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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물과 피로 두 번 임하신 주님
물과 피로 두 번 임하신 주님
(요한 1서 5:6-8)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이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이다.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니라”
처음 물과 피는 성육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 물과 피 가운데 태어납니다. 두 번째 물과 피는 각각 침례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십자가에서의 죽음 하나로 말할 수 있습니다(요한 19:34). 성령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요한 20:22)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물은 1층천의 자연적 진리를 가리키고, 성령은 2층천의 영적 진리를 가리키며, 피는 3층천의 천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물은 침례이고, 피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고, 성령은 부활입니다. 주님은 침례를 통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그 공생애에서 사람들에게 자연적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천적 진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과 죽음을 통해서 가르치셨고 영적 진리는 부활 후 제자들과 40일 동안 동행하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사도행전 1:3).
주님은 성경말씀에 의하면 성육신으로 한 번 강림하셨고, 부활로서 두 번 강림하였습니다. 초림과 재림으로서 말할 수 있는데, 제자들이 인성으로 계시는 – 재세시의 - 주님과 신령인성으로 계시는 – 부활하신 - 주님을 보았듯이 교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처음 만나는 주님은 인성으로 계시는 주님입니다. 두 번째 만나는 주님은 신령한 인성으로 계신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말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복음을 듣고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정확하게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이해를 갖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역사적인 것이고, 부활은 초역사적인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지요. 성경말씀에는 속뜻과 겉뜻이 있습니다. 인성의 주님은 성경말씀의 겉뜻에 상응하고, 신령인성의 주님은 성경말씀의 속뜻에 상응합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외적인 우리들이 처음 만나는 주님은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입은 주님입니다(우리와 같은 사람).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의 겉뜻 곧 문자적인 뜻의 따른 주님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지요(다른 경전들과 같은 취급).
겉뜻은 사람에게 먼저 옵니다. 외적인 것이 먼저 시각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머릿속에 저장됩니다. 시간적으로 먼저 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속뜻은 목적의 측면에서 먼저 옵니다. 시간적으로는 뒤나 목적으로는 먼저로서 첫째 즉 장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첫째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외모이고 외모에서 풍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귀어 교분을 쌓다 보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마음 또는 인격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치 있는 것은 영혼이지 육체가 아닙니다. 육체는 영혼의 수단입니다. 육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로서 말입니다. 내 미모를 사랑하는 남자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 어느 쪽입니까? 미모는 남자로 하여금 내 마음에 오게 하는 수단이지 그것이 다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말씀의 겉뜻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세계에 이르게 하기 위한 수단이자 사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자면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데 필요한 배와 같은 것이 성경말씀의 겉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겉뜻은 수단입니다. 그 수단의 목적은 수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단 너머에 있습니다. 처음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주님은 마리아의 아들이거나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공부하게 되면 주님의 대한 이해가 깊어져서 주님은 우리와 같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같이 성경말씀이 단순히 우주나 자연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하는 영적인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세상의 책들과는 질이 다른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간적으로 먼저 오는 것은 성경말씀의 겉뜻이고, 육신으로서 주님이며, 그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는 것은 목적으로 첫째가 되는 성경말씀의 속뜻이며, 부활의 신령한 주님이고, 그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시간적으로 먼저 오는 것은 외적이며 감관적이고, 지식에 속하여 기억지적이나 뒤에 오는 것은 내적이며 영적이고, 지각이나 깨달음에 속하여 합리적입니다. 믿음의 진리가 온 뒤에 그 믿음에 따른 행동이 옵니다. 믿음이 먼저 오고 사랑이 나중에 옵니다. 주님의 대한 믿음이 먼저 오고 주님의 대한 사랑은 나중에 발생합니다.
주님은 역사적으로 물과 피로 임하셨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다른 한 번은 골고다에서 입니다. 초역사적으로는 부활로서 성령입니다. 일반적으로 그것도 역사적인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부활은 시공간 밖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육부활이 아니라 영부활입니다. 부활체는 자연계에 속한 단순 육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후에 입는 영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몸이기 때문에 신령 본질적인 몸으로서 신령체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말씀의 겉뜻은 역사적이고 속뜻은 초역사적입니다. 즉 자연적인 뜻과 영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밖에 존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안에도 존재합니다. 자연계의 태양이 있듯이 영계에도 태양이 있습니다. 즉 우리 밖에 성경이 있고 태양이 존재하듯이 우리 안에도 성경이 있고 태양이 존재합니다. 주님은 밖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 안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적으로 밖보다는 안이 더 가깝고 본질적이지요. 천국도 지옥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누가 17:21). 밖에 존재하지 않지요.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외현입니다. 하늘 위에 계신 주님이란 사실 외현으로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말하지요. 마음 깊은 곳 말입니다.
성도의 거듭남은 주님의 성육신이나 부활과 연결이 됩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서 성도도 단계를 밟아가며 성장해 가는 것이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성령의 임하심과 아버지의 크신 능력으로 잉태(누가 1:35)되었듯이 성도도 그렇다는 것이고(성령세례), 또 주님이 물과 피로서 태어났듯이 그렇다는 것이고(교회 가르침 안에서), 부활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갔듯이 그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의 거듭남은 부활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부활 후에 비로소 성령을 제자들에게 발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 20:22, 눅 12:49,50, 요한 7:39). 부활 후 제자(교회)에게로 성령 발출이 주님에게 있어서는 마리아의 모태 안에 성령으로 잉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비로소 인성은 생겨났지요. 영원전이 아니고, 창세전도 아니라 오늘날에 처녀에게 잉태한 그가 바로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시편 2:7, 마태 1:23, 사 7:14). 마찬가지로 (요한 20:22)에서 그때 교회는 최초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성육신하였을 때 아버지의 크신 능력과 성령의 임하심으로 잉태하고 탄생하게 되었듯이(누가 1:35) 교회도, 부활 후 성령 발출하였을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의 탄생 과정을 보면 1. 십자가 처형의 산고의 고통(눅 23:54), 2. 3일 후 부활체의 형성(마태 28:1), 3. 성령 발출로 교회 탄생(요한 20:22), 4. 40일 동안 제자들의 영안과 영청을 열고 영적 감각을 활성화시켜 가르침을 주시고 승천(행 1:3,9), 5. 승천 후 10일이 지나 오순절 성령강림(행2:1-4), 6. 종합하면 부활 이후 50일이 지나서야 복음전파라는 것입니다. 7. 40일은 알다시피 시험/연단의 기간입니다. 홍수가 40일(창 7:4 베전 4:20), 모세의 40년(행 7:30), 주님의 광야 시험도 40일(마태 4:2)에서 알 수 있듯이 시험을 뜻합니다.
주님은 성육신 때 물과 피로 임하셨고, 부활 때도 물과 피를 쏟으시며 우리에게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교회도 동일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고, 물과 피를 쏟으며 탄생합니다. 교회 탄생은 (요한 20:22)에서의 성령세례입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아기가 태어나면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2:7절)의 아담 창조에서의 생기 주입과 같은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오순절의 불성령으로 인한 방언의 역사(사도행전 2:1-4)는 말하자면 아이가 성장해서 입을 떼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배워서 말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요한1서 5:6-8)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이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이다.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니라”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님]이란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 두 가지입니다. 성육신할 때 주님은 마리아님 모태 안에서 물과 피로 목욕하며 태어나셨습니다. 이때의 물과 피는 자연적인 물과 피를 말하지요. 십자가에서 흘린 물과 피는 영적 출산을 위해 흘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산고의 고통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주님은 고통이 아니라 환희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출산도 그렇습니다(타락후에 출산의 고통 창세기 3:16). 흔히들 출산하면 산고만 떠올리지만 황홀한 출산도 있습니다(황홀한 출산, 엘리자베스 데이비스, 데브라 파스칼리-보나로 지음, 김우종 옮김, 정신세계사 참조). 어쨌든 출생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초점입니다. 첫째는 주님 본인의 부활체이고, 둘째는 교회입니다. (고전 15:20, 골 1:18)에서와 같이 부활의 첫 열매는 주님이고, 그것에 근거하여 부활의 열매(양자/Adoption/휘오데시아)가 될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야고보 1:18, 베전 1:23, 엡 1:14).
십자가에서 흘린 물과 피가 단순한 물과 피가 아닌 것은 부활체가 그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모체 안에서 영양공급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성육신이고, 그 영양들은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십자가에 달린 인성으로부터 즉 모체로부터 영양 공급받아서 잉태되고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와 살과 물 자체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그것을 인류를 위해 흘리시기로 하신 선택은 주님이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신성한 사랑의 근원은 주님 안에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탄생은 어머니 마리아하고는 무관합니다. 부활체의 본질과 기원은 어머니 마리아하고는 전적으로 무관합니다. 주님의 공로에 의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것입니다.
모체 안에서 태아가 영양 공급받듯이 부활체도 예수의 인성 안에서 공급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부활체 자체가 신성하고, 인성은 인성만 낳을 수 있으므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성은 신성을 낳을 수 없고 신성은 신성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님이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린다고 해서 그분으로부터 하나님이 탄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성이 나오지, 인성으로부터 하나님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님이 하나님의 어머니라 칭해진 것은 그 인성을 입으신 주님의 신분과 정체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낳는다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인성 자체로부터는 받은 바가 없지만 그 인성을 통해서 주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공덕과 공력들 즉 공로가 부활체를 형성케 하는데 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부활체의 기원은 아버지이지만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그냥 그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것에 근거해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위 성구에서 영혼은 원어를 보면 푸뉴마로서 영(spirit)을 말합니다. 영은 숨이나 기운이나 바람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이분설(二分說)로서 영혼과 육체를 말합니다. 그래서 영과 영혼(soul, 네페쉬, 푸쉬케)을 같은 의미를 지닌 다른 표현으로 봅니다. 어쨌든 저 순간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 올리는 것은 영혼에 돌아감입니다. 그러나 원어의 뜻으로 보면 숨이나 생명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유대인들이고, 여호와 증인이고 안식일교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활동으로서의 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것, 생명을 받아 주십시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 보셨죠. 제가 행한 것을, 제 행위에 합당한 판결이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기도입니다.
부활체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성으로부터 물과 피를 받으며 양육된 것이 아니라 침례의 물과 십자가의 피 또는 십자가의 물과 피에 의해서 영양을 공급받아 형성되고 자라나고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성령이 있습니다. 성령을 빼고서는 부활체를 논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성령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4). 태아는 모체로부터 영양 공급을 받지만, 부활체는 신성이고 신성은 인성으로부터 나올 수 없으므로, 무엇에 근거하여 받았을까를 생각하면 그냥 주어질 리는 만무하므로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지신 십자가 밖에 생각할 게 달리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위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말씀에서 말하는 능력은 기적이나 권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말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십자가가 진정한 능력이지, 육신을 구원하는 기적이나 치유나 그런 권능들이 능력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 전서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