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와 죽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이는 카뮈의 저작『시지프 신화』에 등장하는 첫 문장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기 전 돌연 듯 떠오른 문구이기도 하다. 이 문장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와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찾아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지 아닐까? 이해되지 않는 어떤 것을 마주했을 때 그 의문점을 해결해 줄 만한 어떤 것을 찾는 것, 혹은 그에 대한 향수와 같은 것, 왜 태어났는가, 우리가 왜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살아가야만 하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인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왜 죽어야만 하는가. 우리를 항상 따라다니며 가장 밀접한 것이면서도 쉽게 의식할 수 없는 이 물음에 대해 과연 도가에서는 어떤 식으로 답을 내줄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적어보려 한다. 도가 속에서 자살과 죽음을, 그 자살과 죽음 속에서 도가를 한번 찾아보려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비극은 더욱 비극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의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비극적인 것은 삶과 죽음, 인생임이 틀림없다. 나와 거리 둘 수 없는 것, 나와 가장 밀착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도가의 기본적인 입장은 무위자연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 무위, 꾸밈과 같이 의도적인 것을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것 자연, 그러니까 본성에 따르자는 것이다. 저절로 그러함을 본받고 인위적인 모든 것의 해체, 욕망의 해체, 사유의 치우침의 해체, 그렇지만 해체가 곧 소멸은 아닌 그러한 것인 거다. 말하자면 내가 위에 말한 것들의 공존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말 그대로의 의미의 해체가 아닌, 소멸이 아닌, 공존으로서의 해체, 그러니까 도가는 해체적 생성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해체 함으로 만들어 지는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게 아닐까. 이미 있던 것,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져왔던 것의 해체로 그 틀에 가둬져 있던 자유를 되살리는 것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가에서 인간이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지배적 시스템에 의해 정의되기 이전의 인간, 인위 이전의 인간, 발화되기 이전의 인간, 본성으로서의 원초적인 인간으로 볼 것이다. 자연스런 흐름 속을 살아가는 인간. 그렇다면 도가에서는 태어난 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런 인간으로 살라는 것이 아닌가. 인간을 초월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태어난 이상, 원래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자는 것. 이것이라면 인간은 영원히 비극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도 그럼 도가는 언제 올지 모를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의식, 의식된 죽음 앞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을 위로해주지는 못하는 것일까? 이 어쩔 수 없는 삶으로의 치우침, 이를 인간의 본래적 태도로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 그저 이런 비극적인 현실과 인간의 갈등을 직시하고 맞서라고 말하는 것일까. 내 궁금증에 대한 도가의 답변이 궁금하다.
첫댓글 자. 실존철학에서 묻고 있는 것을 반문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가? 그것이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만 하는 것"은 왜 그런가?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 세상이 무가치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꼭 같지는 않지만, 결국은 "왜 사느냐?"를 묻는 것이라고 할 때 정답은 아니지만 이미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싯구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왜 사냐?"를 묻는 이유는 저마다 다릅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물음은 근본적으로 "살게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답을 제시해달라는 이야기이지요. 그 요구에 우리는 답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배경과 문제의식,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지요. 도가는 아마도 이런 관점에서 되물었던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