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6
12월31일[성탄 팔일 축제 제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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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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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KvHsWHwuK0 (김강룡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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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록 우리는 곤궁하고 빈약하지만 주님의 충만함으로 인해 우리는 거룩해지며 완전해집니다.>
세월은 이토록 속절없이, 그리고 덧없이 흐르고 흘러, 또 다시 우리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튼실하고 뿌듯한 결실이 아니라 하찮고 초라한 수확 앞에 큰 구멍이라도 숭숭 뚫린 듯 가슴이 시린 연말입니다.
역사상 유래없이 혹독하고 참담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온몸으로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강력한 대재앙 앞에서 우리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나약하고 부실한 존재라는 것. 때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제한적이라는 것.
이토록 암담한 시기, 길고도 지루한 대재앙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절실한 노력이 있습니다. 매일 하느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것. 부단히 그분의 크신 자비를 청하는 것. 하루하루를 기꺼이 견뎌내는 것.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얼굴을 통해,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길고 긴 시련의 터널을 지나는 오늘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이 되는 성경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 없게 지켜주시기 빕니다.”(데살로니카 1서 5장 23절)
하늘의 성인성녀들께서,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그리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환난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계심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어려움이 클수록 우리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완전하게 흠없이 지켜나가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시편 작가의 한 말씀은 또 제 마음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 젊은 시절의 허물과 죄악을 다시는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시편 24)
지난 한 해 천천히 되돌아보니 온통 잿빛입니다. 속 빈 강정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말로는 만리장성이라도 쌓는 듯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한 것 없어 너무나 초라하고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꼼꼼히 돌아보니 주님의 은총으로 충만했던 한해였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는데, 보십시오. 그럭저럭 살아지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불안불안하지만 견뎌내다 보면 그럭저럭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갑니다. 이 혹독한 시절도 시간과 더불어 흘러갈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곤궁하고 빈약하지만 주님의 충만함으로 인해 우리는 거룩해지며 완전해집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당신의 큰 자비와 은총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의 큰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이 한해와 작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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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착각이면 어떤가? 긍정적이라면.>
‘인간의 두 얼굴’이란 EBS 다큐에서 ‘긍정적 착각’이란 말을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착각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지 알지만 사실 긍정적 착각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는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것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되는 존재기 때문에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더 긍정적인 일들이 현실화 됩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야구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준결승전인 일본전에서 한국은 8회 말 터진 이승엽 선수의 극적인 역전 2점 홈런으로 감격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홈런을 치기까지 극심한 슬럼프를 겪던 이승엽 선수는 경기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석에 들어서면서 머릿속에 자신이 홈런을 치고 두 손을 번쩍 들고 그라운드를 도는 상상을 했다.”
사실 우리는 부정적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착각하게 만들어야 되는지도 모릅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긍정적인 착각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만 믿으면 이 세상에서 물 위도 걸을 수 있다는 착각이 결국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음은 착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이면 어떻습니까? 인간은 착각이 현실이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제작진은 긍정적 착각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초등학생 4학년 150명을 대상으로 긍정적 착각도를 측정한 후, 긍정적 착각도가 가장 높은 아이들 5명과 긍정적 착각도가 평균인 아이들 5명을 데리고 한 가지 프로젝트를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각각 5명의 아이들이 한 팀이 되어 ‘준비된 종이상자를 20분 동안 되도록 높이 쌓아야 한다.’는 간단한(?) 임무가 그것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에게 이 종이상자 쌓기는 처음부터 실현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작진이 아이들 모르게 계속해서 상자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금방 포기할 줄 알았던 아이들. 그런데 놀랍게도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미션 수행 도중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상자가 무너져도 다시 쌓으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최선을 다해 상자를 쌓았습니다.
반면 긍정적 착각도가 평균인 아이들은 똑같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상자 쌓기 결과,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7층을 쌓은 반면, 평균인 아이들은 2층을 쌓는데 그쳤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실험 후 아이들의 인터뷰였습니다.
이미 쌓아 놓은 게 다 넘어졌다는 것이 너무 아깝지 않았냐는 질문에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시 쌓으면 되잖아요!”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실험외적인 요인에 대한 원망이나 불안 등에 대한 어떤 불신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아이들이 보여준 것은 타인에 대한 신뢰와 협조,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잘 해내고 이겨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 이것이 바로 아이들이 보여준 긍정적 착각이었습니다.
미국 UCLA대 셀리 테일러 교수는 ‘긍정적 착각이 동기 부여에 매우 효과적이며 장기적으로 성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학생 때부터 등수를 먹이는 경쟁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아이들에게 지기 때문에 생각이 부정적으로 될 가능성이 훨씬 크고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는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상대가 잘못 착각하고 있는 것을 반드시 바로잡아 주어야만 한다는 지나친 의무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굳이 그것을 밝혀내어 사람들 간의 사이를 벌려놓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착각들은 그냥 묻어두는 것이 더 좋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굳이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 한 가지가 나옵니다. 바로 초대 교회 때 성행했던 종말 임박설입니다. 바오로도 그렇고 오늘 요한도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 올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아마도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한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로부터 지금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파들까지 단 하루도 그리스도의 적이 없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초대교회의 재림임박설에 대해 그렇게 착각하고 살도록 그대로 두었던 이유는 그런 착각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심판이 곧 닥쳐온다는 믿음이 있다면 지금의 교회는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커다란 성당을 짓는데 돈을 쓰기 보다는 조립식 건물에 살더라도 가난한 이들을 더 많이 돕겠고, 죄의 생활을 하는 이들은 또한 당장 오늘이 될 지도 모르는 심판 때문에 회개하여 올바른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긍정적인 착각이라면 하느님도 굳이 바로잡아 주려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이 진짜 마지막 날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 강부자 씨가 SBS ‘좋은 아침’에 출연해 남편 이묵원 씨의 외도를 알고도 모른 척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남편이 나가서 사흘씩이나 어떤 여자하고 호텔에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여자가 누군지 알지만 추궁하지 않았다.”
강부자씨는 “그는 방송국에 나랑 있다가도 다섯 시만 되면 그 여자와 사라지더라. 다 알았는데 이 남자와 더 이상 안 살 거면 떠들어도 된다. 하지만 난 이 남자와 끝까지 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말 안했다. 그때가 우리 아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였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어 “예를 들어 쥐를 쫓아갈 때 막다른 골목에 쥐가 부딪치면 노려보며 뒤돌아선다. 그러니까 쥐도 도망갈 구멍을 줘야하는데 남편이 바람피웠다고 몰아세우면 안 된다. 그냥 넘어가 줘야한다. 어차피 아들이 있는데 자기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지 뭐하겠냐” 고 넘겨 버렸다고 합니다.
사실 강부자 씨의 얼굴을 보면 평상시에도 근심이 많고 매우 슬퍼 보입니다. 아마도 많이 참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한꺼번에 9명의 남자에게 대시를 받았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던 강부자 씨가 그 9명 중 선택한 한 명이 이묵원 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기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외도를 했다면 아기를 키우는 아내 입장에서는 더 분통이 터졌을 터인데도 참고 또 참았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미 지긋한 나이가 든 부부로서 서로를 위해주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묵원씨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느껴서 가정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입니다.
강부자 씨는 이묵원 씨가 한 일을 자신이 모른다는 착각을 심어주면서 이묵원 씨가 스스로 뉘정진만 돌아올 시간을 준 것입니다. 착각이라는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착각이라면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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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22년 12월 31일입니다. 2022년을 돌아보면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게 건강을 주셨고, 무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고 참혹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에 올랐습니다. 이태원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망하는 슬픈 사고도 있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22년을 보내면서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립니다. 오늘이 지나면 2023년입니다. 내년은 ‘계묘년(癸卯年)’입니다. 토끼띠의 해입니다. 저는 토끼띠입니다. 내년에 저는 환갑입니다. 예전에는 환갑잔치를 했는데, 요즘은 환갑이라고 해도 젊은 나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육체의 나이는 한 바퀴 돌았는데 마음의 나이는 아직 반 바퀴도 안 돌은 것 같습니다. 공자는 60이라는 나이를 ‘이순(耳順)’이라고 했습니다. 이순은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思慮)와 판단(判斷)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이.’라고 하는데 저는 아직도 사려와 판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2023년에도 감사할 일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아쉬움과 부족함은 모두 털어버리고 감사와 찬미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지친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짐은 편합니다. 모두들 나에게 와서 쉬십시오. 하느님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고, 아픈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주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고난을 이겨냈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배는 초대 교회의 신앙 공동체에 의해서 거친 세상을 힘차게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표징으로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023년에는 이제 우리가 제2의 그리스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행동에서 위로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서 희망을 보면 좋겠습니다.
신앙 안에서 다가오는 2023년을 드러내는 사자성어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동상동몽(同床同夢)’으로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어른이 되고,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꿈을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나의 삶과 같아야 합니다. 이제 곧 2023년이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동상동몽(同床同夢)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2023년을 기다리며, 지난 1년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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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18 :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자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말이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의지,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 그 말에 참으로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하는 말이 진실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그 당사자가 얼마만큼 성실하냐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활 속에서 체험한 정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있고 나의 생각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란 서로를 이어주고 서로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의 역할이 그러하다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요한의 소개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대로 이루어지는가? 백퍼센트의 효과를 낼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모든 느낌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인간의 말로는 부족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말로 인해서 상대방에게 큰 영향을 끼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순간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며 어떠한 말을 어떻게 해서 얼마나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 왔고 해가 되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말씀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그르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 앞에, 그 말씀 앞에 숙연하도록 하자.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닮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새해에는 살아가도록 결심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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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요한 복음의 머리글은 예수님을 ‘로고스’, 곧 “말씀”으로 선포합니다. 오직 요한 복음사가만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말씀”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 1,1.14; 1요한 1,1; 묵시 19,13 참조) ‘로고스’는 본래 세상의 원리, 지혜, 정신, 이성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표현이 익숙한 그리스 문화권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을 설명하고자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절에 따르면, 말씀은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복음의 첫 구절에서 사용된 “한처음”이라는 표현은 시간과 공간이 없었던 영역, 곧 영원에 속하는 하느님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세상 창조 이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실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 저자는 말씀이 과거에도 계셨지만,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말씀의 영원성은 하느님의 신성에서 비롯합니다. 말씀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지만, 그분께서는 여전히 하느님이십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속성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무르심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아들로서 아버지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1,14.18 참조)
오늘 복음은 성탄 축제를 보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복음서 본문으로 이끕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읽어 볼 수 있고, 그분께서 남기신 자취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려고 사람이 되신 말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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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님]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것이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듯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 <설날 아침에>)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 꼭 한 번 읽어보는 시다. 각박한 현실에도 착하고 슬기롭게 살자는 시인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오늘로 끝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는 의미가 없고 마침과 시작이라는 시간이 서로 맞닿아 있다. 하느님께는 천년도 하루 같다. 이처럼 하느님과 인간의 시간 계산법은 전혀 다르다.
하느님의 시간은 사랑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하느님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말씀이신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과 영원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에게 절망과 좌절은 있을 수 없다. 희망과 꿈만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시간은 사랑만 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하다.
그런데 그 시간을 미움과 증오로 얼룩지게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용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이제 다시 한 번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내고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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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처음부터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함께>
‘마지막 날 누구와 함께 있으면 좋을까’, ‘새 날을 누구와 맞이하면 좋을까.’ 한번쯤은 생각해 봄직한 물음들입니다.
유럽에서는 마지막 날을 보내며 새 날을 맞이하는 순간 같이 있고 싶은 사람과 온갖 축포를 터뜨리고 축하주를 마십니다.
동양의 어느 나라는 ‘일 년 모은 돈을 이 날 축포에 소비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요란스럽습니다. 이 그럴듯한 날에 가장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연인이거나 친구이기도 하고, 부모자식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함께하고 싶어도 함께 할 이가 없는’ 이들도 그야말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눈 내리는 성탄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니 ‘하얗게 지새우는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섬유가루들이 먼지가 되어 날아다니니 ‘이 공장 안은 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이주 노동자, 가족들이 더없이 그리운 국제 결혼자,
올해 일한 것에 비해 아무리 셈을 해봐도 밑진 장사가 되고 말아서 내년에 또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가 막막해 쓴 담배를 꺼내 무는 농민, 이외에도 장애로 내방쳐진 사람들, 이 멋진 순간에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함께할 이’를 찾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한 해의 저무는 순간과 시작되는 순간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함께하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처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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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갑조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음>
오늘은 한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누구도 어제로 돌아 갈수 없는 12월 마지막날입니다. 아쉬움도 돌이켜 돌아 갈 수 없고 성취감도 그때 그 장면과 똑같이 그때로 돌아 갈수 없는 현재이며 주어진 전부입니다.
이 주어진 전부는 일년 중 하루를 뺀 모든 날이 뒷받침 되어 준 오늘입니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한 처음입니다. 이 처음은 우리 인간이 손수 만들어서 발 아래 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 위에 역사가 출발을 할수 있는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이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늘상 시작이 있기에 마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주어진 선물은 말씀이신 하느님 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있게 하셨고 인간은 주어짐 위에 우리 가운데 (요한1,14)라는 인생을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어진 선물인 삶을 알아 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만의 견해만이 중요하다는 사람으로 나눠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길은 막다름에 와서야 한길로 연결 됨을 압니다. 그 막다른 길은 모두가 올 한해의 날 바로 오늘 지내는 이 날입니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있는 날입니다. 허면,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면 지난 날 “은총에 은총을 받았던”(요한 1,16)날 위에 서 있는 오늘입니다.
지난 한해 참으로 내가 은총을 받았는지 아니면 어둠속에서 숯 검정만 묻히며 살아 왔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어두움이 짖은 터널 속이라도 빛을 보며 살아 왔는지를 자기를 아우럴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내 아내가 나에게 행복이고 내 남편이 나에게 은총이며 자녀가 어떻게 부모에게 생명인지를 알겠습니까? 나를 안다는 것은 바로 오늘을 주신 말씀을 알아 뵙는 증언의 눈인데 말입니다.
이 증언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음”(요한 1,14)을 고백함으로써 살아온 역사의 강을 거슬러 원천수와 더 이상 흘러 갈 때 없는 현재인 바다와의 연결점에서 하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알게 되어 생을 한해를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증언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신 생명이신 빛이 아내를 비추었고 남편의 길을 밝혀 주었으며 자녀들을 돌보아 주었고 생업을 이어가게 했으며 가정을 은총속에서 인도해 주었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이웃의 배고픔 속에 양식으로 태어나게끔 나를 그들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한 해의 돌아 봄에 나만 있었다면 그분은 홀대를 받으시고 진정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세월이 된것입니다.
허나 나만이 아니라 춥고 배고픔이라는 이웃의 찬 손이 데운 빛으로 나의 심장에 손짓을 한다면 오늘 그 못 다 채운 하루를 채우십시다. 그러면 오늘 여기서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온전한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무리는 동시에 오늘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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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2% 부족>
넘어야 하는데 넘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높이 뛰어 넘기를 한다. 아주 낮은 무릎높이 인데도 뛰어넘지를 못한다. 자신이 그 높이로 너무 높게 보기 때문이다. 또 시도한다. 몇 번을 시도 하다가 무릎높이를 뛰어 넘었다. 그때 비로서 높이가 낮다는 것을 실감하고 높이를 더 올린다.
한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종이 한 장 차이가 내 한계 밖이다. 그 힘은 내 노력이 아니고 전능하신 분의 힘이다. 그 부족함을 메꾸는 힘이 2%라는 거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말씀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신자가 있는데 늘 2%가 부족했다. 말씀을 들었지만 삶이 없어 사람이 되지 못했다. 강생, 육화 행동으로의 삶이 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성탄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는데, 그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심이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도 2%의 한계를 넘지 못해 주저 앉아 버리는 신자들이 많다. 인성에서 영성으로의 높이 뛰기는 종이 한 장 차인데 자기가 한계를 자기 능력으로 뛰어 넘으려 머리를 굴리기 때문에 넘지 못해 하느님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2%의 부족으로 한계를 넘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었지만 육화 강생이라는 성체성사의 삶을 살지 않았기에 영성이 되지 못함이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1,18) 사람이 되어 말씀을 살자. 그러면 2%가 채워지며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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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저 사람이었음에>
요한 1,1-18 (머리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그저 사람이었음에>
사람으로 났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보이는 겉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도
오롯한 사람 말입니다
사람이지만
사람 아닌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 아닌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지만
사람일 수 없는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일 수 없는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지만
사람이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이고 싶지 않은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사람이고
그래서 다시 사람이고
그래서 새로 사람입니다
아직은 사람이게 하신
다시 사람이게 하신
새로 사람이게 하신
하느님과 벗님들과 나에게
정성스럽게 마음 모아
한해 마무리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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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명, 그리고 빛>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려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 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 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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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40년대 말, 심리학자 버트럼 포러는 학생들에게 새로 제작된 성격 검사라며 검사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검사 결과지를 나눠주었지요. 결과지에는 각자의 성격이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포러는 타인의 검사 결과는 보지 못하게 한 후, 검사 결과와 실제 자신의 성격과의 일치도를 0점(전혀 정확하지 않음)에서 5점(매우 정확함)까지 매기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학생이 매긴 점수는 평균 4.26점으로, 대부분 학생이 실제 자기 성격과 일치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결과지의 내용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럼에도 학생 모두 결과지 내용이 자기 성격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같았던 결과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거나 존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당신은 장점으로 살리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약점도 있지만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때때로 당신은 옳은 결정을 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한다. 당신은 변화와 다양성을 선호하지만 한계에 부딪힐 때면 만족하지 못한다. 당신은 자신이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사람들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이하 생략)
자세히 읽어보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당연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성격을 정확하게 찍어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인간은 서로 너무 다른 것 같지만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르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만 다르다고 할 뿐입니다.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아닌 공통점을 찾아 나갈 때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2022년 12월 31일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2023년 1월 1일입니다. 단 하루 차인데도 엄청난 시간적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연도가 바뀌어서 한 살 더 먹는다 해도 내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한 살 더 먹었다고 서운해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 살 먹어서 어른이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2022년을 마무리하며 내 마음도 다시 깨끗하게 정리해보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마음을 모두 털어버리고, 대신 사랑의 마음으로 그 자리를 채웠으면 합니다. 2022년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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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깨달음의 마지막 때>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복음 1,1)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요한편지 2.18)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독서는 마지막 때를 얘기하고 복음은 한 처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과 마지막 때는 같은 듯 다른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마지막 날은 2015년의 마지막 날처럼 물리적인 시간의 마지막이지요.
그러나 ‘때’라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인 날과 달리 나에게 중요한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새로 태어난 시간, 내가 중요한 것을 깨달은 시간을 일컬어 ‘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란 어떤 때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나는 때인데 이 말씀이 제게는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적을 물리칠 때이고 한 처음부터 계시는 말씀이 탄생하는 때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등장할 때 두려움에 싸이고, 비관적인 이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설치는 세상을 볼 때 절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렵고 절망스러운 때가 바로 구원의 때이고 희망의 빛이 떠오를 때입니다. 한 해가 끝나면 새해가 오고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듯이 인간의 죄와 그 악이 극에 달할 때 구원자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겁니다.
우리는 종종 어둠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 마음에 어둠이 있다고 하고, 우리 공동체에 어둠이 있다고도 하지요.
그런데 정확하게 얘기하면 어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서 빛이 없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어서 어둠이 있는 거라는 말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1장의 표현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맞아들이지 않았다.”(1,9-10)
이 말씀을 풀이하면 어둠이란 것은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요, 빛이 세상에 왔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지요.
은총을 보지 않고 죄만 보면 내 안에 어둠이 있고, 하느님을 보지 않고 사람만 보면 우리 공동체 안에 어둠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은총을 보지 않고 하느님을 보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은총을 늘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것을 깨달을 때 어둠도 그리스도의 적도 사라질 것이고, 이것을 깨달을 때가 어둠과 그리스도의 적이 사라질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의 깨달음도 있어야 합니다. 빛이 비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내가 참 어리석게도 어둠만 보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은 늘 먼저 어리석음에 대한 깨달음이 먼저이고 어리석었을 때 모르고 못보던 것에 대한 깨달음이 다음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이런 것을 깨닫는 마지막 때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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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찬가, 말씀예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매해 마지막날은 감개무량(感慨無量)하지만 올해는 더욱 그러합니다. 말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2022년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해는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로 끝내고, 내일 2023년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 시작인 첫날 1월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주님 성탄의 축복이 한해를 마무리 지으며 새해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성탄 축제가 계속되기에 끝도 좋고 새로운 시작도 좋습니다. 매해 마지막날 오늘 복음은 언제나 요한복음 서두 말씀인 로고스(말씀) 찬미가입니다.
무궁한 깊이의 말씀 찬미가는 하느님, 그리스도 예수님, 인간, 우주만물, 즉 모두의 신비를 알려 줍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절절히 깨닫게 하는 말씀 찬미가입니다. 본격적 말씀 찬미가의 자랑에 앞서 몇가지 기분 상쾌한 예화를 나눕니다.
1. 만93세 영원한 현역의 예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님(1929-)의 공동휴게실 게시판에 붙은 투박한 친필 성탄 축하 카드가 반가웠습니다.
“최원장님과 공동체!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성탄되시고 그리고
멋진 새해 되십시오.”
‘멋지다’라는 말마디가 참 좋은 우리말입니다. 영어로 번역한다면 ‘grace(우아함, 자비, 친절, 호의, 은혜)’가 좋을 듯 하다는 진토마스 신부님의 의견도 생각납니다.
2. 역시 70대 초반의 영원한 현역, 화순수도원 분원장인 김종필 뽈리카르포 신부의 장문의 성탄카드도 신부님의 순수와 열정을 만날 수 있어 기뻤습니다.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성경통독 8일 피정은 올해 12월 말로 제110차가 진행될 계획입니다. 아무쪼록 육화하신 주님 사랑으로 청안하신 중에 2022년을 잘 마무리하시고, 계묘년, 2023년을 새희망과 복으로 맞이하길 기도합니다.”
3. 요즘 제 고백성사중 보소 처방전 말씀은 동일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필리4,4).
써드리고 “웃어요!”란 붉은색 스탬프를 찍은 다음 조언입니다.
“연말연시 몇일동안 집중적으로 화내지 말고, 기쁨, 감사, 평화중에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보속입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축복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웃으며 명심하는 분위기가됩니다.
4. 불세출의 가톨릭교회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노와 쌍벽을 이루는 불세출의 신학자 성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성 토마스의 지혜와 사랑>이라는 신간 소책자를 구입했습니다. 다음 엮은이의 머리말 부분에서 웃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자층이 너무 얇아 겨우 300명 팔리는 것도 보장받지 못하오니, 가능하다면 원고는 무료로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료로 허락받아 출간된 책이며, 다음 애제자 수련수사에게 준 권고 말씀이 좋아 나눕니다. 잠시 나누기전, 전에도 나눴던 감동적인 성인의 일화를 나눕니다. 세상 떠나기 얼마전 경당에서 성인과 십자가에 못박힌 분과의 대화를 동료 수사가 엿들었습니다.
-예수님;“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서 참 잘 말했다.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
토마스가 주님께 드린 답변은 예수님의 친구들이자 제자들인 우리 역시 언제나 그분께 말하고 싶은 그런 답변이었습니다.
-토마스;“당신 아닌 어떤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Nothing but youself, Lord!)”-
얼마나 멋진 답변입니까! 아마 우리 모두의 답변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얼마나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의 삶을 열망했는지 깨닫습니다. 다음은 토마스 성인께서 사랑한 수련수사에게 준 충고입니다.
- 수련자 요한에게
1.대담하게 바다로 나가려 들지 말고 오히려 실개천을 통해 이르려고 해야 한다. 즉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2.더디 말하기 바라고, 저녁 늦게 대화방 같은 데를 드나들지마라.
3.양심의 순수성을 언제나 소중히 여겨라.
4.기도에 중단없이 전념하라.
5.지혜의 향연에 참여하고 싶거든, 독서실에 수집되어 있는 현인들의 저술을 사랑하라.
6.모든 이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라.
7.남들의 일에는 깊이 끼어들지 마라.
8.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말지니, 그것은 경멸을 낳기 쉽고, 또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9.결코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그런 담화에 끼어들지 마라.
10.무엇보다 할 일 없이 배회하지 마라.
11.성인들과 훌륭한 사람들의 모범을 본받는 일을 건너뛰지 마라.
12.말하는 이가 누구든 개의치 말고, 들은 바 좋은 내용을 마음속에 새겨 두어라.
13.읽고 듣는 내용을 이해하도록 힘써라.
14.의심스러운 일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두어라.
15.그릇을 채우듯 ‘정신의 서가(書架)’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정리해 두어라.
16.네 힘에 겨운 문제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마라.
이런 방향을 정하고서 네 평생을 두고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에서 유익한 결실들을 내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바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형제 토마스 수사가.-
얼마나 겸손하고 친절하고 자상하고 성실한 ‘말씀의 사람’인지 참으로 감동적인 가르침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서두는 요한복음을 요약하는 “말씀찬미가”입니다. 요한공동체에서 찬가로 불렀을 이 은혜로운 내용을 우리도 찬가로 불렀으면 참 좋겠습니다. 참으로 인간으로 태어났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니라,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랑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오늘 말씀 찬가가 말씀 예찬이 너무 은혜롭습니다. 말씀은 명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사입니다.
1.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2.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셨습니다.
3.세상 모든 것이 말씀이신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4.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5.진리의 증언자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는 말씀의 빛을 반사는 반사체일뿐 결코 발광체가 아닙니다.
6.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7.말씀이신 그분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영광을 지니신 분입니다.
8.말씀이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9.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천명합니다.
말씀과의 일치를 통해 날로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 과제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평생 과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를 통해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날로 말씀이신 주님을 닮아갈 때 자유롭고 부유하고 행복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인간의 불치병과도 같은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본적 처방도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말씀 공부가 참사람이 되는데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의 말씀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마지막 때입니다. 안팎으로 그리스도의 적들의 공격입니다. 가면을 쓰고 공격하기에 분별의 지혜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날로 진리 말씀이신 그분과 날로 깊어지는 앎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늘 진리의 말씀이신 그분과의 일치를 깊이하는 것이 적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처방입니다.
진리의 연인, 진리의 협력자, 말씀의 사람으로 시종여일,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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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
<하느님 감사!>
오늘 복음(요한1,1-18)은 '로고스 찬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란 뜻인데, 말씀에 관한 로고스 찬가는 이렇게 시작되고 또 이어집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14)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1,16-17)
오늘은 2022년 임인년(壬寅年)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감사'입니다.
말씀이신 하느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한 해 동안 축복해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찰'입니다.
언제나 한 해의 시작을 주님의 성탄 축제와 함께 시작하는데, 모두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삶을 살았는지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다짐'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다시 태어나,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에는 지나가는 임인년보다 보다 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님과 하나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2022년은 저에게 잊지 못할 다사다난했던 한 해입니다. 하느님 빽(힘)만 믿고 시작한 '성전 건축'이라는 큰 일이 있었고, 또 처음으로 '말씀필사'를 시작한 해였고, 그리고 또한 '복음묵상글'을 통해 계속해서 여러분을 만날 수 있었던 뜻깊은 한 해, 행복한 한 해였습니다.
모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함께, 오늘 복음인 로고스 찬가 안에서, 감사와 성찰과 다짐의 시간을 갖고, 기쁘게 새해를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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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https://m.youtube.com/watch?v=fJk6cY-oZ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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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 9)
하나밖에 없는
참빛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빛의 소명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향할때
사람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
됩니다.
빛은
빛의 삶을
살아갑니다.
빛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빛처럼 어둠을
밝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시며
다시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빛의 심장을
만납니다.
욕심을 몰아내시고
그 자리에 공동체를
만드시는 빛의
주님이십니다.
참빛을
믿습니다.
빛을 통하여
삶을 배웁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살아갈 사랑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반복되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영원한 것은
있습니다.
참빛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순간 순간들이
은총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듯이
새날이 밝았습니다.
더 기쁘게
더 행복하시길
빛이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존중의 빛이
사랑의 빛이
우리를 비춥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기도로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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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 9)
우리를 빛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내어주시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믿음의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빛 앞에
겸손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빛은
고요히 우리 내면을
비추어줍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하여줍니다.
사랑의 처음과
삶의 끝에는 언제나
빛이 함께합니다.
빛이 우리를
안고 어둠을 안고
길을 밝혀줍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나게되는
참빛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참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빛의 힘을 믿습니다.
위안과 평화를
주는 빛이 우리
삶의 자리를
비추어줍니다.
빛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참빛이 세상에
드디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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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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