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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Ⅱ
- ▣판 메이헤런-위작 사기▣이카로스의 추락▣피카소-한국전쟁▣다빈치-두 벌의 모나리자▣마네-아스파라거스 다발▣메디치家 명품 컬렉션▣수련에 집착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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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612565621
① 고흐-가셰 박사의 초상, ② 에곤 실레, ③ 얀 판 에이크-수태고지, ④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⑤ 나폴레옹의 예술품 약탈, ⑥ 반 고흐-해바라기, ⑦ 카라바조-세례자 요한, ⑧ 장 프랑수아 밀레,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613501599
⑨ 판 메이헤런 -위작 사기, ⑩ 이카로스의 추락, ⑪ 피카소는 왜 '한국 전쟁'을 그렸나, ⑫다빈치-두 벌의 '모나리자',
⑭ 마네-아스파라거스 다발, ⑭ 메디치家의 명품 컬렉션 :르네상스를 화폭에, ⑮ 수련에 집착한 모네,
9. 판 메이헤런 - 히틀러 오른팔을 속인 '위작 영웅'
알코올·모르핀 중독 판 메이헤런, 나치에 동조·협력한 미술 사기꾼
전문가 자만심 등 허점 노려 사기..나치의 수괴 속여 민족영웅 행세
미술품 위조의 역사는 유구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조각을 땅에 묻었다가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물로 속여 파는 일이 횡행했고 당대 작품도 위조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판화가 알프레히트 뒤러(1471~1528)는 역사상 최초로 저작권 소송을 제기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위조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 A와 D로 독특한 서명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서명까지 위조한 판화가 나도는 판국이었다.
그럼에도 재판관은 모방작임을 밝히면 팔아도 괜찮다고 판결했다. 뒤러에게는 위조품이 나올 만큼 중요한 화가로 여겨지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뒤러는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미술품 위조범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30~1940년대에 네덜란드 출신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를 위조한 한 판 메이헤런(1889~1947)일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체포됐다.
위조가 발각된 것이 아니라 미술품을 나치 독일에 반출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재판 과정에서 나치에 넘긴 명작이 사실은 자기가 그린 것이라고 실토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나치에 대한 협력죄보다 위조죄 형량이 가벼웠던 것이다. 그는 가짜 페르메이르를 아돌프 히틀러의 오른팔 헤르만 괴링에게 팔았다.
대중은 판 메이헤런이 나치의 수괴를 통쾌하게 속였다며 열광했다. 변호사들은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 판 메이헤런이 자기를 무시한 전문가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위작을 그렸을 뿐 악한 의도는 없었다고 옹호했다. 판 메이헤런은 사기꾼에서 일약 민족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여기까지가 대중에게 알려진 신화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토머스 호빙은 다른 버전의 얘기를 들려준다. 그는 10년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을 지내고 미술품 감정가로 활약하며 많은 책도 저술했다.
호빙에 따르면 판 메이헤런은 이류 화가이고 위작 솜씨도 미술품 감정가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였다. 판 메이헤런의 성공 비결은 전문가의 자만심과 미술품 감정의 허점을 공략한 데 있었다. 전문가들은 판 메이헤런의 사기극에서 그가 바라는 역할을 알아서 해주었다.
Woman Taken In Adultery(간음한 여인), Han van Meegeren, c. 1943, Oil on canvas (?), 96 x 88 cm.
Instituut Collectie Nederland, Asmterdam, 보이만스 판 보이닝헌 미술관,(괴링이 속아 넘어간 그림)
판 메이헤런은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알코올·모르핀 중독자인 데다 사기와 속임수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으며 나치에 동조하고 협력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애국적인 영웅으로 둔갑했을까.
판 메이헤런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재주를 타고났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만한 창조적 에너지는 갖고 있지 못했다. 1914년 미술학교를 마친 후 아카데미풍 그림으로 그럭저럭 성공했으나 곧 밀려든 아방가르드 물결로 그의 화풍은 시대에 뒤진 것이 되었다.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그는 1930년대 극우 미술단체에 가입해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글을 썼다. 아방가르드 미술 탄압에 나선 나치를 지지하기도 했다.
타락한 판 메이헤런은 한 미술품 복원가와 손잡고 그림을 위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선택한 화가는 네덜란드의 프란스 할스(1581~1666)였다. 조악한 모작이었으나 할스 전문가로 자처하는 호프스테데 더 흐루트라는 수집가를 속일 수 있었다.
간이 커진 두 동업자는 다른 17세기 화가로 범위를 넓혔다. 돈이 굴러 들어왔다. 그러나 아브라함 브레디우스라는 전문가가 수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는 흐루트가 경매에 내놓은 할스 그림이 위작임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창피당한 흐루트는 조용히 그림을 거둬들였다. 위작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거론되지 않았다. 흐루트는 사기꾼을 찾기보다 자기의 멍청한 실수를 사람들이 잊어주기만 바랐다.
판 메이헤런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앞으로 더 신중하게 사기를 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동업자와 헤어진 뒤 다음 위작을 내놓을 때까지 4년 동안 잠복하며 준비했다.
이번에 고른 화가는 페르메이르였다. 페르메이르는 네덜란드의 황금기로 불리는 17세기 풍속화가로 두 세기 동안 잊혔다가 19세기 중반 재발견되었다. 20세기 들어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희소성이 있어 고가에 거래된다. 초기 그림과 원숙기 사이에 십여 년의 공백이 있는 것도 유리한 점이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공백기에 페르메이르가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3~
1610)의 화풍을 익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판 메이헤런이 만든 조잡한 할스가 가짜임을 밝혀낸 브레디우스는 한술 더 떠 카라바조풍의 초기 페르메이르 그림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장담했다. 실제로 그는 페르메이르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공적이 있었다.
브레디우스는 페르메이르의 종교화가 이것 하나뿐일 리 없다고 보고 조만간 다른 작품이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말미암아 브레디우스는 본의 아니게 판 메이헤런의 사기극을 거들게 되었다.
판 메이헤런은 페르메이르에 대한 연구서와 미술 관련 전문서를 독파했다. 네덜란드 미술사학자와 큐레이터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사했다. 그리고 1936년 꼬박 1년 만에 '엠마오 집에서의 저녁식사'를 완성했다.
The Supper at Emmaus, Han van Meegeren, 1936–1937,Old canvas, relined, 115 x 127 cm.
Museum Boiljmans Van Beuningen, Rotterdam
브레디우스가 페르메이르 진품이라고 처음 판정해준 그림. 브레디우스의 옹호 덕분에 판 메이헤른의 위조 행각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1654~1656년, 158.5x141.5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영국 에든버러
(브레디우스가 찾아낸 페르메이르의 그림. 페르메이르 작품 가운데 종교화로는 유일하다.)
브레디우스라면 반드시 페르메이르의 공백기를 메워줄 그림에 반색할 것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할스를 위조할 때와 달리 기존 작품을 본떠 그리는 방식은 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그림을 새로 그렸다. 대담한 짓이지만 한번 성공하면 비슷한 그림을 계속 그려 팔 수 있으므로 유리했다.
1937년 판 메이헤런은 이름난 변호사에게 부탁해 '엠마오 집에서의 저녁식사'를 브레디우스에게 감정받게 했다. 법률은 잘 알아도 미술은 몰랐던 변호사는 판 메이헤런이 둘러대는 그럴듯한 거짓말에 넘어가 그림을 싸들고 브레디우스를 찾아갔다.
브레디우스는 자기가 전부터 나타나리라 예언한 그림을 눈앞에서 보고 흥분했다. 한때 유능한 미술 전문가였으나 이제 그는 팔십 세가 넘은 고집 센 노인일 뿐이었다. 눈도 거의 안 보이는 상태였으나 자기의 감식안을 자신했다.
지금은 작품의 진위를 감별하는 과학적 수단이 많이 발달했으나 당시만 해도 전문가가 육안으로 보고 한두 가지 기초적인 시험만 통과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브레디우스는 권위 있는 미술 잡지 '벌링턴'에 기고했다. 새로 발견된 페르메이르의 걸작을 격찬하는 글이었다. 그는 이 보물이 국외로 유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주위의 예술 애호가들을 설득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예술 후원자 모임인 렘브란트협회가 그림을 사서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에 기증했다. 브레디우스도 기금을 보탰다.
판 메이헤런은 여덟 점의 페르메이르 위작을 제작했다.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이 두 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한 점을 사고 괴링도 한 점을 가져갔다. 이 탐욕스러운 나치 수괴는 그림값 대신 독일군이 네덜란드에서 빼앗아간 200점의 그림을 주었다.
지난해 여름 필자는 로테르담을 방문했다.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은 호기심 많은 관람객을 위해 '엠마오 집에서의 식사'도 전시하고 있다. 그림 앞에 서니 이걸 진품으로 믿은 전문가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이 엉성한 그림을 처음부터 의심한 비평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옹호자들은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독일로 빠져나가도 좋겠느냐는 애국 논리로 이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1940년 네덜란드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그림에 대한 한가한 논란은 중단되었다. 판 메이헤런은 남프랑스 코트다쥐르로 피난 가서 고급 저택을 구입하고 호화롭게 살았다.
판 메이헤런은 1945년 나치 협력죄로 체포되었다. 페르메이르 그림이라고 여겨진 '간음한 여인'을 괴링에게 팔았다는 죄목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자기가 그림을 위조했다고 자백했다. 중대 범죄인 나치 협력죄를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괴링을 속여 독일군 수중에 들어간 수많은 그림도 되찾아왔으니 자기는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언론이 판 메이헤런의 파렴치함을 보도하려는 순간 한발 앞서 미국의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적어 내보냈다. '헤르만 괴링을 속인 남자'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사기꾼은 나치에 저항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대중은 영화 같은 얘기에 열광했다. 다른 언론 매체도 대중의 입맛에 맞춰 잇따라 그를 우상화했다. 판 메이헤런의 위조죄는 희석되었고 나치에 협력한 그의 과거도 지워졌다.
판 메이헤런은 1년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악화로 풀려나 194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자신은 파산 상태로 죽었지만 부인은 남편이 돌려놓은 재산으로 아흔한 살까지 사치스럽게 살았다.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판 메이헤런 - 히틀러 오른팔을 속인 '위작 영웅' / 아시아 경제, 2019. 10. 16.
10. 숨은 그림 찾기: 이카로스의 추락
쟁기질하는 농부·고기잡는 어부의 무관심..허우적거리는 다리·흩어진 깃털로 짐작 가능
인간의 어릭석음·교만 그림에 곳곳에 교훈..'자유에 대한 인간의 열망' 또 다른 해석도
1912년 벨기에 왕립미술관은 런던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낡은 그림을 발견했다. 제작연도도, 서명도 없고 언급된 문헌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번 덧칠이 되어 보존 상태도 나빴다. 하지만 미술사학자들은 이것이 벨기에가 낳은 위대한 화가 대 브뢰헬의 작품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추락을 다루고 있다. 1세기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에는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 얘기가 나온다. 다이달로스는 건축가이자 발명가, 예술가였다. 그는 재주가 많은 만큼 질투심도 많았다. 조카이자 제자인 페르딕스가 뛰어난 발명을 하자 그를 성벽에서 밀어 죽여버렸다.
아테네에서 추방된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섬의 미노스 왕에게 봉사했다. 왕이 전쟁에 나간 사이 왕비는 황소와 정사를 벌여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에게 복잡한 미로가 얽힌 궁전을 만들게 하고 수치의 증거인 괴물을 그곳에 숨겼다.
영웅 테세우스가 이 괴물을 무찌르러 오자 다이달로스는 미궁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비밀을 누설한 데 분개한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 부자를 미궁에 가두었다. 다이달로스는 밀랍과 깃털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올라 도망쳤다. 떠나기 전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너무 높거나 너무 낮게 날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나는 데 적응이 되자 신이 났다. 아버지의 주의를 잊어버리고 점점 높이 날아올랐다. 태양에 다가가자 밀랍이 녹아내리고 깃털이 흩어졌다. 날개가 망가진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주를 저주하며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땅에 묻었다.
이 그림은 풍경화와 풍속화의 중간쯤 된다. 풍경화에서는 자연 묘사가 우선이므로 인물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해도 미미한 존재로 표현된다. 반면 풍속화에서는 인물의 행동이 중요하고 장소는 무대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림을 보면 우선 광활한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풍경화 같다. 전경으로 눈을 돌리면 쟁기질하는 농부가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언덕 기슭에는 양 떼와 목동이 있고, 오른쪽 물가에는 고기 잡는 어부가 있다. 어촌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 같다.
이카로스는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오른쪽 범선 아래 허우적거리는 두 다리가 있다. 깃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런데 농부와 어부는 사람이 물에 빠진 걸 알아채지 못한 건지 모르는 척하는지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양치기는 오히려 반대편 하늘을 바라본다. 화면에는 안 보이지만 그쪽에는 다이달로스가 날면서 아들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 등장인물들은 화가 마음대로 그려 넣은 게 아니고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얘기를 따랐다.
"물에다 낚싯대를 드리운 어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선 목동, 쟁기를 잡고 선 농부가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이 다이달로스 부자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 다이달로스 부자를 신들로 여겼을 터였다."
하지만 오비디우스의 인물들과 달리 이 그림의 인물들은 다이달로스 부자에게 흥미가 없다. 짐승들도 밭을 갈고, 풀을 뜯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브뢰헬은 풍속화나 종교화의 형식을 빌려 도덕적 교훈을 전달했다. 브뢰헬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란 반드시 어떤 이야기를 포함해야 하며, 그 이야기는 도덕적으로 결론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그림은 사방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 하늘에서 사람이 뚝 떨어졌어도 일을 계속하는 농부와 어부는
"사람이 죽어도 쟁기는 멈추지 않는다"라는 플랑드르 속담을 암시한다.
화면 왼쪽 귀퉁이에 있는 밀가루 부대와 칼이 꽂힌 돈주머니도 교훈을 품고 있다.
밀가루 부대는 "바위 위에 뿌린 씨는 자라지 못한다"라는 속담을, 칼이 꽂힌 돈주머니는 "칼과 돈은 현명한 손을 원한다"라는 속담을 뜻한다. 이 속담들은 이카로스의 추락이 상징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자만을 경계한다.
예술사회학자 프랑카스텔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이 그림에서 정치적 의미를 읽었다. 브뢰헬이 살던 시대는 혼란했다. 당시 그가 살던 플랑드르는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다. 가톨릭 종주국이었던 스페인과 달리 독일과 가깝고 상인 계층이 많았던 플랑드르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신교에 쏠렸다.
1567년 펠리페 2세는 신교도들을 누르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브뤼셀에 상륙한 스페인 군대는 신교도들을 마구 학살했다. 마흔 살의 브뢰헬도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가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종교의 자유가 금지된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소신을 밝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카로스의 추락', 1560년경(73.5x112㎝, 벨기에 왕립 미술관, 벨기에 브뤼셀)
'이카로스의 추락', 1560년경(73.5x112㎝, 벨기에 왕립 미술관, 벨기에 브뤼셀) Detail
프랑카스텔은 이 그림을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했다. '변신'에서 미노스 왕에게 감금당한 다이달로스는 외친다. "바다를 막고 항구를 봉쇄하여 나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늘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나는 저 하늘로 가리라! 미노스가 모든 것을 다스려도 하늘의 주인은 아니지 않는가!"
프랑카스텔이 해석한 대로 굴종을 강요당하고 신앙의 위기를 겪던 플랑드르 시민 브뢰헬은 다이달로스에게 감정을 이입했을지도 모른다.
화면은 시원스레 사선으로 분할된다. 왼쪽 언덕배기에서는 농부가 쟁기질을 한다. 오른쪽에는 바다가 펼쳐진다. 수평선에는 태양이 반나마 가라앉고 있다. 바다는 넘어가는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수평선 부근의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다. 뾰족한 바위산과 멀리 보이는 항구의 모습은 나폴리와 느낌이 유사하다.
브뢰헬은 젊은 시절 여행했던 나폴리의 모습을 잘 기억했다 이 그림에 써먹었다. 플랑드르적인 요소도 있다. 오비디우스는 배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브뢰헬은 멋진 배를 두 척이나 공들여 그려 넣었다. 꼼꼼하게 그린 범선은 플랑드르 조선업의 수준을 보여준다. 이 배의 선원들 역시 일에 열중하느라 지척에서 일어난 사고에는 무신경하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카로스의 추락을 주시하는 존재가 있다. 고기 잡는 어부 등 뒤에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고 자고새가 물을 향해 앉아 있다. 아테네 여신은 다이달로스가 성벽에서 밀어버린 조카 페르딕스를 한 마리 새로 변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 새를 페르딕스라 불렀다. 다이달로스가 아들의 주검을 땅에 묻고 있을 때 자고새가 밭 가에 내려앉아 재미있어했다. 이로써 이 비극적 이야기의 사이클이 완결된다. 브뢰헬은 이 많은 이야기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글을 마무리해도 좋겠지만 반전이 있다. 1996년 이후 학자들은 이 그림이 진짜 브뢰헬의 것인지 꾸준히 의문을 제기했다. 첫째 이 작품이 브뢰헬의 다른 작품에 비해 질이 떨어지며, 둘째 브뢰헬은 패널에 유채를 사용했는데 이 그림은 캔버스에 유채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무분별한 덧칠 탓일 수 있지만 두 번째 문제는 확실한 검증이 필요했다. 캔버스에 유채 방식은 패널에 유채보다 후대에 나타난 기술이다. 만일 제작 시기가 후대로 판명되고, 브뢰헬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린 것으로 밝혀진다면 이 작품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문학, 미술을 막론하고 원전 비평은 일차적 중요성을 지닌다. 원전 확립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연구나 비평은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이 발견된 20세기 초에는 위작이나 모작을 알아낼 과학적 수단이 없었다. 명망 있는 미술전문가의 한마디가 철석같은 진리로 둔갑했다. 하지만 20세기 말은 상황이 달랐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라든지, 물감 일부를 떼어내 화학적 분석을 하는 방법이 등장해 있었다.
2011년 브뤼셀 왕립문화유산연구소는 이 그림이 1600년경에 제작된 것이라고 발표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브뢰헬은 1569년에 사망했으므로 적어도 그가 직접 그렸을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기존의 작품 해석은 어찌 되는 것일까? 왕립문화유산연구소는 이 작품이 브뢰헬의 원작을 모방해 그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과거에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면 해석이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이 그림의 원작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 브뢰헬은 이 그림의 원작(만일 그것이 진짜 있었다면) 외에는 그리스 신화를 다룬 적이 없다.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치는 수가 있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숨은 그림 찾기: 이카로스의 추락 / 아시아 경제, 2019. 8. 14.
11.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1930년대 파시즘에 반발 공산당 활동…'게르니카'로 反파시즘 입장 표명
'한국에서의 학살' 미국 비판적 시선…실제로는 한국에 대해 아는 바 없어
단순하고 추상적 표현으로 전쟁 묘사…'약자에 대한 핍박' 그린 작품 평가
1969년 6월9일 자 일간 신문들이 전한 소식은 당대 한국 사회의 '빨갱이 알레르기'를 잘 보여준다.
내용인즉슨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부가 '피카소'라는 상표가 붙은 크레파스와 그림물감을 제조·판매하는 화학공업회사 대표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는 것, 유명 코미디언 곽규석이 자기가 진행하는 쇼 프로그램에서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를 찬양하는 듯한 발언으로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것, 어떤 방송 드라마에 '피카소'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자 제작진을 불러다 경위를 조사 중이라는 것 등이었다.
이는 피카소가 빨갱이였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당원으로 활동했고 소련 정부로부터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공안 당국의 관점으로는 골수 빨갱이였다. 한국에서 그를 찬양하거나 광고에 이용하는 것은 반공법 위반에 해당했다.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1951)'도 공산당을 선전하는 그림으로 인식됐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공산당 선전이라기보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국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의 모티브가 된 사건으로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미군의 양민 학살을 꼽거나 1950년 미군이 북한 주민들에게 생화학 무기를 사용한 사건을 꼽기도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둘 다 가능성이 희박하다. 두 사건은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기 전 발생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림이 완성된 후이기 때문이다.
신천군 학살 사건은 1952년 국제 사법단체가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미국이 한국전에서 생물병기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1952년 중국이 유엔(UN)에 제소함으로써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1950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 몇몇 생존자에 의해 1990년대에 알려졌으므로 고려할 대상이 못 된다. 이 그림은 특정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일반적 참화를 묘사했다고 봐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합판에 유채·110×210㎝·피카소미술관·프랑스 파리)
그런데 피카소는 어쩌다 공산당원이 돼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1930년대에 파시즘의 위협이 커지자 그 반작용으로 프랑스 파리의 지식인들은 급진적으로 변했다.
피카소와 함께 활동한 초현실주의 그룹의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를 비롯해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지드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예술가들이 공산당에 가담하거나 공산주의에 기울었다.
이 시기 공산당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외로이 파시즘에 맞선 공화군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나치 점령기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의 핵심 세력을 이뤘다.
그 과정에서 피 흘리는 희생을 치른 공산당은 2차 대전 후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게르니카(1937)'를 그려 파시즘에 반대하던 피카소가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산당은 피카소의 명성을 선전에 이용했고 피카소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피카소의 예술이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공산당의 관점에서 보면 피카소의 작품은 퇴폐적 형식주의의 산물이었다.
1951년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 앙드레 푸즈롱을 당의 공식 화가로 발표하고 그의 전시회 '광산 지역에서'를 대대적으로 띄웠다.
피카소는 자존심이 상했다. 저까짓 애송이보다 내가 훨씬 나은데! 자극받은 피카소는 공산당이 좋아할 만한 정치적 주제를 다루기로 작심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을 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 당시 미국의 대자본가들이 파시스트 진영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지원한 일을 잊지 않고 있어 미국에 비판적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사진= 연합뉴스]
화면 왼쪽에는 여인네와 아이들이 모여 있고 오른쪽에는 이들에게 무기를 겨눈 병사들이 있다. 뒤편에는 포화에 부서진 건물과 찢겨나간 계곡이 보인다. 가녀린 여인들과 건장한 군인들이 대조적이다. 아기를 안고 있거나 뱃속에 아기를 갖고 있는 여인들은 무력하나 생명을 보듬고 있다.
군인들은 에너지가 넘치지만 그 힘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다. 여인들의 얼굴은 슬픔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다. 가운데 있는 어린 소녀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또는 도움을 호소하듯 말간 얼굴로 관객을 마주 보고 있다.
군인들은 여인과 아이들 쪽으로 일사불란하게 무기를 겨누고 있지만 대오 자체가 무질서하고 혼란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는 투구 또는 화생방 훈련을 할 때 쓰는 마스크 같은 것이 대신하고 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은 멍청하고 둔한 외계인 같아 보인다.
피카소는 이런 식으로 전쟁의 어리석음과 맹목성을 조롱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프랑스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이 작품을 거부했다. 민중의 이미지가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이지 않은 데다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후의 젊은이들은 늙은 천재 피카소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두 해 뒤인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시인 루이 아라공은 자기가 주간으로 있던 문예지 '레트르 프랑세즈'에 싣기 위해 피카소에게 스탈린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피카소는 위대하신 당 서기장 동지를 캐리커처처럼 묘사했다. 이에 공산당이 발끈하자 아라공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예술이 공산당으로부터 호응받지 못하자 피카소는 공산당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당시 사회적으로도 공산당에 대한 열광이 시들해지고 있었다.
1956년 소련이 자유화 운동에 나선 헝가리를 탱크로 깔아뭉개고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을 탄압하면서 지식인들은 공산당에서 대거 이탈했다. 1960년대 서구 경제가 황금기를 누리고 전후 신세대가 성년에 도달했는데 공산당은 새로운 사회를 따라잡지 못하고 낡은 구호만 반복하다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서구에서 공산당의 인기가 날로 시들해지고 1960년 미국 사회학자 대니얼 벨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했으나 1969년의 한국에는 냉전 논리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공공연히 피카소를 추켜세웠다간 잡혀가 경을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미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이란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한국을 지켜준 구원자이자 전후 한국이 거지꼴을 하고 있을 때 경제적으로 원조해준 천사 같은 맹방이었다. 이때 청소년기를 보낸 어르신들이 요즘 광화문 집회에서 성조기를 휘두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피카소는 92세까지 장수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게르니카'를 떠올리지만 정작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때 북부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가 겪은 참상을 묘사하고 있다. 가로 777㎝, 세로 349㎝의 거대한 캔버스에 충격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포개지고 뒤엉킨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년(캔버스에 유채·349×777㎝·레이나소피아미술관·스페인 마드리드)
바로크적 장엄함이 넘치는 '게르니카'와 비교할 때 '한국에서의 학살'은 단순하고 추상적이다. 피카소는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조국 스페인에서 일어난 참상을 묘사할 때와는 태도나 표현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1937년 고국에 있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파시스트의 만행에 분노하면서 '게르니카'를 그릴 때와 1951년 세계적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 젊은 애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행복한 삶을 누리던 때가 같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지닌 추상적 측면은 공산당으로 하여금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되레 그림의 장점이 됐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이라는 특정 역사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핍박을 표현한 작품이 되고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까지 얻게 됐다.
1956년 폴란드인들은 자유를 외치며 바르샤바 거리에 '한국에서의 학살' 복사본을 내걸었다. 미국을 비난하는 그림이 소련을 비난하는 그림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1973년 피카소는 수천 점의 작품을 남기고 프랑스 남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기가 귀중하게 여겨 팔지 않았거나 '한국에서의 학살'처럼 팔리지 않은 작품들이었다.
이 즈음 프랑스는 예술품으로 상속세를 대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골치 아픈 상속 다툼을 벌이던 유족들은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이 작품들은 파리 피카소미술관 컬렉션의 중핵이 됐다.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1. 피카소는 왜 먼 '한국 전쟁'을 그렸나 / 아시아 경제, 2019. 9. 11.
12. '두 벌의 모나리자' 둘 다 다빈치 진품이라는데…
19세기 명문장가 고티에·미슐레 미사여구로 신비에 쌓인 팜파탈 이미지 변신
1911년 루브르서 전시중 도둑 맞아 연일 언론 대서특필 '독보적 아이콘' 등극
1960년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등장…수집가 헨리 퓰리처 저서에서 진품 주장
파리가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수도로 부활한 것은 16세기 중반이다. 이전 시대 왕들은 루아르강 계곡의 성(城)에 살았다. 샤를 7세는 쉬농성에, 루이 11세는 앙부아즈성에 살았다. 프랑수아 1세도 퐁텐블로성을 지어 옮겨갈 때까지 앙부아즈성에 살았다. 루아르강 계곡에는 왕이나 귀족, 그들의 애인만 살았던 게 아니다.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도 살았다.
프랑수아 1세는 왕위에 오르자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전투에서 이겼으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압도당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화가ㆍ조각가들을 데려왔다. 이때 왕궁을 꾸미고 다빈치도 초청했다.
다빈치는 능력에 비해 후원자 복이 없었다. 경쟁자 미켈란젤로(1475~1564)는 교황청으로부터 후원받으며 대작을 완성했다. 하지만 다빈치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몰락한 이후 안정적인 후원자를 찾지 못했다. 프랑수아 1세가 초청했을 때 다빈치는 후원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 막막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1516년 프랑스로 건너간 다빈치는 '최고의 화가, 기술자, 왕의 건축가'라는 호칭과 함께 환대받았다.
왕은 그에게 연금을 주고 앙부아즈성 바로 옆에 있는 아담한 클로뤼세성도 내주었다.
스물두 살의 젊은 왕은 국정을 돌보랴 정부(情婦)들과 사랑을 나누랴 바빴다.
하지만 짬이 나면 다빈치와 환담을 나누며 뿌듯함도 느꼈다. 다빈치는 1519년 클로뤼세성에서 눈을 감았다.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의 말년을 돌봐준 덕에 프랑스는 모나리자를 얻게 됐다. 모나리자는 1518년 왕실 컬렉션에 포함됐다. 프랑수아 1세가 화가로부터 직접 샀는지 아니면 선물받았는지 구체적인 사항은 기록돼있지 않다. 프랑수아 1세는 그림을 퐁텐블로성에 보관했다.
1690년대 루이 14세는 퐁텐블로성의 컬렉션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겼다. 이후 모나리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있었다. 대혁명 직후 혁명정부는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대중에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베르사유 궁전에 있던 왕실 컬렉션은 루브르 미술관의 토대가 됐다. 모나리자는 이후 지금까지 루브르에 걸려 있다.
19세기에도 모나리자는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같은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아름다운 정원사'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라파엘로(1483~1520)의 성모자상이 모나리자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빈치의 작품만 놓고 보더라도 '암굴의 성모'가 더 대접받았다.
오늘날 모나리자는 그림이 아니라 아이돌 스타같은 존재다. 루브르를 찾는 연간 1000만명 가운데 25%가 오직 이 그림 하나만 보고 간다.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이 벌어지자 루브르는 2005년 모나리자에 특별히 넓은 전시실을 배당했다. 한꺼번에 450명이 입장할 수 있는 방이다. 모나리자는 이중 방탄유리에 싸여 전시돼있다. 같은 방에 티치아노, 틴토레토의 걸작이 걸려 있고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그림인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잔치'가 웅장함을 뿜어내지만 주의는 그다지 끌지 못한다. 관객은 오로지 모나리자 앞으로 돌진할 따름이다.
루브르의 모나리자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1913년 영국의 미술품 감정가 휴 블레이커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손에 넣었다. 이초상화는 블레이커의 스튜디오가 있던 장소의 이름을 따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모나리자의 신화는 19세기 후반 형성됐다. 지금은 미술비평이 역사학·철학·사회학 등 인접 학문의 연구 성과도 받아들여 정교한 학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미술비평이 처음 태어난 19세기 중반에는 작가나 시인의 인상비평이 활개를 쳤다.
프랑스의 시인 테오필 고티에, 낭만주의 역사가 쥘 미슐레는 현란한 글솜씨로 모나리자를 유혹적이고 신비한 여인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고티에는 살았을 때 시보다 미술비평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로 중산층의 예술 취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랏빛으로 그늘진 입술' '스핑크스 같은 여인' 등 그의 미사여구로 모나리자는 신비에 쌓인 팜파탈로 변신했다. 미슐레도 "그림이 나를 집어삼킨다"는 둥 정서적 반응을 과장되게 기술했다.
실증주의 역사가 이폴리트 텐이 이런 식의 작품 해석은 근거 없는 것이며 지나치게 감성적이라고 제동을 걸었지만 소용 없었다. 유혹적인 팜파탈이라는 주제는 독자의 구미에 맞았다. 고티에와 미슐레는 당대의 명문장가였기 때문이다.
통속 소설가들도 가세했다. 이들은 모나리자와 다빈치 사이의 애정 관계를 지어내고 남편을 멋 없는 남자로 만들었다. 아내에게 사랑을 표시하고 자기의 성공도 과시할 겸 초상화를 주문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모나리자는 날로 유명해졌으나 20세기 초까지도 그 명성이 제한적이었다. 신문과 소설을 읽고 미술관에 드나드는 사람이 대개 중산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이 몰려오고 있었다.
1911년 루브르에 도둑이 들어 모나리자를 훔쳐갔다. 이 사건은 모나리자를 대중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언론은 연일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음모론까지 부풀렸다. 대중은 미술관에 찾아와 빈 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루브르 앞에서는 행상인들이 복제품과 엽서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나리자는 1913년 말 피렌체에서 발견돼 국민적 환호 속에 돌아왔다. 대중이 문화소비에 뛰어들기 시작할 무렵 벌어진 이 사건으로 모나리자는 경쟁을 불허하는 최고 작품이자 미술의 아이콘이 됐다.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모나리자의 작품성에 대해 말하길 꺼리는 경향이 있다. 너무 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도 모나리자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1913년 영국의 미술품 감정가 휴 블레이커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손에 넣었다. 초상화는 블레이커의 스튜디오가 있던 장소의 이름을 따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블레이커는 헨리 퓰리처라는 수집가에게 이 그림을 팔았다.
퓰리처는 1960년 '모나리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저서를 통해 이 그림이 다빈치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퓰리처의 주장을 요약하면 두 벌의 모나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빈치가 주문자 조콘도에게 납품한 한 벌과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갖고 있다 프랑스 왕실 컬렉션에 포함된 또 한 벌.
이런 주장이 나오자 사람들은 정작 모나리자의 실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신비한 미소가 어떻고, 스푸마토 기법(회화에서 색과 색 사이 경계선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하는 기술적 방법)이 어떻고 하는 얘기만 무성했던 것이다.
모나리자를 최초로 언급한 문헌은 '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전(1550년 초판 출간)'이다. 바사리는 다빈치보다 한 세대 후에 살았던 인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 200명의 간단한 전기와 작품 활동을 정리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전'에서 모나리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빈치는 조콘도를 위해 그의 처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4년 이상 고심하면서 그렸지만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은 현재 프랑스 프랑수아 왕의 소장품이며 퐁텐블로에 있다."
19세기까지 사람들은 이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까지 썼으면 무난했을 텐데 바사리는 설명을 덧붙였다.
"속눈썹은 섬세하기가 비길 데 없으며" "눈썹의 털은 여기는 빽빽하게, 저기는 좀 성기게" 표현돼 있어 너무나 자연스럽다 등등. 그런데 모나리자에는 눈썹이 없다.
이탈리아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19세기 프랑스 작가 스탕달도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에게 눈썹이 없다니 이상하다"고 불만을 토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바사리는 모나리자를 보기는 했던 걸까. 아니면 아일워스의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진품이라고 주장한 퓰리처의 말대로 또 다른 모나리자가 존재하는 걸까.
퓰리처는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진위 논쟁의 결말조차 못 보고 1979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림은 자취를 감췄다. 모나리자는 모방작과 복제화가 엄청 많았던 그림이라 그렇게 넘어가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이 2008년 익명의 스위스 사업가가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를 손에 넣었다.
그는 이 그림이 진품임을 증명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다. 이윽고 2012년 스위스 취리히의 모나리자재단 이름으로 그림을 공개함과 동시에 이 그림은 다빈치가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실린 저서도 출간했다.
이후 전문가들이 이 떡밥에 달려들었다. 결론은 다빈치의 진품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반질반질한 모나리자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난들 어찌하랴.
[출처] : 이미혜 경성대학교 외래 교수 :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 '두 벌의 모나리자' 둘 다 다빈치 진품이라는데… / 아시아 경제, 2019. 11. 20.
13.마네의 '아스파라거스 다발', 진리·권력을 묻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시대를 앞서 간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거의 언제나 물의를 일으키고 몰이해에 부딪혔다. 하지만 마네를 싫어한 사람들도 그의 사물 묘사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그를 혹평했던 비평가들은 '풀밭 위의 점심' 속의 벗어 놓은 드레스나 소풍 바구니, '올랭피아' 속의 꽃다발에 감탄했다. 마네가 그린 정물화 속 모란꽃은 가까이서 보면 뭉개진 물감일 뿐이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방금 정원에서 꺾어온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1879년 마네의 건강이 악화했다. 매독으로 신경마비가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파리 근교 뫼동에서 온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고생만 하고 1년 뒤 파리로 돌아왔다.
마네의 건강은 대작을 그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 받거나 작은 정물화를 그리며 소일했다. 초기에 그렸던 복잡한 정물화가 아니라 접시 위의 레몬 한 알, 사과 한 알 같은 단순한 정물화였다.
'아스파라거스 다발'도 이 시기에 그린 정물화로 소품이지만 매우 아름답고 뛰어난 작품이다. 흰 바닥에 초록색 잎이 깔려 있고, 가는 버들가지로 묶은 아스파라거스 다발이 놓여 있다. 배경은 밤색으로 밋밋하게 칠해져 있다.
에두아르 마네 '아스파라거스 다발', 1880년, 46x55㎝,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독일 쾰른
[출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Ⅱ- ▣판 메이헤런-위작 사기▣이카로스의 추락▣피카소-한국전쟁▣다빈치-두 벌의 모나리자▣마네-아스파라거스 다발▣메디치家 명품 컬렉션▣수련에 집착한 모네|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