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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동철 호흡법 수련원 원문보기 글쓴이: 숨박사
어머님을 생각하며
남 충 일
어머님, 어머님의 인자하신 목소리를 들어 본 지도 어언 15, 6년이
흘렀군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 떠나시고 난 후 2, 3
년간 어머님께서 거기 혼자 누워 계시면 외로우시고 추운 겨울에는 강
추위 때문에 힘 드실 것 같고, 더운 여름에는 후터분해서 지내시기 어
려울까 봐 걱정 돼서 잠을 못 이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짧은 기간에 어머님을 산소에 수십 번 찾아 뵙곤 했는
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요즘엔 어머님이 그렇게도 사랑하시고 아끼시
던 이 불효막심한 막내아들의 발길도 점점 뜸해지는군요. 야속하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정말 죄송해요,
뉘라서 자식 사랑을 하지 않고, 뉘라서 어버이 사랑을 느끼지 않을까만,
어머님의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모정(母情)이나 모성애 이상
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아들이 어찌 한시인들 어머님의 사랑을 잊으오리까.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사랑은 깊고 가없게 느껴지게 마련이지만 이 아
들이 느낀 어머님의 사랑은 깊고 가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따뜻하고
은근하고 잔잔하면서도 또 끈적끈적했습니다.
어느 시문이나 노래말의 사모곡(思母曲)도 어머님께서 이 아들에게 베풀
어 주신 사랑을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사랑은 언제나 가슴으로 하는 사랑인 동시에 행동으로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런 일 저런 일이 뒤죽박죽으로 얽히고 설켜
서 주마등처럼 아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오늘은 모처럼 어머님과
오랜만에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으니 그 중 몇 가지만 되새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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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의 기억은 너무 아련하고, 아들이 좀 성장한 다음의
일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어머님과 아들이 청량리에서 셋방살이
하면서 아들이 대학 다닐 때였지요.
어머님이 모처럼 춘천 큰아들 집에 들르러 가셨다가 당일로 부랴부랴
돌아오신 적이 있었지요. 3, 4일은 묵으실 거라 하시더니 서둘러 되돌
아오신 까닭은, 춘천에 도착하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불현듯 밤이면 셋집 툇마루에 올려 놓고 자는 막내아들 구두가 비에
젖겠다는 생각이 나서 걱정되셨던 거지요.
한데 막상 돌아와 보니 서울에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었지요.
단 한 켤레 밖에 없는 신이 젖어버리면 아들 학교 못 가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거지요.
신발 얘기가 나왔으니 마저 말씀 드릴게요.
아들이 학교 다니는 4년간 등교 길의 아들의 발이 시리다고 겨울이면
아침 구두를 연탄 아궁이 위에 올려 놓고 따뜻하게 데워서 신게 해
주시지 않았어요.
그 뿐인가요. 저지대라 물기가 스며들어 연탄불이 잘 꺼지곤 했는데,
그런 아침에는 구두를 신문지에 싸서 미지근한 방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두거나, 몸에 품고 계셨다가 냉기가 가신 다음에야 신고 가게
해 주시잖았어요.
어머님의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따뜻한 사랑이었고, 행동으로 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요즘도 신발을 신을 적마다 어머님 생각이 나서 목이 메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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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대학 1학년 때. 아직 볼펜은 나오기 전, 만년필이 아주 귀
할 때였지요. 미제 파커 잉크(잘 얼지 않음)는 살 엄두도 못 내고 싸구려
염료를 타서 만든 국산 잉크와 철필을 가방에 넣고 학교 다녔는데 엄동
설한에 학교 가는 동안 잉크가 얼어서 철필로 찍으면 멀건 물만 찍히고
써지질 않았지요.
그래서 「만년필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혼자말을 뇌는
것을 어머님께서 엿들으시고 「그거 얼마면 사냐」고 물으시기에 3, 4천
환도 넘어 할 것이고, 중고품도 천 5, 6백 환은 할 터이니 엄두도 못 낸다
고 말씀 드렸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있은 지 아마 1년 반도 족히 된 어느 날 어머님이
천7백 환을 아들 손에 넌지시 쥐여 주시면서 만년필을 사라고 하시잖
았어요. 그 때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고 해 가며 버시는 어머님의 수입
이 하루에 백 환에도 못 미첬 으니 그게 얼마나 큰 돈인가요.
눈물이 왈칵 쏟아져「저 만년필 없어도괜찮다」고 울먹이며 아룄었지요.
결국 어머님의 강권에 못 이겨 천 6백 환인가 주고 중고품 파커 만년필
하나를 사서 유용하게 쓴 일이 있지요.
아들 공부에 지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천신만고 끝에 마련하신 돈이잖
아요. 어머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끈적끈적해서
요즘도 펜을 잡으면 뼈에 사무치게 그 때의 일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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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앞두고 아들이 뒤늦게 벼락치기 취직시험 준비를 한다고
한 달 동안 새벽 1시부터 아침까지 공부할 때였지요. 본래는 밤 12시부
터 하기로 하고 어머님께 12시 정각에 깨워 주시도록 부탁했었는데 12
시에 깨울 적마마「아들이 너무 곤이 잠들어, 깨기 힘들어 하는 게 안
쓰러워 10분만, 20분만 더 자게 해 주자 」고 말미를 주시다가 그만 30
분, 1시간이 늦어지곤 했고 결국 1시부터 하게 된 것을 못내 안쓰러워
하셨지요. 아들은 깨워도 바로 깨지도 못하는 주제에 제때 안 깨웠다
고 도리어 불평을 늘어놓곤 했었지요. 이런 작은 일에까지 미치는 어
머님의 사랑은 개울물 흐르듯 잔잔하고 애잔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쯤이었지요. 그 때의 우리 형편으로는 일년 내
내 센베이 과자(煎餠) 한 개도 입에 넣어 볼 처지가 아니었지요. 그런
데 어머님께서는 공부하다 졸리면 먹으라고 없는 돈에 그 비싼 "오리
온 드롭프스" 한 봉지(약 30개 들이)를 살짝 아들 책상 위에 놓아 주시
곤 했었지요. 드롭프스를 무척 좋아했지만 한 봉지에 몇 십환이나 하
는 것을 어떻게 사 먹을 꿈인들 꾸었겠어요. 어머님께서는 다 큰 대학
아들에게 과자를 계속 대 주신 거잖아요. 어머님의 사랑은 이렇게
손에 잡힐 듯 말 듯 은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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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신경성 편두통으로 학교도 2, 3개월씩이나 쉬고 완치 때
까지는 1 년 이상 걸렸던 적이 있었지요. 어머님께서는 여기저기 수소
문하셔서 아들 병에 좋다는 온갖 민간 양밥(良法→處方)을 다 해 주시
고 용하다는 약국의 한약을 다 지어 주셨는데 무슨 수로 그 많은 약값
을 다 치르셨는지…….
처음에는 날달걀이 병에 좋다고 하루 두 개씩 날로 먹게 하셨다
가, 그 다음에는 쇠골과 등골이 좋다는 말을 듣고 오셔서 그것을 날로
깨소금을 찍어서 조석으로 먹게 하셨는데, 냄새 때문에 날로는 장복을
못하고 익혀서 먹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머님께서는 동네 푸줏간과
약조를 했다고 하시면서 1년간이나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아들에게 쇠
골을 먹이지 않으셨습니까.
마침내 아들의 병이 나았는데 그것은 쇠골의 효험이 아니라 어머
님의 정성이 탁효(卓效)를 발한 것임을 아들은 잘 압니다. 예나 지금이
나 비싸기 이를데없는 쇠골을 1년 내내 지속해서 먹인다는 것은 그 때
의 우리의 찌든 살림을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해같이 넓은 어머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어느새 감읍(感泣)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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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들이 취직하고 나서의 이야기 좀 할게요. 비타민 등 영양
제가 한창 유행했을 때인데, 노인께 효험이 좋다고 해서 어머님 드시
라고 비타민제를 사다 드렸더니,"왜 늙은 어미한테 괜한 돈 쓰나, 내
가 그런 걸 먹어 뭘 해! 늘 일하느라고 피곤하다면서, 아범이나 먹게
나!" 라고 하시면서, 아무리 사정해도 굳게 사양하시고 드시지 않으셨
지요. 어머님의 뜻인즉, 약을 먹으려면 나이든 사람이 먹을 게 아니라,
일 나가는 젊은 아들이 먹어야 하고, 아들의 돈이라면 무조건 아껴 주
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매사에 어머님은 아들을 우선시키셨습니다. 어
머님의 마음 속에는 자식에 대한 가없는 사랑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
어 이런 작은 일에까지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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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간간이 용돈을 드리면, 꼭 "나 돈 필요없다, 아범도 돈 없
을 텐데!" 하시면서 언제나 사양하시고 어쩌다 한 번 밖에 받지 않으셨
는데, 가끔 양복을 갈아 입으면 옆주머니에서 낯선 돈이 몇 만원씩 손
에 집힐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이불장의 이불 틈새에서 꼬깃꼬깃
접은 돈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어머님께 드린 돈을 안 쓰시고
아들 며느리 아쉬울 때 쓰라고 되돌려 주신 거잖아요.
그리고 어머님의 돈 쓸 데라는 게 고작해야 아들 딸 집에 들를 적
에 갖다 줄 물건을 사는 데에 쓰신 거잖아요. 심지어는 생활이 좀 궁한
환갑도 넘은 아들의 담배까지 손수 챙겨 주시지 않았어요. 억지로 받으
신 돈도 되돌려 주시거나 자식들을 위해 쓰셨으니, 실제로 당신을 위해
서는 한 푼도 쓰지 않으신 거지요. 그러기에 돌아가셨을 때 어머님 수
중에 남은 돈이 몇 만원 밖에 되지 않았었지요. 어머님의 이 같은 깊고
가없는 사랑을 되새기노라면 아들의 가슴이 미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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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은 91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뜨실 때까지 아들과 함께 탈 때
이외에는 거의 한 번도 아들의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에게 누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과 아들의 돈을 아껴 주는 것도
아들 사랑의 길이라는 확신이 어머님 마음 속에 요지부동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이태원 딸 집이나 좀 먼 일산의 큰 아들 집
에 가시는 데도 반드시 버스나 기차를 이용하셨습니다. 노령이라 버스
를 잘못 타거나 하차 정류장을 지나치기 일쑤였고, 기차를 잘못 타셔서
멀리 인천이나 천안까지 갔다가 승무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서울역에 되
돌아 오신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요.
그래서 나들이 하실 때에는 아들에게 하명하시면 아들 차나 택시
로 안전히 모시겠다고 아무리 간곡히 말씀 드려도 언제나 굳게 사양하
시고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늙은이 반 값이면 기차를 타는데 뭣 하러 아범 차를 타고 그 비싼
택시를 타나." 라는 말씀에 "제 차로 모시면 돈 한푼 안 들어요, 어머
님." 하면, "회사 돈은 돈이 아니냐." 고 막무가내였습니다. 어머님의
바다같이 깊고 은근한 사랑은 이렇게 미치지 않는 구석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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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일로 국내외 출장을 떠날 적마다 어머님께서는 반드시 막내
아들 집에 계셨습니다. 어디에 계시든 막내아들 출장 가는 날에는 집
에 꼭 돌아오셔서 아들의 장도를 축복해 주시고, 차ㆍ비행기 조심하라
는 주의 말씀 주시고, 아들은 큰 절로써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곤 했습
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1989년 2월 미국 회사와의 상담 때문에 싱가
포르에 갈 때만은 집에 오지 않으셔서 허전하기도 하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는 예를
거른 적이 없었으니까요.
상담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게 다 어머님 은덕이란 농담까지 한
다음 날 아침 6시에 울린 전화벨이 청천벽력 같은 어머님의 사망 소식
을 전했을 때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슬픈 일이
……. 그렇게 정정하시던 어머님이 어떻게 이리도 황망히 가실 수 있
단 말입니까. 불과 2주일 후로 예정된 아들의 「대표이사 사장」취임
도 못 보시고 그리 서둘어 가셨나이까. 불초 막내는 끝내 어머님의 임
종조차 하지 못 하고 돌아가신지 3일 후에야 귀국하지 않았습니까. 나
중에 안 일이지만 돌아가시던 날 점심 때쯤 운동 삼아 큰아들 양말 몇
켤레 빠시고 나서 점심 식사하신 것이 급성식체로 이어져 고령으로 쇠
잔하신 몸이 그것을 극복 못하고 불과 6시간만에 인근 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셨다니, 이렇게 원통하고 허망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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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아들이 지금껏 어머님께 불효를 한 일이 한두 가지이겠
습니까만 그 중에서도 특히 죄스럽고 한스럽게 생각하는 일이 두 가지
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부산에서 거행된 아들 혼례식에 어머님을 모
시지 못한 일입니다. 만사 제쳐놓고 어머님을 모셨어야 도리인데, 안
가시겠다고 막무가내로 고사하시는 어머님의 말씀만 믿고 모시지 않은
것은 아들의 큰 불찰이었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어머님 마음 속으
로는 막내아들의 결혼식을 얼마나 보시고 싶었겠습니까. 한데 근근이
치르는 혼사라 아들 비용 더 날까 봐 짐짓 내색을 하지 않으신 것임을
미쳐 몰랐습니다. 어머님, 아들의 큰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는 우리 자식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20여년을 사신 어
머님에게는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인 일본 큐슈(九州) 히가시쿠
니(東國東)의 키베(岐部)에 어머님을 한 번 모시지 못한 일입니다.
아들은 몇 번인가 다녀 왔고 어머님 생전에 꼭 한 번 그 곳에 모시겠
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벌써 그 곳의 많
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지만, 어머님, 그 때 그 곳의 이웃 사람들
소식을 얼마나 궁금해 하시고 만나 보시고 싶어 하셨습니까. 이 아들
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때는 해외여행이 자
유롭지 않았다는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
니다.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 ∞∞ ∞ ∞∞ ∞
어머님, 어머님과 함께 옛일을 이것저것 생각하자면 몇날 며칠이
걸려도 한이 없을 거예요. 지난 일을 뒤돌아보며 글을 쓰려니 눈물이
앞을 가려 더 키 보드를 누를 수가 없습니다.
어머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만 줄일게요. 요즘에
는 바깥이 더우니 어머님 계시는 곳이 도리어 시원할는지 모르겠네요.
부디 편히 쉬세요. 감기 들지 마시고요. 쉬 한 번 찾아 뵐게요.
2005. 7. 9. 이른 아침
어머님을 못내 못 잊어 하는
막내아들
첫댓글 저도 어머님 과 이별 한지가 11년재가 되며 나도한 5남매 중의막내로서 제가 미국에서 25년간 모시다가 1995년 에 워싱턴에서 돌아가셨지요! 문남상 님 의 마음 을 읽을 수 잇을것 같읍니다, 우리 카페에 한번 싫렸었던 글이지만 "문남상 님과 나누고 싶어서 답글 에서 다시 올립니다.
문남상님 제 카페에서 옮기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의 사랑은 하회와같죠, 항상 자식을 그리워 하면서도, 자식들이 사느라, 바쁘고 힘드니까 하시며 그리워도 내색도 안하시는 그런 고귀한 사랑의 어머님이시지요.
내가 4살때 혼자되셔서 무남독녀로 어려운 살림속에서 키워주신 어머님 결혼후에도 남편과 두아이들을 위해 아끼지않고 헌신하신 우리어머니 15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이 여전이 흐르네요. 내가 어머니되니 더욱 안타깝지만 사람은 후회하며 사는가봅니다. 자식은 빚만 지게마련 그래 내려 사랑이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