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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진보의 역설>
2019101241 철학과 박석윤
학기 초 나는 여성 철학시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기의 무거움과 존재에 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그 어떠한 것에 대해 존재론적 규정을 하고자 하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이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 간의 괴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유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여성철학 수업을 듣고 생기는 답답함에 주변인들에게 말을 쏟아 내었다. 그러한 말들을 몇 시간씩 쏟아낼 때면, 누군가는 어떠한 공감을 표하는 반면, 우선, 대게 말을 할수록 대화 상대와 더욱 괴리가 벌어졌다. 간극을 해소하기 위한 말들이 간극을 드러내는 상황속에, 나는 내가 마치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 나는 잠시 입을 닫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내가 하고자했던 말을 <진보의 역설>이라는 글로 작성하였다. <진보의 역설>은 온전히 도가적 관점과 일치하다고 볼 수 없지만, 도가철학과 실존철학에 영향을 받아 작성한 글이다. 이 글에서는 글 <진보의 역설>을 도가적 입장과 비교하여 재해석하고자 한다.
<진보의 역설>
박석윤
철학 수업이나 평소 이야기할 때 나의 이야기가 주변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 것을 느끼며, 이야기를 나눌수록 서로의 언어에 대한 괴리가 더 깊어져 글을 쓴다. 만약 이 글이 나를 심판대에 올라서게 만들더라도 나는 내 두 발로 심판대에 서겠다. 이 글은 세상이 바뀌길 원하고 불평등이 없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비판이다. 또한 많은 수의 페미니스트와 진보주의자에 대한 비판이며, 기독교인들과 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내가 문제의식이 생긴 것은 이러하다. 철학 수업 내에서 어떤 발언이 오가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혐오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발언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동의하던 학생이 다른 학생의 보수주의적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 혐오한다는 것이다. 여성 철학 시간에 여성이 모르는 남성과 단둘이 있을 때 느껴지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공감하지만, 미국인이 아랍계 사람들에게 느끼는 두려움이나 유럽인이 난민 범죄 가능성에 느끼는 불안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 성경에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죄로 규정한다. 하지만 예수는 죄 없는 사람만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로 쳐 죽이라 하였다. 예수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돌을 던진다면 누가 예수를 따르겠는가? 차별을 없애자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차별한다면 누가 설득이 되겠는가?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불평등하게 대한다면 불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입증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이는 율법주의를 반대하는 또 다른 율법주의와 같다.
진보주의자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열망이 있다면 보수주의자와 직접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상호주관을 찾으려 노력해 보라는 것이다. 자신과 의견이 맞는 사람들과만 대화하며 서로의 위안을 챙기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말은 자기모순으로 힘을 잃을 것이다.
내가 목격한 모습은 그것이 옳은 주장이든 아니든 한 학우는 저항하며 자신의 의견을 다수에게 드러냈고 다수의 옳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침묵하며 그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차별을 인정하며 차별했고, 옳음을 말하는 사람은 차별을 부정하며 차별한 것이다.
이것은 PC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게 만들었지만, 각 개인의 실존적인 상황에 대한 인지를 흐리게 만들었다는 부작용을 우리는 반성해 보아야 한다.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페미니즘이 여성과 성 소수자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면 그들이 페미니즘을 외칠수록 세상은 그들을 배척할 것이다. 어두운 길가에서 여성이 모르는 남성과 단둘이 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두려움이나 미국인이 아랍인들이 가방에 손을 집어넣기만 해도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에 차이가 없다면, 차별에 대한 현상학적인 접근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 두려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원인에 대한 존재론적 규명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충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목격했고 당신이 들었던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학문은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는데, 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많은 수의 페미니스트는 또 다른 차별을 조장하는가?
또한 강력한 캐치프레이즈가 실존적이고 세세한 각자의 차별 경험을 거대 담론으로 이끄는 것이 문제가 된다.
물론 미투 운동 때의 페미니즘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당했던 실존에 대한 침범을 서로 유대하고 저항함으로써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Girls can do any thing’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여성의 자주성을 상징하는 말로써 만들어졌음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도 캐치 프레이의 상징성이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그중 girls라는 단어가 여성 일반을 의미하여 성별 간의 진영논리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girls라는 여성 일반을 의미하는 단어는 개인의 개별적인 경험을 여성이라는 범주화 하여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범주화하여 해석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그저 한 개인이 타인으로부터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여성이 남성에게 도움을 받는 상황 또는 약자가 강자에게,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라는 범주로 묶어서 연상(또는 해석)하게 하는 우려를 낳는다.
물론 그러한 해석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러한 해석이 오히려 한 개인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없게 만들거나 도움을 주지 못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만약 페미니스트가 정말로 양성평등을 원한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은 ‘Girls can do any thing’이라는 여성 일반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삶에서 관계하고 있는 존재 일반을 표현할 수 있는 ‘we can do any thing’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하나의 캐치프레이즈이며 거대 담론이긴 하지만 여성이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 일반이 혼자일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타자와 함께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현사실성을 들어냄으로써 의미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로 간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특정 범주에서 벗어나 자신과 타자에 대한 실존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관계성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재검토의 하나로서 자신이 (여성, 남성 어린아이, 성소수자, 장애인, 특정 국가인, 노인…. 등등) 어떤 범주에 속해서 어떠한 일을 해내는데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자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서로 간의 도움이 필요한 일은 특정한 범주에 속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존재자 일반이 자신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론적 원인에 개인이 처한 실존적 상황에 따라 도움의 방법이 다양해질 뿐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실존적 상황은 부끄러움의 이유가 되지 않고 차별의 대상 또한 아니다. 더 나아가서 타인 또한 타인의 실존적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상호주관을 생성할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그 무엇보다 내가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자라면 교회는 죄인을 위한 공간이어야 된다. 우리는 매주 예수님이 낮은 자, 가난한 자, 병자, 죄인, 차별받는 자 그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왔다는 사실을 듣고 입으로 시인한다. 그러한 시인 가운데 성경이 정말로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다면, 또한 성경에 죄로 규정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는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공동체에서 소외와 배척을 느끼지 않도록 교회의 문과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한 구절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구절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동성애자라도 교회 공동체에 참가하기 원할 만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변화하기 원한다면 그들을 성경에서 말하는 방법으로 도와주고 기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 중에는 평신도와 함께하기에 위험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사람은 신천지와 같이 교회 사람들을 이단 교회로 빼내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어린양을 이리와 함께 방목하는 것과 같이 위험하다. 평신도와 함께하기에 위험한 사람들에게는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잘 훈련되고 사명을 가진 사람들을 양육하여 그들에게 직접 다가가 교회가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건물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과 사람의 모임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자기 행동이 어긋나지 않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만약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자신부터 변화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학기초에 작성한 <진보의 역설>이다. <진보의 역설>을 쓴 이후에 여성철학에서의 논의 주제와 수업 분위기가 바뀌었고 <제 22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주대학교 <글로컬 30>등 커다란 정치적 사건들이 지나갔으며, 그동안 학과생 사이에서도 많은 대화가 오갔다. 이러한 존재의 역동성과 함께 본문의 몇몇 내용은 변화하였지만, <진보의 역설>에는 아직도 유효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도가적 입장과 비교하기 위해서 먼저 노자 <도덕경>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시 형태로 쓰여 있으며 죽간본의 특성상 끊어 읽기와 해석이 다를 수 있어 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논의된다. 도덕경에 대한 여러 번역 중 이 글에서 인용되는 번역본은 흔히 알려진 왕필의 주석을 따르는 번역이다.
도덕경 1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1장
1)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2) 無名天地之始 무명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 유명만몰지모
1)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2) 무명은 하늘과 땅의 기원이요,
유명은 만물을 기르는 단순한 양육자일 뿐이다.
위 구절은 도와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문장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마치 실존철학자들이 분석하는 ‘존재’와 비슷한 방식으로 도를 설명한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도 흥미롭지만, 이 글에서는 도가가 도를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 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묘사 다음에 이어지는 ‘무명’은 인간이 무엇을 인식하고 추상화하기 이전에 이름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고 반대로 ‘유명’은 인식 대상을 이름이라는 범주안에서 파악하여 개념화된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도가는 도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여 ‘무명’이라 말할 수 있는 ‘탈 범주화’를 지향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무명’이어야 하는 것일까?
도덕경 2장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2장
2) 故有無相生 고유무상생
難易相成 난이상성
長短相較 장단상교
高下相傾 고하상경
音聲相和 음성상화
前後相隨.전후상수
2)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만들고
길고 짧음은 서로를 비교한 것이고
높은과 낮음도 서로 기울어진 것이고
말소리와 듣는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도가의 이 구절은 아인슈타인 이후 현대사회에서는 하나의 과학상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해석되어 질 수 있다.
현대 과학에서는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과 비교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한다.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똑같은 속력을 가지는 빛조차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어떠한 공간에 광자 한 알갱이만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 광자 알갱이는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 광자는 관찰자가 되는 동시에 비교대상이 되는 존재자가 없이는 속도가 일정하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빛은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같은 속력을 가지는 것이 앞서 말한 전제이다. 이로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어떠한 공간에 다른 존재자 없이 홀로 존재한다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고 실험을 통해서 본문의 내용을 현대과학과 연결하여 해석해 볼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2장의 내용을 인용한 이유는 현대과학적 해석이 아닌 변증법적인 문장구조에 있다.
도덕경 2장에서는 대립되어 보이는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음과 낮음, 말소리와 듣는 소리, 앞과 뒤를 연결시키는 문장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문장구조는 정, 반, 합 구조의 변증법의 구조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도덕경 2장의 내용을 변증법에 비유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이 아닌 레비나스나 메를로 퐁티와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사용한 변증법일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과 현대 철학자들이 사용한 변증법의 차이는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보편적이고 목적론적인 세계를 그리고자 하였다면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들은 정명제와 반명제의 합으로 도출되는 새로운 합명제가 아닌, 오히려 언어로 포착하기 어려운 정명제와 반명제 그 이전의 선술어적인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변증법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도덕경의 변증법적 문장구조를 보았을 때 있음과 없음을 구분하여 서로 생겼다고 해석함에 더 나아가서 있음과 없음의 구분 이전에 선술어적인 상태에서는 이원론적으로 인식되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앞선 분석작업을 통해 도가철학의 탈범주화적인 성격과 이원론적 구분을 거부하는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성격들을 통해 <진보의 역설>에서 다루었던 진보주의자와 페미니즘 그리고 기독교에 관하여 재해석해 본다면, 우선 진보주의이든, 보수주의이든 서로에 대한 이분법적인 구분에 앞서 그들은 나라의 정치에 관심이 있는 국민인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가 추구하는 선의 모습과 방법이 너무나도 달라 서로가 서로에게 악인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정치를 진영싸움으로만 이해하여 자신의 기준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똑같은 행위를 한다면 힘은 가질 수 있을지언정 강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 같은 경우에는 1세대, 2세대, 3세대로 나누어지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욱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인권을 신경 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보인다. 하지만 제3세대 페미니즘이 1992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세대 페미니즘의 비판점인 여성일반에 대한 거대 담론이나 2세대 페미니즘의 비판점인 서로 동일하다는 면모만 크게 부각하여 서로 다름에 대한 망각을 촉발했던 문제에 대해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가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남성과 여성, 각각의 성소수자들이 서로가 실존을 가진 존재자라는 점에서 같다는 점과 그러한 실존적 상황이 동일할 수 없다는 다름에서 드러나는 변증법적 구조에서 존재자 일반은 서로 구분되어질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모두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겠지만 페미니즘의 목표는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수용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오히려 여성주의라는 이름이 세상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즉 페미니즘은 없어지기 위해 나아가는 이름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도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전제부터 성경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시작하고 도가는 선과 악의 구분을 거부하는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은 예수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한 구절에서 극적인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러한 역설을 포착하겠는가? 신약에서 등장하는 예수라는 인물은 기존 선의 기준이 되는 율법주의를 무너뜨리고 율법이 악인이라 규정하던 이들에게 향했다. 율법이라는 기준을 무너뜨리고 소외된 자와 함께한 예수는 십자가에서 존재자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하여 대신 죽었다. 기독교에서의 모든 죄란 원죄도 포함이 된다. 그렇다면 원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죄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을 의미한다. 선악과는 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도가에서 선, 악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이로움이 커지는 세상이 된다고 묘사하듯이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능력(또는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잃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선과 악을 판단하는 능력의 상실은 죄의 기준이 사라져 어떤 일을 저질러도 되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과 권한이 없어 오직 성경과 예수의 ‘길’(도)에 온전히 나 자신을 내 맡길 수 있는 역설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첫댓글 첨부한 한글 파일에는 단어 중복과 오타가 많아서 카페에 올린 글은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ME Too의 성공 비결은 Me too, 곧 공감에 있습니다. 너이기 때문에 너만 특별한 취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다라는 공감에서 연대가 출발하게 된 것이랍니다. 따라서 구분과 차별, 공감과 배제는 기본적으로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대해서 느끼는 당혹감은 아마도 공감의 결여일 것입니다. 에코이스트적 관점에서 보면 "내로남불"에 진저리가 쳐지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너희가 소수자라면, 같은 관점에서 서아시아 사람들, 16억명이나 되므로 절대로 소수일 수 없지만,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소수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소수자로서 같은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대에게 맡기면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서의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구절을 두고 로마가톨릭은 내내 고민했습니다. 부자 배제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찾아낸 것이 우선적 선택입니다. 그것을 급진적 페미니스트에게 적용한다면, 너희의 내로남불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선택하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