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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을 왜 흔들고 물어뜯나 (성한 갈대를 꺾지 마라)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고 그 조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미줄처럼 얽힌 조직의 위아래, 좌우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무시할 수 없는 게 조직생활의 생리다. 그게 싫고 힘들면 사표 던지고 산 속에 들어가 <나는 자연인이다> 하고 새와 짐승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현대문명을 단절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에 새나 짐승처럼 산다면 그건 자연이이 아니고 원시인이지 어찌 자연인이란 말인가? 또한 몸뚱이로 산 속에 산다고 하면 사람의 껍데기는 자연인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정신도 자연인인지 묻고 싶다. 정신과 몸 모두가 자연인이어야 자연인이지 산 속에 산다고 하여 껍데기만 자연인으로 보일런지 모르나 속의 정신까지도 자연인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의 동물적 본능은 식(食)과 色(색)이다. 음식을 먹어야 개채를 보존하고 활동할 수 있다. 인간들끼리 어울려 살아야 남녀가 짝짓기를 통하여 종족이 이어지고 번식 할 수가 있으며 또한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살기 위해서도 먹지만 먹는 즐거움은 매우 크다. 그리고 또 다른 즐거움은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부모형제 자식, 친인척, 친구, 이웃사람들과 어울려 얘기하며 웃고 떠들고 마시고 먹고 여행을 하는 재미는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즐거움으로서 이러한 행위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며 외롭지 않아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치매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진 사람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형벌은 감옥이다. 감옥은 위와 같은 인간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본능인 色의 행위조차 못하게 함은 물론 번식도 할 수 없으며 신이 움직이도록 창조한 인간 동물(動物)을 못 움직이도록 부동인(不動人)으로 만들어 버려 인간을 닭장속의 닭같이 철창 속에 가두어 살도록 모든 행위와 자위를 구속하는 무서운 형벌이다. 그런데 닭을 방목하여 자연에서 자연식을 하지 않고 닭장 속에 가둬 인공사료를 먹여 기르면 알을 낳지 못하는 폐계가 빨리 되는데 그 폐계를 산으로 보내 방목하여 자연식을 하면 건강한 닭이 되어 다시 알을 낳는다.
그리고 자유를 구속하여 운동을 할 수 없는 닭장 속에 사는 닭들은 스트레스를 받아 고기와 달걀에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사람이 그런 닭고기와 달걀(돼지와 소고기 등도 같음)을 먹으면 사람의 몸속에도 스트레스가 쌓여 현대인들이 스트레스가 많으며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질병과 암이 발생하고 증가하는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다. 그러니 동물이나 사람이나 운동과 자유가 건강에 좋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유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조건이다. 하물며 동물 중에 지능이 가장 높고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갇혀 살 경우 부자유와 답답함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어느 동물보다 크기 때문에 제명대로 살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죄를 짓고 감옥에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쉽게 병들어 절대 오래 살지 못하며 불행한 삶이 된다. 세상을 살면서 죄는 절대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에 산다는 것도 창살만 없지 감옥과 다를 바 없다. 무엇하러 죄도 짓지 않은 사람이 감옥과 같은 생활을 자청해서 세상을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옛날 원시인들은 가정을 이루어 종족번식을 하여 지금의 인류가 있게 하였으며 새와 짐승들도 짝짓기를 하여 종족을 번식시키는데 요즘 산속의 자연인들은 혼자 살기 때문에 종족번식을 할 수 없어 원시인보다 못하고 동물적 본능과 인륜(人倫)에 反하며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자연인이다>의 출연자 중에는 결혼했거나 이혼한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은 예외적이다.
공자는 말 하였다. “인간이므로 인간사회를 버릴 수 없다. 사람은 금수같이 원시적 생활을 할 수 없다” 하여 인간이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은 자연인의 생활을 한번쯤 해보고 싶어 한다.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하나 있다.
얼마 전 뉴스에 우리나라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방송 프로그램 2위가 <나는 자연인이다>로 발표했는데 몇 년 전에는 1위를 기록한 적도 있으며 여자자연인이 나올 경우엔 1위의 시청률을 기록한다고 한다. 그 프로가 그렇게 인기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의 팍팍한 삶 속에서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자연인의 신선함이 삶의 생기를 느끼게 하며 많은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도시의 직장생활이나 자영업 등의 직장과 일터에 묶여 찌든 생활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도시생활에 팍팍함과 염증을 느껴 한번쯤 골치 아픈 사회생활과 도시를 떠나 산 속에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고 싶어하는 생각을 한번쯤 생각해 보기 때문이다.
나도 먹고 살기 위해 어쩌다 공무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나의 본성은 자연을 닮아 그런지 처음 공무원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조직생활이 맞지 않았으며 그 때 70년대는 공무원의 봉급이 박봉이라 인기가 지금처럼 좋지 않아 지원자가 그리 많지도 않았으며 재직 중에도 하시라도 다른 직장을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틈만 나면 다른 직장을 기웃거려 이직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뜻대로 되질 않아 그냥 주저앉아 공무원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무원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정신은 늘 자연인이었다. 조직의 사회생활과 자연의 정신이 충돌하여 언제나 표리부동한 마음이 불편하여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괴롭혔다. 속과 겉이 다른 의식구조로 살기 때문에 조직생활에 만족할 리 없어 불행한 삶이었다.
조직의 생리가 맞지 않아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지도 못하고 승진은 매우 늦어 자존심을 상할 정도로 후배가 나를 추월하는 지경에서는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재직 중의 근무시간에는 책상유리판 밑에 복사한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전문의 시를 하루에도 몇 번씩 읽으며 마음을 달래면서 자연인의 전원생활의 꿈을 키우면서 편치 않은 공무원생활을 안위하였다.
그리하여 연금혜택이 주어지는 정년 10년을 남겨 놓고 아무 대책 없이 명예퇴직을 하였다. 그것도 경제난으로 모든 국민들이 힘들어 했던 IMF때 겁 없이 안정된 직장인 공무원의 길을 내려놨다니 내가 생각해도 조직생활이 내 성격과는 맞지 않아 많은 염증을 느껴 연금혜택이 주어지는 첫 해에 앞 뒤 안 가리고 명예스럽게 명예퇴직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토록 그리던 전원마을 속에서 자유스러운 자연인이 되고 싶어 내가 전원주택을 찾아다니기로 하였다. 주로 강원도와 경북의 공기 좋고 물 좋은 오지마을을 나 혼자 신이 나서 찾아다녔다. 거의 1년 가까이 찾아 다녀 보았는데 마땅히 맘에 드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경관이 좋은 전원주택을 찾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느낀 게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찾는 대부분의 자연경관의 집들은 한결같이 산 속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외로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곳이어서 우울한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는 곳이었으며 범죄의 위험에도 매우 취약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자의 말씀처럼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혼자 원시인처럼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전원주택을 찾아 헤매는 걸 중단하고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의 아파트에 그냥 눌러 앉아 살게 되었다. 뒤 늦게 깨달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전원생활을 하지 못하고 서울의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이 잘 한 일인지 못 한 일인이지는 판단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분별은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대적인 분별에 따른 평가나 판단은 절대적인 것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자는 원칙적으로 모든 상대적인 분별에서 오는 가치판단을 부정하였다. 전원생활이나 도시생활의 좋고 나쁜 평가나 판단은 절대적이고 완전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것들은 모두 만물의 변화과정 중에 드러나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사물의 참된 성질이나 가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인생만사는 새옹지마=새옹득실=전화위복이다. 노자의 말처럼 화(禍)에는 복이 깃들어져 있고, 복에는 화가 숨기어져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새옹지마인생이었던 나의 단적인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1999년도에 명예퇴직 할 때 연금 외 별도의 명예퇴직수당 5천 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에 조금 더 보태 1년 후인 2000년도에 상계동의 18평짜리 아파트 2채를 5천 만 원(비역세권)과 5천 5백만 원(역세권)에 샀는데 그 때 산 5천5백만 원짜리 아파트가 지금 4억 3천만 원이 되었는데 지금 그 두 채의 아파트에서 나오는 월 임대수입은 지금 6급 퇴직공무원연금의 반 정도의 금액이다. 아파트의 가격은 계속 오르니 전. 월세의 가격도 같이 오를 수밖에 없는데 공무원연금은 퇴직 할 때의 연금을 기본급으로 하여 매년 통계청장이 고시한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여 평균 1~2% 정도의 연금이 인상된다. 그것도 박근혜정부 때 공무원연금 특혜논란에 휩싸여 5년 동안 인상이 동결되었다. 아무 대책 없이 홧김에 명예퇴직 할 때 나의 처는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도 부정적이며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공무원 그만 두고 나가는 그 날로 개고생할 거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맞았다. 공무원은 싫으나 좋으나, 죽으나 사나 정년 때까지 복지부동(伏地不動)의 말대로 땅에 납작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아 변화를 거부하여 위험이나 위기를 싫어하는 무사안일의 자세로 공직 생활하는 게 최고의 상책이다. 그러니 공무원사회가 발전이 안 되며 이런 점이 관료제의 큰 병리현상 중 하나이다. 그저 근무시간만 죽이고 뭉기면 봉급과 연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바보 같은 위험한 모험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만 두고 나서 그 당시 내가 했던 일은 너무 힘들어 옛날 공무원생활이 그립도록 좋았었다. 중도에 명예퇴직을 한 것을 후회막급 하였다. 그러나 아직 우리 인생은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불확실하며 진행 중이다.
인생은 새옹지마와 같거늘 한치 앞의 일을 알 수가 없어 앞으로 행복과 불행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가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비슷한 경우의 다른 사람의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의 동료 한 사람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나처럼 정년 10년을 앞 당겨 그 당시 과천의 저층 17평 아파트 1채를 판돈으로 제주도에 땅을 샀는데 지금 그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18년이 지난 지금 40억 원에 팔라고 해도 더 오르다 하여 안 판다고 한다. 40억 원이면 현 은행이자 1.8%로 계산하면 이자 수입만 한 달 6백만 원 + 10년 일찍 그만두고 받는 6급 공무원연금까지 두 가지를 받고 있으니 그 금액이 얼마인가? 그리고 40억 원을 상가건물에 투자할 경우 지역과 위치와 건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6~10%정도라는데 최소 6%만 잡아도 월임대료 수입만 2천만 원이니 그야말로 대박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중도에 명예퇴직을 하지 않고 정년퇴직하였다면 현재 연금수령액은 2백 7십만 원 정도이다.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지만 이것이 인생 새옹지마, 전화위복의 인생역전 쇼가 아니겠는가?
며칠 전 뉴스에 공무원연금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 1위는 전직 헌법재판소장출신으로 월 720만원을 받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헌법재판소장이면 총리급인데 그때 당시에 그 동료직원이 6급 정년으로 퇴직하여 현재 받는 연금 수령액이 대략 2,700,000원 정도의 월수입만 가지고 단순 비교한다면 조금 무리는 있지만 6급>총리의 공식이 되니 이는 인생역전. 새옹지마로 사람팔자 알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그렇게 앞을 내다보고 대박이 난다는 사실을 알면 모든 사람이 직장을 다 때려 치고 대박이 날 사람처럼 제주도에 땅을 사면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에는 부자만 있고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1등만 있고 꼴등은 없는 이상한 세상이 된다. 그런 세상에서는 인간끼리 서로 싸우고 경쟁도 없고 재미도 없는 맹탕의 인간세상이기 때문에 신은 그런 점을 알기에 아무도 앞을 알 수 없는 새옹지마와 같은 인간세상을 창조하였다.
인간끼리 경쟁하게 하여 1등과 꼴등, 부자와 가난한사람들이 뒤엉켜서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고 죽고 죽이는 아기자기하고 복잡다단한 인간세상을 창조하였으니 참으로 신의 뜻은 위대하고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새옹지마는 앞을 알 수 없는 희비가 뒤바뀌고 교차되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곡예인생의 묘미의 뜻을 가져 불행하거나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갖게 하는 의미 있는 고사성어이다.
그러한 사실은 노자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화와 복은 같이 깃들어져 있다. 상대적인 분별은 어느 한 편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나 반드시 그 상대적인 상태로 되돌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화(禍)로서는 만족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재난으로서는 이득을 바라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렇다. 절대적인 행복은 인간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신은 인간세상을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창조하였다. 신의 뜻은 위대하다.
절대적인 절망은 없으며 그렇다고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도 없다. 잘 살거나 못 살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하는 것은 마치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다. 인간의 부귀영화와 몰락은 본래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고 서로 돌아 자리를 바꾸듯 인생은 수레바퀴이다.
대자연이 그렇듯 춘하추동은 서로 자리를 바꾸며 돌고 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은 갈수록 삭막하고 희망도 기대할 수가 없는 세상으로 이는 마치 산소 없는 어항 속에 갇혀 주둥이만 수면위로 내놓고 숨만 깔딱거리는 붕어 같다. 길을 가다가 아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묻지 마식의 폭행과 살인사건들의 뉴스들이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요즘에 그런 뉴스가 나오면 아예 리모콘으로 돌려 버린다. 썩은 비린내로 뒤범벅이 된 이놈의 바깥을 나서기라도 하면 불안하고 겁이 덜컥 나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과 아무 인연을 맺지 않고 산 속으로 기어들어가 자연인으로 살아 갈 수도 없는 세상이다.
혈연, 지연, 학연. 친구, 지인, 이웃들마저 관계를 말소하고 살 수는 없다. 나는 얼마 전에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자연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살다보니 외롭고 소외감을 느껴 몇 년 전에 학교동문의 카톡이나 카페에 가입하여 동문의 소식이나 듣고 글을 올려 주거니 받거니 하여 외로움과 우울 감을 떨치고자 카톡과 몇 군데 카페에 가입하여 소식도 듣고 글도 올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어 그마저도 만만치 않은 어려운 일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글을 올렸는데 학교 한 울타리 안의 어느 동기동창의 적(籍)에 있는 사람으로 나는 이름도 모르고 일면식도 없는데다 그것도 당사자도 아닌 제3자가 내가 쓴 한 줄의 글에 이유 없는 욕설을 퍼 붓고 물어뜯는 충격에 나는 수개월 동안 정신적인 공항장애에 시달렸고 그로 인하여 심적인 충격의 스트레스로 대상포진에 걸려 한 달 이상을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동문인 한 울타리안의 사람이어서 충격은 더 컸다. 그런 악성의 댓글을 다는 것은 길거리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이무 이유도 없이 묻지 마 폭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사람은 그까짓 것 가지고 무슨 공항장애이며 대상포진에 걸리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욕을 해도 끄덕 않고 독하고 모질게 사는 인간들도 있지만 나 같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도 있어 그런 사람들은 자존심만 건드려도 심적인 충격을 크게 받아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본시 마음이 여리고 모질지 못하여 다른 사람이 마음 상하게 하거나 모진 말을 들으면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으며 후유증도 오래간다. 요즘 뉴스에 의하면 악성댓글에 시달려 정신과치료를 받거나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 심정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런 악성댓글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충고 한 마디 한다. 원로가수 곽순옥이 불렀던 <성한 갈대를 꺾지 마라>라는 흘러간 노래가 있는데 나는 그런 악성의 댓글을 달아 아무런 이유 없이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못된 인간들을 향하여 “성한 갈대를 꺾지 마라” 고 충고한다.
충고를 무시하고 그래도 성한 갈대를 꺾으면 그 꺾인 갈대로 후려쳐 그 갈대로 맞은 맛이 어떤가? 하고 묻고 싶다.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마음속의 뜻을 성실하게 함은 자신을 속이지 않음이다.
악취(惡臭)를 싫어하듯이 악을 미워하고 미색을 좋아하듯이 선을 좋아하듯이 선을 좋아하니 이를 자겸(自謙)이라고 한다. 고로 군자는 자신을 신중하게 한다. 즉 자기 혼자만이 아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이 말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자기를 수양하려면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곧 마땅히 자기의 힘을 성실하게 쓰고 아울러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 즉 악을 미워함을 악취를 싫어함과 같이 하고 선 좋아하기를 미색 좋아하듯 하고 모든 것을 본성으로 바탕으로 결단하고 반드시 선을 얻고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함부로 구차하게 밖이나 남을 위해서 마음이나 힘을 쓰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성실한 것이지 아닌지는 남들은 알 수 없고 자기 혼자만이 안다. 고로 자기 혼자만이 알 수 있는 자신의 깊은 마음가짐을 신중하고 성실하게 지닌다. 즉 자신의 속마음이나, 자기 홀로 있는 경우에도 자기의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을 신중하게 한다.
그 뒤로 나는 다시는 가깝거나 절친한 어떠한 세상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나 틀 속에 들어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기로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만의 자연인으로 살아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살다보니 자연스레 삶은 외로웠다. 그러나 그래도 그게 마음의 스트레스가 없어 마음고생을 하지 않으며 통증도 없이 살아가니 차라리 외로운 생활보다 훨씬 낳다. 맘 편하게 사는 게 최고 아니겠는가.
지금의 현대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별의 별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조직과 틀에 얽히고 설켜 살면서 사람의 행실을 제대로 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으며 여간 골치가 아프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세상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 자연인으로 자연의 생각과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조차도 힘든 세상을 맛보았는데 그 입맛은 매우 씁쓸하였고 마음은 제정 러시아의 잿빛하늘과 같이 우울하고 기분이 더러웠던 기억은 좀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도 어찌 하겠나? 그것도 내가 한 때 잠시나마 머물렀던 세상살이의 한 일부분이거늘 세월의 흐름에 흙탕물을 가라앉히듯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것도 안 된다면 정말 첩첩산중으로 기어 들어가 그야말로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외치고 자연인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요즘 세상 사람들을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롭고 우울하다는 말들을 한다. 게다가 경제는 점점 어려워 먹고 살기 힘들다고 푸념한다.
그런 부침(浮沈)의 정도는 세월이 흐를수록 심해지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깊어져 가는 것 같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에 세계경제대국으로 발 돋음 하였지만 빨리 이룩한 경제대국의 그늘엔 노인자살률 OECD국가 중 1위의 오명이 드리워져 있다. 노인자살률 1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노후대책이 없는 경제적 어려움, 고령의 질병, 孝와 禮의 붕괴와 핵가족의 산물로 인한 고독과 우울증 등 여러 가지가 뒤엉켜 결과적으로 NO 人이 되버려 인간 & 노인 모두 아니기에, 노인의 인간을 하직하는 이유이다. 지금의 노인들은 운수가 안 좋아 시대를 잘못 태어난 시대적 희생양의 불쌍한 노인들이다.
국가는 부정부패로 시끄럽고 사회는 문란하고 사람들의 인심은 흉흉하고 분노에 찬 사람들과의 관계는 무섭고 머릿속이 어지럽고 골치가 아프고 자연인조차의 삶마저 살기 힘들면 그냥 차라리 오염된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다 청산하고 마음속으로 도연명의 시속에 나오는 무릉도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정신계(精神界)의 자연인으로 살면서 남은 삶을 관조(觀照)하며 살아가고 싶다.
어느덧 머리에 섞인 백발은 살아 왔던 날보다 앞날이 짧음을 느끼게 한다. 어느덧 내가 할아버지, 어르신 소리를 들으며 공짜지하철의 경로석에 앉아가게 되었으며, 젊은 사람에게 자리 양보를 받기라도 하면 손사래를 치며 내 마음속으로는 “언제 내가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에 삶의 무상함과 자기소외(自己疏外)감에 이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꼴이 오늘날 나의 자화상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추사(秋士)는 비(悲)”라 하는데 요즘같이 겨울을 재촉하는 11월 늦가을의 찬바람이 메마른 가지를 훌쳐 낙엽이 떨어져 길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거리를 걷기라도 하면 생명을 다하고 떨어져 뒹구는 낙엽이 마치 남아있는 나의 앞날과 같아 삶의 덧없음에 마음이 심란하고 사나워 마음을 추스르기 힘든 것은 내 마음이 유난히 여려 추사(秋士)의 비(悲)를 더 깊게 느끼는 이유인 듯하다.
오늘같이 가을밤에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엔 살아생전에 다섯 자식들에게 효도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 천수를 누리지도 못하고 중도에 삶을 마감하고 불쌍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각이 떠올라 슬픔이 북받쳐 오를 땐 삶의 질곡(桎梏)속에 갇혀버린 나는 우울감에 미쳐 어떤 때는 그냥 울고 싶은 비감(悲感)에 몸부림친다. 이런 날엔 자작 술에 흠뻑 젖어 도연히 취하여 괴롭고 심란한 마음을 녹여버리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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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날의 삶은 주판알을 재빨리 튀길줄 알아야 괜찮은 삶을 사는것 같음을 느낀다. 재테크도 중하고 노후대비도 중하지만
어릴적 부터 필요한 양을 나누어 쓰는 경제관념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건 아닌지 지난 태풍에 갇혔던 '사이판'의 관광
객이 4000명의 한국인 있었다는데 사이판의 면적을 보니 115평방키로미터라는 조그만 섬에 왠 한국인이 몰려 국가적 관
심사로 그들을 데리고 와야할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안의 지방경제를 좀 살려주려는 마음으로 지방의 조용한
곳에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들 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던걸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