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일기예보나 교통사고 상황 정보 등이 필요할 때, 새벽이의 가슴에 달린 라디오를 듣습니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라디오와 얽힌 많은 추억들도 떠오르는데, 그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바로 이 소리입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
밤 10시쯤 되면 길게 소리로 빼며 들려오던 그 소리에 이어지는 전설 이야기. 그 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어 쏟아지는 잠을 애써 참으며 듣다가 잠드는 줄도 모르고 잠들곤 했던 기억이 살아납니다.
기억을 되살린 김에 새 전설 하나 만들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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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슬라무내... 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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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고산골을 따라 비슬산 한 자락을 타고 올라 산 정상에 이르면 그곳에는 아주 신령스러워 보이는, 벼락 맞아 둥치만 남은 하얀 나무와 그 바로 앞에 사람이 엎드려 있는 형상의 바위 하나가 있습니다요.
오늘은 그 나무와 바위에 얽힌 전설을 찾아 떠나는 전설여행을 시작해 봅시다 그려...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날에 달구벌 비슬산 어느 산골에 산신령이 살고 있었답니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참꽃으로 온 산이 분홍으로 물드는 그 산을 산신령은 참으로 아끼고 사랑했답니다 그려...
'아... 오늘이 드디어 내가 이 산을 지킨 지 천년이 되는 날이구나...'
신 새벽, 습관처럼 아침 약수를 마시기 위해 옹달샘으로 향하던 산신령은 간밤에 얇게 내린 눈 위에 찍힌 낯선 사람의 발자국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허~ 여기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거늘... 어인 발자국인고...?'
슬그머니 호기심이 발동한 산신령은 그 발자국을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그 발자국은 바로 산신령이 찾아가던 옹달샘을 향해 나있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제발 우리 엄니 병이 하루빨리 낫도록 도와주세요~"
옹달샘이 있는 곳에 이르자 얇은 흰색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처녀가 찬 겨울 첫새벽에 춥지도 않은 지 정성을 다해 산을 향해 기원을 드리면서 작은 물동이에 옹달샘물을 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뒷자태를 보며 산신령이 품에 넣어둔 거울을 꺼내 그 처녀의 등에 비추니 그 처녀의 집이 비추어졌는데, 산중턱 어름의 어느 단칸 작은 집에 나이 든 한 아주머니가 연신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정을 대충 파악한 산신령은 그 처녀의 효성이 갸륵하게 느껴져서 그 옹달샘에다가 산의 정기를 듬뿍 담아주었습니다. 물을 다 길은 처녀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돌아섰을 때, 헉! 산신령은 체통을 잃고 탄성을 지를 뻔한 입을 간신히 막았습니다.
'세상에 인간세상에 이런 미인이 있다니... 천상에 살 때에도 저런 미인은 본 적이 없거늘...'
'혹, 옥황상제께서 천년의 대임을 잘 수행한 나에게 선물로 천상의 미인을 내려보내셨나...?'
그날로 천년을 외로운 줄 모르고 홀로 잘 살아오던 산신령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려...
한편, 병든 홀어머니를 부양하며 힘겹게 살아오던 그 처녀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에 나가보면 쌓여있는 쌀이며 장작들을 보며 의아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매일 이런 일을 하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전할 텐데...'
그러던 어느 날, 작심을 한 처녀는 부엌에 숨어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새벽 여명이 비추기 전, 마당 안으로 불쑥 들어선 잘생긴 총각이 눈에 익은 쌀자루를 마당에 내려놓는 찰나,
"저... 뉘신지...?"
불쑥 부엌문을 열며 나선 처녀를 보며 잘생긴 총각으로 화한 산신령은 화들짝 놀라 엉급결에,
"저기 보이는 산너머 사는 산돌이우~ 힘겹게 사시는 것 같아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우~"
잘못된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처녀는 그 총각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매일 이른 새벽에 쌀이며 장작을 놓고 가던 사람이 저렇게 잘 생긴 총각일 줄이야...
과년한 처녀의 뺨이 붉게 달아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젊은 처녀 총각이 정분이 나는 것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진리.
둘 사이에는 총각으로 화한 산신령이 바라던 대로 정분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려...
비슬산 정상에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둘은 매일 그곳에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살았답니다. 봄이 되니 온 산에는 참꽃들이 가득 피어나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둘의 사랑 또한 점점 더 짙은 분홍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천년을 홀로 살다가 사랑에 깊이 빠져버린 산신령이 그만 큰 실수를 하나 하고 말았네요.
쯧쯧... 이 일을 어찌할꼬...
산신령의 큰 임무 중 하나가 비가 필요할 때 하늘에 비를 청해 땅이 가물지 않도록 잘 조절하는 일인데... 그만 깊은 사랑에 빠지다 보니 그 일을 깜빡해버린 것이었어요. 급기야 그해 모내기를 앞두고 극심한 가뭄이 들자, 산아래 달구벌 고을 원님이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며 비를 내려달라 간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를 이상히 여기고 조사를 하던 옥황상제가 산신령이 인간 처녀와의 사랑에 빠져 일을 소홀히 한 것을 그만 알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려...
노한 옥황상제는 산신령과 처녀가 사랑을 속삭이던 그 나무에 큰 벼락을 내리고 주문을 걸어 임무를 소홀히 한 산신령을 그 나무에 가두어버렸는데, 그런 사실을 알 길이 없는 그 처자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총각을 그리워하며 매일 밤마다 그 나무 아래에서 그 총각을 부르며 울다가 울다가 그만 엎드린 채로 굳어 바위가 되고 말았답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울다가 지쳐 바위가 되어 가는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던 산신령 나무는 벼락 맞아 검게 그을었던 둥치가 타는 속처럼 하얗게 점점 탈색되어 가더니 마침내 그 처녀가 바위로 굳던 날 온통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신령스럽게 변한 그 나무를 신령나무라 부르게 되고 그 바위를 처녀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입니다요 그려...
지금도 비슬산 남쪽 그 마을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해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모두 이른 새벽에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고 옹달샘물 한 동이씩 머리에 인 채, 그 산에 올라 처녀 바위를 감싸고돌면서 "산돌님아~ 산돌림아~" 목놓아 부르는데, 그때 신령 나무속에서 "응~~~~~~"'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면 곧 하늘에서 비가 내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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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현대를 살다 보니 앞은 열심히 내다보며 사는데 뒤돌아 볼 틈을 내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시대가 변하며 판타지 이야기는 늘어나지만 구수하고 재미있는 전설들은 잊혀져 갑니다.
세월 붙잡을 수 없듯이 사라져 가는 전설들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어릴 적 저를 행복하게 해 주던 그 전설들, 제 기억 속에 있는 그 형식이라도 남겨두고 싶어, 길에서 잠을 청하며 하나 남겨둡니다.
참, 이 전설은 제가 옛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이리저리 꿰매어 짜집기를 한 전설이니 혹 그곳을 무모하게 찾아 나선다거나, 또는 그곳에 가보니 그 신령나무와 처녀바위가 없더라고 저에게 따지시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주 어릴적 늦은시간 우리아부지 어머니 사이에서 듣던 그 시그널 음악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ㅎ 늦둥이 막내딸이
눈치도 없이 부모님 사이에 끼어
이불 뒤집어쓰고 듣던 아련한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보게되어 감사드려요.ㅎ
감겨오는 눈을 애써 부릅뜨며 듣곤 했는데 마지막까지 듣고 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ㅎ
그래도 밤만 되면 기다려지는 시간이었지요.
마음자리님의 창작전설 재미 있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재미있어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또 새 이야기 만들어지면 들려드릴게요. ㅎ
ㅎㅎ 전설 따라 삼천리,
재미있게 잘 쓰셨습니다.
상상력에다,
글솜씨 좋은 마음자리님 이야기
앞으로 환타지 소설을 쓰셔도
잘 쓰시겠습니다.
전설 복원 프로젝트 같은 거 있으면
당장 뛰어들고 싶습니다. ㅎㅎ
비슬산 자락이 고향인 저로서는
전설따라 삼천리를 철썩같이 믿습니다!
아... 모렌도님 고향이 비슬산 자락이셨군요. 비슬산이 가장 아름다운 초봄이 곧 다가오겠네요.
말씀하신 '전설따라 삼천리'는 mbc라디오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기현' 성우 분의 구수한 나래이션으로 유명하죠..
비슷한 시간대 '법창야화' 라는 반공프로도 역시 mbc프로였던 걸로 기억..둘 다 남동이 초딩때 들어봄...ㅎ
아... 상세한 내용을 알려주시니 크게 도움이 됩니다.
법창야화와 재치문답도 제가 좋아했던
프로였습니다. ㅎ
익숙한 지명에 반가움이..ㅎ
고산골에서 시작하는 비슬산 등산을
동창들과 두어번 했지요.
중간에 약수터도 있어요.ㅎ
재미있습니다.
올 봄 비슬산 참꽃 흐드러지게 필 때 다녀와야겠습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그 길이 제가 가장 잘 아는 비슬산 오르는
길이었어요.
중동교 옆길 따라 초입에 들어서던
고산골 옛모습이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요?
요즈음 아이들은 이런 전설따라 삼천리 즉 동화같은 이야기를 모르는 것 겉습니다. 그저 게임에만 몰두한것 같아 안따깝습니다.
재미있는 게 너무 많은 세상이라
그런가 봅니다.
게임보다 더 재미있게 써봐야겠습니다.
ㅎㅎ
게임도 세월이 가면 전설이 될 겁니다 ㅎㅎ
참 재미있게 쓰셨습니다.
저도 비슬산 멋있던 산으로 기억됩니다~
내용중 '길에서 잠을 청하며' 약간의 설명 부탁합니다~
제가 미국 큰 트럭 드라이버라
주중에 4박5일 정도 길을 달립니다.
그러니 길에서 잘 때 쓴 글이란 말이지요. ㅎ
마음자리님 창작 전설따라 삼천리 아니 더 멀리
비슬산 이름의 그곳을 상상으로 가 보았습니다 .
언제 한번 비슬산에 오르며 마음자리님의
전설 자취를 찿아 보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