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중의 최고의 클래식을 꼽으라면 서슴치않고 선택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쇼생크탈출입니다. 클래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언제 보거나 들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쇼생크탈출은 정말 클래식 영화입니다. 쇼생크 탈출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 영화가 바로 무관의 제왕이라는 것입니다. 그 흔한 상을 받지 못했지만 아직도 전세계 영화인들의 뇌리에 깊숙히 박혀 있는 불멸의 영화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영화 쇼생크 탈출이 출시된지 올해로 30년이 됐습니다. 1994년 발표됐습니다. 당시 스크린을 강타했던 영화들은 아카데미상을 휩쓸은 포레스트 검프를 비롯해 라이온 킹, 펄프 픽션,블루 스카이 등이 있습니다. 워낙 강력한 상대들이어서 상대적으로 쇼생크탈출은 상복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쇼생크 탈출이 그냥 스쳐지나간 영화들이 아닌 가슴에 새겨지는 이유는 그 쇼생크 감옥이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속에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쇼생크감옥은 살인범 등 이른바 흉악범들이 수용되는 악명높은 감옥입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들이 수용된 곳인만큼 그 규율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살벌한 죄수들을 상대해야 하니 교도관들도 살벌합니다. 그곳에서는 폭행을 당해 살해되어도 단순한 변사처리를 하고 맙니다. 1947년대 미국에 있었던 감옥이니 최소한의 인권 그런 것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교도관들의 심사를 거슬릴 경우 그것은 독방 신세나 목숨을 잃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그런 강제된 억압된 통제된 시스템의 정점에는 교도소장이 존재합니다. 그는 신앙심이 아주 깊은 기독교인입니다. 오로지 성경에 의해 교도소를 운영한다는 철칙이 있습니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는 글귀가 새겨진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쇼생크 탈출이 대단하다는 것은 단순하게 억압속 강력하게 통제된 감옥을 탈출해 교도소장을 비롯한 교도관들의 패악질을 고발하고 그들을 처단한다는 단세포적인 복수의 의미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속에 감추어진 그 인권 유린과 억압된 체제와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기에 너무도 공감이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정의란 너무도 허망한 단어이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쇼생크 탈출속 쇼생크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정말 죄를 지어서 수감되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변호사를 제대로 선임하지 못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공식속에 억울하게 끌려들어와 평생 감옥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쇼생크 교도소의 교도소장의 살벌한 통제속에서도 요상한 편법이 작용합니다. 무엇이든 구할 수 없는 죄수가 있는가하면 수감자들 사이에서 온갖 폭행이 행사됩니다. 통제사회에서도 통제권 밖에 존재하는 것이 있듯이 그 빈틈없는 통제속에서도 교도관들의 감시의 눈을 피해 별별 상황이 다 발생합니다. 주인공 앤디가 탈출을 위해 당연히 필요했던 소형 돌망치도 편법을 통해 구입된 것입니다. 그래도 종신형을 선고받아 평생 교도소 생활을 해야 하는 수감자들에게 한가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평생 종신형을 선고받은 수감자에게 희망이라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수감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조언합니다. 괜한 희망을 갖고 탈옥을 시도하다가 현장에서 처형당한 수감자가 수두룩하다는 것입니다. 종신형 수감자들에게 희망은 바로 탈옥 즉 바깥 세상에 나가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쇼생크 감옥의 담벼락은 너무도 높고 그 담벼락은 뚫기 힘든 강력한 차단입니다. 그래도 그 안에서 오고 갈 데가 없는 작은 새를 키우는 소박한 움직임도 존재합니다. 그래도 인간들이니 측은지심이나 동정심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주인공 앤디는 외부세계에 꾸준하게 편지를 보내 교도소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합니다. 너무도 간절한 요구에 결국 바깥세상은 호응을 합니다. 고교수준의 검정고시를 볼 수 있도록 교육도 실시됩니다. 몇몇 희망 숭배자들의 간절한 요구가 받아드려지는 것입니다. 그 동토의 땅 그리고 살아서 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그런 곳에서도 훈풍은 붑니다. 교도소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중 아리아가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지 모릅니다.
오로지 철저한 통제와 성경을 앞세운 통치의 신봉자인 교도소장과 교도관들의 뇌리에는 엄청난 속세적 욕망이 존재합니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의 목숨은 하찮게 생각하는 반면 자신의 자식 교육과 부인의 행복을 우선시 합니다. 수감자들의 등골을 빼먹는 것에 익숙한 그들도 자신들의 영욕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현대사회속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선에 가득한 현실 그리고 그 추악한 현실을 합법을 가장한 불법으로 통제하는 모습이 너무도 흡사하지 않습니까. 주인공 앤디는 그러한 그들의 추악함을 역이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같은 환경에 처해있으면 익숙해지는 법입니다. 처음 쇼생크 감옥에 들어온 날 통곡하지 않는 죄수가 없지만 날이 가면서 익숙해지고 오히려 그런 환경이 편해지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그렇게 증오하면서 이제 인생 끝났다고 판단했지만 그 익숙해짐의 불편한 적응에 다들 생활화되어 갑니다. 수감생활 50년의 브룩스는 가석방 대상에 포함되자 스스로 범죄를 저질러 재수감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결국 풀려나지만 바깥세상에 버티지를 못하고 결국 모텔에서 자살하고 맙니다. 브룩스에게는 자유롭다는 바깥세상이 오히려 무섭고 두려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익숙해진다는 것의 무서움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제된 사회 억압된 사회에서 길들여지고 익숙해 지면 그곳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안주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로만 억압이니 강제니 하지만 실제로 그 통제된 시스템속에서 탈피하기를 두려워하는 부류에 던지는 경고와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새들도 처음 새장에 들어가 있으면 불안해 하고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곧 그 새장이 익숙해지고 다시 바깥으로 내 보내려고 하면 또 다른 불안증세를 보이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한국은 통제된 사회속에 오랜 시간동안 놓여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조때도 서민들의 생활은 통제속이었습니다. 물론 농민봉기나 의적활동은 있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그냥 그런 것이 최상의 삶이거니 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그 혹독한 통제를 거쳐 한국전쟁속에 민족을 서로 살육하는 참상을 겪었습니다. 이승만 독재에서 풀려나나 했지만 5.16 쿠데타로 20년 가까이 독재시스템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전두환일파의 쿠데타로 또 10년 이상 군사독재 속에 생존했습니다. 그러다 1998년부터 26년동안 민주정치속에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속에 담진 그 시스템이 과연 제대로 된 민주시스템인지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로 제대로 된 민주체제속에 움직여지는 것인지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대부분의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런 환경속에 3.1 독립운동과 4.19 혁명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도 발생했습니다. 쇼생크 감옥에서 앤디같은 주인공들이 그 통제를 뚫고 저항하고 탈출하는 그런 의미의 움직임이었던 것입니다.
1979년 10.26 사태로 선포된 비상계엄이 1980년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 저격사건으로 잠시나마 민주화 열기로 가득차 있었던 이른바 서울의 봄은 종막을 고합니다. 갑자기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김대중 선생 등 당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내란선동죄로 구속됩니다. 5월18일 이런 쿠데타 세력의 음모를 잘 몰랐던 광주 학생들과 시민들은 그들을 막는 군인들에게 저항했지만 군인들은 무자비한 구타를 가합니다. 5월 18일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는 그런 폭력에 첫 희생자가 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불길처럼 타오른 것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4주년을 맞아 저항의 정신 그리고 통제되고 억압된 시스템을 거부하고 새로운 희망속으로 걸어가려는 웅대한 움직임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또한 출시된지 30년된 쇼생크 탈출에서도 그 주인공 앤디의 자유를 향한 엄청난 의지와 저항 정신을 다시금 기억하게 합니다. 통제되고 희망이 없는 사회는 쇼생크 감옥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감옥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부단한 노력과 정신으로 그 높은 교도소 담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 희망과 저항정신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능력있고 정의로운 민주인사가 이끌고 시민 스스로 터득하고 억압과 통제의 틀속에서 안주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만이 이뤄낼 수 있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2024년 5월 18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