉이 쓴 성적 유혹을 물리치는 두 번째 무기는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인 범죄를 짓지 않으려면 그러한 범죄를 하는 대상을 분명히 멀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불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탈 확률이 높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불에 델 확률은 낮아집니다.
음란 잡지나 음란 영화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견딜 수 있나 보자’ 이렇게 시험하는 것은 아주 바보 같은 짓이죠.
관계해서는 안 될 사람이 가슴 울렁거리게 만들고 흥분하게 만든다면, 일찌감치 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나를 유혹하는 상대를 가능한 멀리하는 겁니다.
유혹받지 않게 기도한다고 하면서 유혹의 기회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마치 뭐 같겠습니까?
손을 불 속에 집어넣고 데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지을 기회를 미리 피할 수 있는데도 머무적거리다가 죄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윗 아시죠?
다윗은 유혹의 손길 앞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혹을 향해 다가갔죠.
사무엘 2서 11장 2절에서 3절에 나옵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성적 자극을 준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그대로 따라, 사람을 보내 그 여자가 누군지 확인합니다.
여자가 부하 우리야의 아내라는 보고를 받고도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억제하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그 부하를 최전방에 내보내어 죽이게 합니다.
이렇게 성적 유혹은 살인죄까지 이르게 되죠.
그리고 그 여인을 불러들여 간음하고 생긴 자식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세상에 나오는 과정도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에,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하지만
솔로몬 시대에 가장 성전이 우상숭배로 들끓었던 겁니다.
다윗은 그 성적 유혹이 왔을 때 고개를 돌리고 ‘내가 못 볼 것 봤다’ 하면서 단호하게 멀어졌어야만 했습니다.
죄의 유혹은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 호기심을 채우려는 욕망을 갖게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지금 묵상하고 있는 요셉은 다윗과는 달랐죠.
그는 매일 다가오는 그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멀리 있고자 애썼습니다.
성서 본문은 어떤 얘기가 나옵니까?
39장 10절 ‘그녀와 함께 있는 것조차도 피했다.’ 이렇게 전해집니다.
집안 살림을 해야 하기에 안방마님과 자주 만나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가능한 한 멀리 피하면서 다른 사람을 들여보냈던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새가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우리 잘못이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성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성욕이 우리 몸을 지배하게 해서 간음을 범하게 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셉이 썼던 세 번째 영적 무기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멀리하는 것으로도 이 여자가 얼마나 집요한지,
얼마나 성적 흥분에 사로잡혀 있는 여자인지 멀리 피하는 요셉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썼던 세 번째 무기는 ‘도망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른 유혹들은 저항해야 하지만, 성적 유혹은 저항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도망쳐야 합니다.
보디발 아내는 아무리 집요하게 요셉을 유혹해도 안 통하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유혹하죠.
침실로 가자고 하면서 요셉의 겉옷을 붙잡습니다.
이때 요셉은 겉옷을 내버려 둔 채 도망을 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 ‘여러분을 음행으로부터 도망치시오.’,
디모테오후서 2장 22절에 ‘그대는 젊음의 욕망으로부터 도망치시오.’라는 말씀이 있듯이,
요셉은 겉옷을 벗어버린 채 도망칩니다.
과연 성적 유혹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맞선다는 것이 가능할까?
성욕은 괴물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괴물과 맞서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쉽지 않죠.
섣불리 성욕과 마주 싸워 이기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성욕에 무릎을 꿇고 성욕의 노예가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이런 말이 나오죠.
이 기도는 아직 유혹이 가까이 오지 않았을 때 미리 드리는 기도입니다.
일단 유혹에 노출이 되면 더 이상 주님의 기도를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기도하기보다는 요셉처럼 도망쳐야 합니다.
우리의 겉옷을 유혹자의 손에 맡기고 도망을 쳐야 합니다.
그래야 순결의 옷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까닭은 뭐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려 하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유혹 앞에서 적당히 응수하고 노련하게 처리하는데, 우리는 풋내기처럼 등을 보이고 도망쳐야 하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2장 2절에 ‘여러분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십시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받은 유혹이 무엇이든, 성적 유혹이든 권력과 돈에 대한 유혹이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지금, 이 유혹을 따라가는 것은 내 삶의 양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이 유혹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당당하고 대범하게 유혹 앞에 큰소리를 쳐야 합니다.
지금 요셉이 알려주는 세 가지의 비책, 첫 번째는 ‘싫습니다’라고 분명히 의사 표현하는 것이고,
그래도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는 두 번째 뭐라고 그랬죠?
‘멀리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통하지 않을 때는 ‘유혹자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라는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영적인 비책이 실제 상황에서 효과를 거두려면 한 가지의 비책이 더 필요합니다.
이 네 번째의 무기가 없다면 앞의 세 가지도 사실은 다 무너져 내립니다.
그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그게 뭡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세 가지 비책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솔직히 이론적으로 방법을 몰라서 유혹에 빠지겠습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불순한 생각이나 거룩하지 못한 바람을 잠재웁니다.
그래서 인간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 시선으로 마음을 쓰게 해 유혹을 물리칠 수 있게 합니다.
테살로니카 전서 4장 3절 이하에 ‘하느님의 뜻이란 바로 여러분의 성화입니다.’라고 나옵니다.
요셉의 이야기 두 번째 시간은 잘생긴 요셉이 음란에 빠진 보디발 아내의 성적 유혹을 어떻게 대처해서 물리치는지 묵상했습니다.
또 옷을 벗겼기 때문에 보디발 아내는 소리소리 지르면서 보복하려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러죠.
‘저하인 놈이 나를 겁탈하려고 해서 내가 옷을 뺏었다.’
그래서 그토록 믿었던 보디발의 요셉에 대한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이냐?’라고 요셉에게 묻지도 않습니다.
보디발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분명히 있다고 아까 말씀드렸죠.
누군가에 대한 나쁜 험담이 돌 때 뭔가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같이 그 험담에 휩싸여서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접어버리는,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보디발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훈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다음 시간에 ‘옥에 갇힌 요셉의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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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