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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유아세례
언제부턴가, 키울 자녀도 없는 내가, 유아세례 관련 내용을 읽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곤 한다. 유아세례에는 물론 여러 성경적 의미가 있긴 하지만서도 나에게는 어린 자녀를 떠나 보내야 하는 그리스도인 부모의 심정에 자꾸만 감정이입이 된다.
어린 자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괴롭고 절망적인 심정이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 되어 그나마 영아 사망률이 낮아진 시대에도 영아 사망은 제로가 될 수 없다. 하물며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과거는 말해 무엇을 할까?
심지어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일컫는 칼빈 선생 조차도, 내가 알기로는 세 명의 자녀를 모두 어릴 때 떠나 보내야 했다고 한다. 칼빈 선생이 냉혈한이 아닌 이상, 자기의 세 자녀를 모두 잃었을 때 통상적인 부모와 같이 비통하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강요의 유아세례 해석을 읽는다면, 더 큰 울림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의 부모에게 있어서 유아세례 교리는 어쩌면 그 참담한 절망가운데서 헤어나올 수 있는 한줄기 은혜의 빛일 것이다. 비록 어린 자녀를 일찍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은 평생토록 가겠지만서도, 그 자녀가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품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기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천국 백성을 잉태한 그 부모의 수고와 육신의 심한 괴로움을 분명 최후 심판 때 위로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유아세례 대상 자녀를 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이 유아세례에 대한 신앙고백과 해설을 깊게 묵상했으면 좋겠다. 그저 구원에 대한 보험 정도로 가볍게 그릇되게 취급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유아세례가 주는 언약의 넓고 깊음을 생각해보고 자기들의 신앙을 한 번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도르트신조
#코르넬리스프롱크
#그책의사람들
#20200212 #창세기 #Genesis 32장.
야곱이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하다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라반과 헤어진 후 형 에서에게 용서를 구하러 길을 가던 야곱은 도중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모인 곳을 지나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났다,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나러 나아왔다라고 기록된 것이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발견하고서 그들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야곱은 천사들을 피해 가려고 했었는데 천사들이 야곱을 만나기 위해 이동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군대와 같은 수많은 천사들이 도망자에 가까운 초라한 야곱을 보러 나아온 이유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야곱에게 무언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려는 것이었다면 그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이지만 그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는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이 가는 길목에 미리 수많은 천사들을 배치하시고 그들에게 야곱이 지나가거든 그를 맞이하라고 지시하신 것 같다. 천사들은 비록 사람보다 더욱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하며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역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여 그 지식을 사모하기까지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곳에 있으면서 도대체 이 초라한 인간에 불과한 야곱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이기에 자기들을 보내어 대기하게 하시는가 궁금해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야곱이 자기들을 지나칠 때 그런 궁금함을 가지고 야곱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또는 천사와 함께 꿈으로나 환상으로나 직접적으로나 나타나시는 때에는 언제나 택하신 자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이다. 즉 아무리 위대한 신앙의 위인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통상적인 신앙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러 가는 중에 수많은 천사들의 영접을 받은 것 또한 그런 원리로 볼 수 있다. 야곱은 지난 날 자기 형 에서에게 저지른 속임수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막중한 상황에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대비한다 하더라도 에서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될 뿐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셨던 언약의 확실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수많은 천사들을 보내심으로써 야곱을 안심시키시려는 것 같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러 나아갈 때 칼을 든 하나님의 사자와 군대를 만났다. 선지자 엘리사는 수종 드는 자가 자기를 잡으러 온 아람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자 기도로 그의 눈을 열어 아람 군대를 둘러싼 하나님의 천군을 보게 하였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고군분투 하는 것을 하늘의 성도들과 천사들이 둘러싸 지켜보고 있다면서 격려한다.
그러나 어떤 미혹된 자들은 이런 인과관계와 원리를 알지 못한채 오늘날에도 성경의 여러 인물들처럼 꿈이나 환상 같은 신비한 체험을 지나치게 추구한다. 그리고 이를 추구하는 이유는 복음으로 더 고난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이들보다 무언가 고차원적이고 차별화 되고자 하는 그릇된 욕망에 기인한다. 그런 자들에게 임하는 신령한 체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광명한 천사를 가장한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그렇게 마귀에게서 오는 환상만 좇다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직접 나서실 정도로 극한의 위기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각자의 분량에 맞게 통상적인 방식으로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의 영접을 받고 어느 정도의 확신을 얻게 되었어도 형 에서를 만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언약을 의지해서 끝까지 의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잘못 중 하나가 믿음과 신앙이라는 이유로 마땅히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를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교회가 아닌 사회집단에서는 신상필벌과 권선징악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이 기본인데도 교회에서는 소위 은혜와 화합이라는 미명하에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하기 일쑤다. 사회조직에서 어떤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할 때는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워서 하나도 어그러짐 없이 이행하고자 하는데도 유독 교회에서만큼은 세부 계획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회 봉사를 이유로 학업이나 사업이나 가정이나 자녀 등 마땅히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도 그저 하나님께서 알아서 채워주실 것이라고 혼자 착각한다.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에 용서를 구한다 하더라도 정말 낮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 회개해서 죄용서를 받았으므로 너의 용서는 필요 없다는 뻔뻔함을 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집을 짓는데 예산이 부족하면 비웃음을 당하고 우리 1만 군사로 2만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지를 따져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신앙을 이유로 내 의무를 저버리고 소홀히 하는 것은 도리어 비신앙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회 사업을 할 때나 용서를 구해야 할 때나 우리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정당한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신앙에 부합하는 것이다.
특히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 때 더욱 유의해야 한다. 마치 내가 이렇게까지 하나님께 회개하고 겸손하게 용서를 구했으니 상대방의 용서를 당연하고 마땅한 나의 권리로 여겨서는 안된다. 내 잘못으로 인한 피해자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므로, 설령 용서를 구하는 내 마음이 진실하더라도 상대방이 용서하지 않을 경우를 상정하고 그에 따른 추가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상대방이 용서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계속 미안하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며 부디 그의 심령이 부드러워지기를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간구해야 한다.
야곱이 브니엘에서 씨름을 하다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여기서 한가지 시기적으로 상충하는 것은 야곱이 과연 라반 밑에서 얼마나 머물렀나 하는 것이다. 야곱의 증언에 의하면 20년이라고 했는데 아들이 이미 11명, 즉 요셉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즉 야곱은 40세부터 60세까지 라반과 있으면서 요셉까지 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창세기 후반부에 따르면 요셉은 30세에 애굽 총리가 되었고 7년 대풍년과 대흉년 2년 째에 아버지 야곱과 자기 형들을 애굽으로 모셨는데 그 때 야곱은 130세였으므로 야곱은 91세에 요셉을 얻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둘을 모순없이 해결하려면 야곱은 실제로 40세 부터 100세 가까이, 즉 요셉을 얻은 후까지 수십년간 라반을 섬겼는데, 그 기간 중에서 자기가 품삯을 받지 않고 섬긴 기간만을 따져 20년이라고 한 것 같다. 그 나머지 기간에는 양떼를 돌보는 품삯을 받긴 했으나 그 기간 동안에 열 번이나 깎인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라반을 떠나 에서에게 가는 야곱의 나이는 아마도 90세를 넘은 고령이었을 것 같다.
이 해석에 근거했을 때 야곱은 90세를 넘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어도 여전히 형 에서에 대한 미안함이 불처럼 타올라 용서를 구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노령의 몸으로 낯선 이와 야밤에 밤새도록 온 힘을 다해 씨름을 한다. 여기서 야곱과 씨름한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께서 야곱을 힘으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야곱의 간절함을 끌어내시기 위해 스스로 힘조절을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빠가 어린 아들과 힘겨루기 놀이를 할 때 아이를 이기려 하지 않고 힘조절을 하면서 아이가 온 힘을 쓰도록 하고 결국에는 일부러 아이에게 져주는 것과도 같다.
물론 야곱이 예수님과 밤새도록 온 힘을 다해 끈질기게 씨름하는 것은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덕목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를 마치 우리가 야곱처럼 처절하고 끈질기게 씨름하듯이 간구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신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일단은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내 은밀한 탐욕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간구하는 모양새도 굳이 야곱을 본받을 필요는 없다. 야곱은 자기의 성향에 따라 끈질긴 간구가 드러난 것이고 다른 이에게는 각자의 성향에 맞게 지속적으로 간구하면 되는 것이다. 야곱을 본받아야 한다면서 큰소리로 울며불며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강요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술취한 듯한 조용한 혼잣말 같은 기도에도, 느헤미야의 잠깐의 묵상 기도에도 응답하신다.
야곱은 자기와 밤새 씨름한 사람이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뒤늦게 깨닫고 브니엘이라 하면서 직접 하나님을 뵙고도 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야곱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이었어도 하나님의 영괄과 권세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자기를 지나가시는 것을 체험하였어도 그분의 얼굴 정면을 보지 못하고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는 여호와의 사자를 뵘고서는 죽지 않았다고 안도하였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어도 환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자 죽어 마땅한 화를 당하게 되었다며 절망했다. 이처럼 구약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경솔히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하나님을 너무 버릇없이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원한다는 망령된 찬양을 거침없이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구약시대와 오늘날과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이므로 우리는 구약의 선조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절감할 수 있기까지 묵상해야 한다.
#20220212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2-13
버가모 敎會에 보내는 말씀
12 버가모 敎會의 使者에게 便紙하라 左右에 날선 劍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Pergamum write: These are the words of him who has the sharp, double-edged sword.
Et angelo Pergami ecclesiæ scribe : Hæc dicit qui habet rhomphæam utraque parte acutam :
Καὶ τῷ ἀγγέλῳ τῆς ἐν Περγάμῳ ἐκκλησίας γράψον Τάδε λέγει ὁ ἔχων τὴν ῥομφαίαν τὴν δίστομον τὴν ὀξεῖαν
하나님으로서나 사람으로서나 영원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바와 같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요한 사도가 묘사한 바 주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이 나오고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붉은 용과 그의 군대는 바로 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소멸을 당하게 된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가 밖으로는 주님의 말씀의 예리한 검으로 사탄의 권좌를 대적해서 계속 싸울것을 격려하시며 권면하시고 안으로는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과 이를 따르는 자들을 말씀의 예리한 양날 검으로 갈라내야 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權座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忠誠된 證人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當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I know where you live--where Satan has his throne. Yet you remain true to my name. You did not renounce your faith in me, not even in the days of Antipas, my faithful witness, who was put to death in your city--where Satan lives.
Scio ubi habitas, ubi sedes est Satanæ : et tenes nomen meum, et non negasti fidem meam. Et in diebus illis Antipas testis meus fidelis, qui occisus est apud vos ubi Satanas habitat.
Οἶδα ποῦ κατοικεῖς· ὅπου ὁ θρόνος τοῦ Σατανᾶ· καὶ κρατεῖς τὸ ὄνομά μου, καὶ οὐκ ἠρνήσω τὴν πίστιν μου καὶ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Ἀντιπᾶς ὁ μάρτυς μου ὁ πιστός μου, ὃς ἀπεκτάνθη παρ’ ὑμῖν, ὅπου ὁ Σατανᾶς κατοικεῖ.
버가모 교회는 아마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와 성도들을 극도로 혐오하고 대적하며 핍박하는 지역에 세워진 교회였던 것 같다. 그리고 버가모 교회를 가장 극심하게 괴롭힌 사탄의 무리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 제국이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는 가장 강력한 지배력을 가졌었기 때문에 그런 로마의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섬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사탄은 욥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서 여호와께 사람이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는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말을 하였는데 그만큼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소중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포기하고 내어놓을 정도였으니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안디바는 아마도 버가모 교회를 대표하는 복음 사역자였던 것 같다. 버가모의 로마 정부는 그런 안디바를 잡아서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해산시키면 풀어주겠다고 했거나 반대로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교회를 폐쇄하면 안디바를 석방시키겠다고 했던 것 같다. 안디바는 물론 그런 로마 정부의 회유와 협박을 당당하게 거부하였겠지만 그를 사랑하고 공경했던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그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차라리 잠깐 복음을 부인하는 것처럼 위장하더라도 안디바를 살려야하지 않겠느냐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버가모 교회의 성도 대부분은 비록 아끼고 존경하는 복음 사역자인 안디바를 잃게 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큼은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굳게 결의하고 안디바는 순교 당한 것으로 보인다. 안디바가 순교함으로써 버가모 교회는 더욱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텐데도 흩어지거나 위축되지 않고 도리어 그가 살아있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교회에 모이기를 힘썼던 것 같다. 외적인 형편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고 어려움만 더해졌어도 주님께서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신령한 힘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탄의 공세에 대적하는 버가모 교회의 그런 굳건한 믿음을 다 보셨고 칭찬하신다.
사탄의 권좌는 비단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 제국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모임도 주님께서는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셨다. 중세 시대에는 일반인들은 성경도 읽지 못하게 하고 성상과 마리아를 숭배하게 하는데다가 이를 비판하는 참되고 진실된 신앙개혁가들을 핍박한 로마카톨릭도 사탄의 권좌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고 보장된 나라에서는 이렇게 직접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탄의 권좌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학문이나 문화나 사회적 가치관의 큰 흐름 가운데서 은밀하게 점점 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어렵도록 만드는 공중권세 잡은 자의 역사가 존재한다. 교회에서는 복음과 상관없이 무조건 담임목사나 장로에게 맹종해야 한다고 강요함으로써 부교역자들이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만들고 신자들이 제대로 복음을 배우고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권좌라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보다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더 많이 누림으로써 교회를 좌지우지 하려는 자들도 사탄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다. 한 교회에 수십년 다니면서 헌신하고 봉사했다 하면서 부교역자들을 종이나 하인처럼 부리려 하는 자들도 사탄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다. 남들보다 성경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특출나다고 해서 목사들의 올바른 가르침을 우습게 보고 무시하고 비방하며 그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들도 사탄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다. 교회와 복음을 빙자해서 특정 정치이념을 선동하고 세력을 규합하며 사사건건 정부의 정당한 권세를 대적하는 교회 지도자들도 사탄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다. 교회의 규모를 무지막지하게 키워서 목사라는 이름으로 그 위에 군림하여 그 교회에 속한 자들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교회 지도자들도 사탄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다.
#20210212
#신명기 #Deteronomy 4:3-4
3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바알브올의 일은 모압 왕 발락의 사주를 받은 술사 발람이 여호와의 가로막으심으로 인해서 발락이 원하는대로 이스라엘을 세 번이나 저주하지 못하고 도리어 축복하고 난 후에 발락에게 몰래 가르쳐준 흉계로서 미디안 귀족 여인들로 이스라엘의 수령들을 유혹해서 몸으로나 영혼으로나 이스라엘 전체를 음행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진영에 여호와께서 내리신 염병이 돌아 백성들이 죽어나갔으며 이 때 수령 하나가 멋모르고 미디안 여인 고스비와 함께 돌아왔다가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에게 둘 다 창에 찔려 죽자 염병이 그치게 되어서 일명 고스비 사건으로도 불린다. 이스라엘의 수령들을 노렸다는 것은 그들이 백성의 우두머리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쓰러뜨리는 것과 같고, 미인계를 썼다는 것은 하와가 아담을 유혹하고 아담은 하와의 유혹에 넘어간 근원적인 본성을 이용한 것이머, 이방 여인과 음행을 한다는 것은 이방 신을 섬기는 것과 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발람의 간계는 가히 아히도벨의 계략과도 같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 음행에 가담한 모든 수령들을 목매달아 죽이게 하셨고 이들의 죄로 인해 백성들 중 일부도 염병으로 징벌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는 그 때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자들이 여호와께 멸망을 당했고 그렇지 않은 백성들은 생존하였다고 함으로써 수령들은 직접적으로 음행에 가담해서 교수형을 당해 죽은 것이고 염병에 죽은 백성들은 수령들의 음행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방조하거나 동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범죄해서 여호와께로부터 징벌을 받은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에게 이르시기를 파수꾼의 경고를 듣고도 방비하지 않으면 그 피값은 방비하지 않은 자가 질 것이나 파수꾼이 경고하지 않으면 이로 인해 죽은 자들의 피값을 파수꾼이 지는 것처럼, 악인에게 여호와의 심판을 전하지 않으면 악인의 피값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누군가가 바알브올과 같은 죄를 지을 때 이를 알고도 모른척하거나 묵인하거나 방조하거나 동조한다면 직접적으로 범죄하는 그는 자기 죄값을 치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른척 한 자도 간접적으로 범죄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회사유화를 위해 세습을 강행한 목사 부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목이 매달리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이를 옹호하고 동조하는 교단과 목사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염병의 형벌을 받게 된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정부의 정당한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정부 전복을 위해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선동하며 정부를 비방하고 방역을 훼방하는 이단 괴수는 그리스도 앞에서 목이 매달려 불못으로 던져질 것이고 이러한 이단 괴수를 정죄하지 않고 묵인하며 방조한 목사들과 이단 괴수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염병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신명기 #Deuteronomy 4:5-9
5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모세는 단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전한 것으로 자기 의무를 다 했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역과 인생의 마지막을 앞둔 이 시점까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하는데 열성을 다했던 것이다. 대체로 복음을 아는 지식과 지혜에 탁월한 자들은 자기의 지성이 만족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은 모세처럼 자기 유익이 아니라 자기가 올바로 깨달은 복음의 진리를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 전하고 가르치며 훈련시키는데 힘써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도 복음을 깨달아 가르치는 두세 마디 예언이 더 귀하다고 하였다. 물론 복음의 지식과 지혜에 탁월한 자들은 자기 삶이 깨달은 복음에 합당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이방 족속들에 비해서 눈에 보이는 많은 유익들을 기꺼이 포기해야 함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7일 중 하루는 안식일로서 반드시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가 거느리는 모든 사람들을 쉬게 해야 하며 육체의 정욕대로 해서도 안되고 남의 것을 탐내도 안되며 도리어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기부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은 이런 눈에 보이는 손실을 감수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게 되고 이를 통해 이방 족속들에게 기이한 나라라고 칭송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도 세상으로부터 지혜와 지식이 있다는 말을 듣는 유일한 법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행하는 것 뿐이다. 구약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눈에 보이는 이익을 포기했듯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도 세상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고 맛을 내며 향기를 발함으로써 기꺼이 손해를 감수할 때 세상으로부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주인이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는 성막과 언약궤 등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돌보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제사를 받으실 정도로 가까이 하셨듯이,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주하심으로써 우리와 더욱 가까이 함께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세상에 복음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령을 소멸시키고 악령의 감동과 인도를 받아 군대귀신 지핀 거라사 광인처럼 아무도 건들 수도 결박할 수도 없는 미치광이 행보를 보이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한국 교회는 바벨론에 멸망 당한 예루살렘처럼 자기들이 소멸시킨 성령의 불로 말미암아 철저히 소멸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