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생각은 하면서도 소식 한 자 적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그렇게 웃지 마세요... 정말이에요... 늘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요...
여느 명절과 마찬가지로 지난 한가위에도 춘천을 다녀왔습니다.
팔당대교를 건너 양수리로 들어가 서종을 지나 신청평대교로 가자고 했지요.
제가 길눈은 어두워도, 막히지 않는 길을 짚어내는 능력은 있잖아요.
시간대가 잘 맞아준 것인지, 아니면 정체를 예측해내는 제 신통력(?) 때문인지
추석 전날임에도 수월하고 시원하게 갈 수 있었답니다.
그 길은, 20년 가까이 오간 길이지만 언제 달려도 새롭고 아름답습니다.
지금은 카페와 숙박업소들이 요소요소를 잠식하고 있어
옛날의 그 소박하고 호젓한 맛을 누릴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한껏 멋을 부릴 만큼 부려 지은 건물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런 대로 심심찮게 눈요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시어머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는 자주 들락거렸지만
당신이 가시고 난 후에는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과 기제사 때나 잠깐 손님처럼 들르곤 할 따름인데도, 큰댁에 가는 일은
4형제 중 막내며느리인 저로서는 어쨌거나 조금은 짐이 되고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모의 역할은 단순히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부터
무덤 속에 들어앉아서도 형제 간을 묶어놓는 일까지 참 끝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둘째 형님은 이태 전 돌아가신 시숙을 모셔야 하고, 셋째 형님은 식당을 하시기 때문에,
4형제라곤 해도 차례 전에 큰집을 가는 며느리는 막내인 저밖엔 없습니다.
대부분 큰형님이 마련해놓으시므로, 저는 제 담당인 잡채를 준비하는데
올해는 우연히 썩 좋은 참조기를 구할 수 있어 한결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렇게 이틀 동안 큰형님과 둘이 이것저것 음식을 장만하고 차례상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 역시 사람마다 그릇이 다르다 ] 는 것입니다.
옹졸하고 소심해서 제 가족 챙기는 일만도 버거운 저는
대접처럼 넉넉한 큰형님의 포용력과 인내심을 따를 수 없으니
맏이와 막내가 가진 그릇의 크기는 하늘이 정해준 것이 아닌가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제가 맏며느리 되지 않은 것이 진심으로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됨됨이에 맞추어 천상 간장종지만한 막내 자리를 주신 하느님이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평온한 명절을 지내고 집에 돌아온 식구들은 남은 연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의논 끝에 우선 영화부터 한 편 때리자고(?) 중지를 모았지요.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저녁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휘황찬란한 코엑스몰을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아이쇼핑도 하였습니다.
고2인 아들녀석은 다소 터프해 보이는 남방이 맘에 드는 눈치였지만
7만 원이라는 가격을 보고는 제풀에 꼬리를 내렸고,
딸아이는 알록달록 색깔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쿠션을 탐내기에 사주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동티가 날 줄이야......
그야말로 몇 년만에 온식구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바로 거기서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쿠션을 내내 끌어안고 영화를 보고나온 딸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오빠도 똑같은 것을 선물 받았는데 저도 갖고 싶었다고 종알댔습니다.
그런 걸 본 기억이 없어서 옆에 걷고 있던 아들녀석에게
[ 그래?? 현아, 어느 친구가 그런 쿠션을 너한테 선물했니?? ] 하고 물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 제 발목을 사정없이 잡아 세운 것은
[ 말할 수 없어요 ] 라는 단호한 대답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인 내가 그저 단순히
누가 선물을 했느냐는 의례적인 질문을 했을 뿐인데 말할 수 없다니...
갑자기 가슴 한 귀퉁이가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애써 황당함을 감추며 [ 왜? 엄마가 네 친구 이름도 알면 안 되니? ] 라고 재차 묻자,
아들녀석이 빙글거리며 툭 던지는 또 한 마디는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 제 사전엔 그런 걸 알려주는 법이 없어요 ]
[ .................................... ]
더 이상 물어볼 말도, 다그칠 기운도 없어서 저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서운해서 눈물이 다 찔끔 나려고 하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의 분위기는 갈 때와는 달리 그야말로 썰렁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재미없는 농담으로 웃기려 했지만
도저히 맞춰줄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고집을 피우며 중간에 내리고 말았습니다.
만류하던 남편도 한숨을 쉬며 포기했고,
두 아이는- 특히 아들녀석은 어쩔 줄 모르고 쳐다만 보고 있더군요.
온종일 내리던 비가 밤 11시가 다 되도록 긋지 않고 있었고
쏟아지는 비 속에 혼자 우뚝, 길 잃은 사람처럼 한동안 망연히 서 있다가
허적허적 근처 찻집을 찾아들어갔습니다...
저도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습니다.
공부는 썩 잘 하지 못하지만, 바로 그날 오전까지만 해도 아빠, 엄마의 말에
거부의사를 표시해본 적이 없는 착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느끼는 서운함과 배신감은 더더욱 컸을 거라고 나름대로 분석도 해보구요.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언짢은 일이 있었어도 내색을 잘 안하는 아이여서
때로 좀 답답하고, 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적잖이 궁금하기도 했었지요.
티비 광고에서 컴퓨터를 배워 아들이랑 대화를 시도하는 어느 엄마를 보면서
그런 고민을 하는 게 나만은 아니구나... 위안을 받기도 하면서...
18살... 아들이 이제 제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는 걸
누누이 제 자신에게 주지시킨 다음, 천천히 빗속을 걸어 집으로 갔습니다.
자정이 넘어 아이들은 제 방에서 잠들었는지 조용하고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어린애처럼 삐져서 좋던 분위기 망쳤다고 핀잔을 들었습니다.
모처럼 즐거웠던 시간을 상큼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게 미안해서
묵묵히 들어 넘기는 걸로 사과의 표시를 대신했지요.
침대 위에 예쁜 상자가 놓여 있어 열어보니 문제의 그 쿠션이 들어 있더군요.
그리고 편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의 반응에 놀란 아들녀석이 아예 통째로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는데
그 상자를 보자 간신히 다독여 누른 마음에서 다시금 서운함이 비죽비죽
고개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아들과 좀더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고
아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건데
마치 아들에게 엄마라는 특권을 이용해 강요한 것처럼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면서도 편지를 볼지 말지 잠시 망설였습니다.
냉정한 이성은 아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자며 뜯어말렸지만
제 손은 어느 사이엔가 편지를 꺼내 펼치고 있었습니다.
빛 고운 편지지에 갖가지 색으로 아기자기 모양내어 쓴 예쁜 글씨가
두 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더군요.
이메일이 생활화된 요즘, 정성스레 써내려간 육필편지를 읽는 감회는 또 남달랐습니다.
그리고 팔랑~ 증명사진도 한 장 떨어졌습니다.
물론 여학생이었지요.
선이 가늘고 갸름한 얼굴의 여학생은 [ 사진이 남아돌아 네게 준다 ] 고 썼더군요~ ^^
저였다면 웬만하면 사진은 빼고 주었을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편지도 -
그런데 사진까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을 보자 고지식하고 착한 아들녀석에게
너무 심했다는 자책감이 마구 저를 괴롭혔습니다.
* * * * * 그 날 밤 깊도록, 저는 아들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다음 날 아침, 늦잠 자는 저를 가만히 흔들어 깨운 아들녀석은
멋쩍은 웃음을 띠며 축구하러 간다고 고하더군요.
제가 늘 강조하는 [ 出必告 反必面 ] 을 잊지 않은 게지요.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에 엄마가 그렇게 화를 내리라곤 생각하지 못해
저으기 당황하고 놀랐을 텐데, 편지도 미처 읽지 못했을 텐데,
밝고 깨끗한 웃음을 보여주는 아들이 얼마나 고맙고 또 대견하던지요...
철딱서니 없는 엄마가 되어 아들을 바라보니, 팔불출이라 해도 좋으니
내 아들 착하고 잘 생긴 것 좀 보라고 큰 소리로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이젠 그저 아들녀석이 내킬 때 조금씩 해주는 이야기로 만족하고
미루어 짐작하자고, 더 이상 서운함을 키우지 말자고 다짐했답니다.
그런데 정말 못 말릴 일은...
그 여학생에 대해서 궁금한 게 너무 많으니 어쩝니까...
그대...
누구든 때가 되면 제 곁을 떠나간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끈끈히 미련을 두고 애간장을 태운들 그 때가 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요...
제가 보기엔 너무 행복해 보일 뿐 입니다...저에게 6학년짜리 딸이 있답니다. 바로 어제 일 입니다. 처음으로 딸에게 체벌을 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 봤답니다. 엄마 아빠가 그렇게 미웠냐고? 절데로 그런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왜 그랬냐고 그랬냐고 묻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구요..
* * * 제게도 13살짜리 딸이 있습니다. 솔직히 아들녀석은 좀 만만한데 요 딸년은 영 애물단지에 속수무책입니다. 계집아이들이 사내아이들에 비해 올되는 편이라 그런지 생각도 더 많은 것 같고 자기 주장도 세네요. 그런데 봉섭님, 우시기까지 하다니... 겉보기보다는 의외로 연약한(?) 심성을 갖고 계신가봅니다...
첫댓글 님도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늙어지면 샘도 많아지고 심술도 많아지고 그런다고 하네요..저도 얼마전에 아들놈한테 한방 먹었다는 거 아님니까....ㅋㅋㅋ 그 옛날 울아바지는 주먹 한방으로 해결했는데 그럴 수도 없고...그저 허허 웃을수밖에...
앞으로 점점 더 마음을 비워야 할거야.... 그리고 아들만의 비밀 하나쯤은 간직하게 두면 어떨지? 그래도 착한녀석 같아서 남의 아들이지만 대견한 늠....하면서 혼자 웃어본다..
내가 살아온 지난 날 보다 내 아이들이 살아갈 날들이 더 치열한 경생사회 일 것 같아서 학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오는 아이들을 보면은 괜시리 마음이 아파오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
난 아들이 없어서 그런 감정을 못느끼는 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이 드네요. 든든하죠?.
* * * 아이도 자라지만, 저도 아이 때문에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영철님이나 병준님께선 그래도 개화(?)된 아빠라서 아들들과 잘 통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저는 가끔 남편과 아들이 쑥덕대는 걸 보면 샘이 납니다~
* * * 그리고 막대기님(이상하다^^), 말씀대로 아들의 비밀을 더이상 알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다칠 거 같아서요~^^ 아들 부러워 하시는 은선님, 아직 늦지 않았답니다. 오늘부터 노력하세요~
님의 글을 읽으니 괜히 눈물이 나는군요. 가을이라서 그런 가봐요.
* * * 심사가 편치 않을 땐 아주 사소한 것도 눈물을 부르곤 하지요. 그럴 땐... 고인 눈물을 먼저 배수시키는 게 심신의 평정에 도움이 됩니다. 전 울고 싶을 때 진솔하게 울 줄 아는 남자의 눈물이 멋있습디다...
제가 보기엔 너무 행복해 보일 뿐 입니다...저에게 6학년짜리 딸이 있답니다. 바로 어제 일 입니다. 처음으로 딸에게 체벌을 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 봤답니다. 엄마 아빠가 그렇게 미웠냐고? 절데로 그런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왜 그랬냐고 그랬냐고 묻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구요..
어린 딸을 안고 한참을 울었답니다... 나름데로 사랑으로 살펴준거 같은데.. 무슨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갈수록 자식 키우는게 겁이 납니다...
* * * 제게도 13살짜리 딸이 있습니다. 솔직히 아들녀석은 좀 만만한데 요 딸년은 영 애물단지에 속수무책입니다. 계집아이들이 사내아이들에 비해 올되는 편이라 그런지 생각도 더 많은 것 같고 자기 주장도 세네요. 그런데 봉섭님, 우시기까지 하다니... 겉보기보다는 의외로 연약한(?) 심성을 갖고 계신가봅니다...
남자들이 다 그렇죠.. 뭐~ 겉으로 드러나는게 다는 아니거든요...
* * * 그렇군요... 조만간 그대의 감추어진 다른 모습도 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