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극단적 선택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입력 2024.08.10. 00:01
https://www.chosun.com/opinion/espresso/2024/08/09/CXB55BGBUFDEZIFGEZZUCZUD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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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 살릴 대책 시급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
삶을 향한 극단적 선택
더 크게 더 자주 알려야
지난달 28일 오후 1시쯤 행주나루터 선착장 근처에 시신이 떠 있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조사 결과, 서울 금호동의 한 고시원에서 혼자 살던 61세 남성이었다. 5㎏ 아령이 팔에 신발끈으로 묶여 있었다. 건강을 위해 제작된 물건. 필시 미래의 힘을 기르려 애써 들어 올리곤 했을 그 무게는 이제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죽음에 대해 어쭙잖은 감상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여러 질환을 앓던 남자의 월 20만원짜리 고시원에는 현금 10만원이 담긴 봉투와 ‘청소비로 써달라’는 메모가 놓여 있었다.
갈림길에서 모든 선택은 극단적일 수 밖에 없다. 언론중재위원회는 5월부터 자살 사건 보도 시 제목에 ‘극단적 선택’을 사용할 경우 시정을 권고하기로 했다. 자살의 완곡 어법, 그 표현이 되레 자살을 ‘선택 가능한 대안 중 하나’로 인식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 우려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지적처럼 모든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 해도, 벼랑 쪽으로 걸어간 이상 선택의 몫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단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단어를 포기할 것이다.
조금 태어나고 더 많이 죽는다. 다사사회(多死社會)에 진입했다. 이미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지난 6일 보건복지부가 최신 통계를 보고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자살한 사람이 6375명이었다. 전년 동기보다 10.1%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사망한 사람이 35만2700명이었다. 그중 자살자가 1만3770명이다. 매일 38명꼴로 목숨을 끊었다. 사회적 고립과 경제난, 우울·불안 증가…. 새 생명을 잉태하는 일만큼이나 산 사람을 살리는 대책이 시급하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소멸할 것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서울 용산의 백빈 건널목. 열차가 지날 때마다 차량 통행을 막는 차단봉이 내려온다. 차단봉에 부착된 작은 종이에는 의미심장한 글씨가 적혀 있다. /tvN
정부가 분석한 자살 증가 원인 중 하나가 ‘모방 자살’이었다. 지난해 말 배우 이선균씨의 사망 사건 이후 7~8주간 자살 사망자가 늘었다고 했다. 그가 죽고 얼마 뒤 그의 대표작 ‘나의 아저씨’ 촬영지였던 용산 백빈건널목에 가본 적이 있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 이선균을 포함한 극중 소시민들이 술 취해 쓰러지고 증오하고 다시 서로를 끌어안던 장소. 서울에 몇 안 남은 이 철길 건널목에 열차가 진입할 때마다 ‘땡땡’ 경고음과 함께 통행을 가로막는 차단봉이 내려온다. 자세히 보면 거기에 작게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돌파하세요. 괜찮으니까 차단봉은 그냥 부숴버리세요.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살아남으세요.
누구나 한 번은 갇힐 수 있다. ‘갇힘 사고’라고 한다. 너무 느려서 혹은 무리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게 돼버린 인생의 순간. 열차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작은 글씨로는 부족하다. 돌파하라고 큰 소리로 외쳐줘야 한다. 타고 있는 차량이 박살 나든 기물이 망가지든 일단은 밖으로 빠져나오라고, 삶의 의지에 기반한 극단적 선택을 추동하는 것, 나는 이것이 자살의 시대에 언론이 해낼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로 인해 죽을 수 있다면 누군가로 인해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갈림길에서, 바라건대 모든 선택이 언제나 삶 쪽을 향하기를. 무거운 아령은 내려놓고 신발끈을 신발에 다시 묶고 집으로 걸어가기를. 극심한 좌절 속에서도 청소비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말해줘야 한다. 그런 건 염려하지 말라고, 살아있는 한 돕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몫이다.
정상혁 기자
오병이어
2024.08.10 06:57:49
모든(정신, 물질)게 궁핍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는 일마다 실패. 좌절의 날들이었다. 극단적 선택마저 실패였다. 두 번이나. 그냥 견디기로 했다. 운명이려니... 하고. '가슴에 칼을 꼿은 채 그대로 견딤'이 <인내> 라는 것을 배웠다. 청춘을 잘 견디고 중년도 잘 견뎠다. 이제 평안하다. 해 기우는 쪽을 향해 가고 있지만, 돌아보니 참 잘 견뎠다. 살아보니 살만한 인생이었다. 잘 살기 위해 잘 먹고 운동을 하고... '사는게 별 것인가! 이게 인생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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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할머니
2024.08.10 08:33:28
80여년을 살아오면서 고생같은것 먹고사는걱정 해보지않은 삶을 살았지만 죽고싶었을때가 자살을 생각해본적도 있었다 어렵고 고난의,아니면 마음의병을 앓고 있었다면 많은 사람은 극단적 삶을 생각했을것이다 추론해본다.생은 아무리 어려워도 저승보다는 낫다는 말이있다.세상이 모두 너무나 자신만아는 이기주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데 정부가,정치가 이런 소외된 사람을 다독여야하는 책무도 갖고있다 생각한다.모두가 어려운 세상을 살고있다.그러나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는 푸쉬킨의 삶의 한구절처럼 모두가 극복하며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다.살아있는것 만으로 행복일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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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척
2024.08.10 08:16:12
밥 먹을 형편이 못돼 라면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내 몸이 어느 한 곳이라도 아프지 않다면 몰라도, 참고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 놓이게 된다면 꼭 살아가야 할 마음이 생길까? 누군가 에게 의논 할 곳도 의지 할 곳도 없는 신세라면 극단적 선택이든 자살이든 하는 것이 더 편안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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