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만행수일萬行隨一”이란 무슨 뜻인가? 염불에 품위가 없는 것과 삼배구품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질문: 『관경사첩소』의 서문 중에 도표 하나가 있는데, 거기서 염불에는 “드러난顯” 의미와 “은밀한隱” 의미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드러남”이란 만행수일萬行隨一이고, “은밀함”이란 정선도 산선도 아닌 진실한 홍원입니다. 스님, “만행수일”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이외에 스님께서 염불에는 품위계급이 없다고 하셨지만, 도표에도 하삼품下三品은 염불이라고 적혀있고, 『염불감응록』 제3집의 문답에서도 하품하생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점을 어떻게 통합해야 할까요?
대답: 『관경사첩소』 「편자서編者序」의 이 두 가지 도표 가운데 왼쪽의 도표에서는 『관경』의 내용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관경』의 내용에는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이 있고, 산선 아래에는 또 삼복구품과 진실홍원으로 나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경』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세 가지 법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선으로서 열세 가지 정관定觀을 닦는 법문이고, 두 번째는 산선으로서 삼복구품을 닦는 법문이며, 세 번째는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염불왕생하는 법문입니다.
염불에는 드러남과 은밀함이 있는데, “드러남顯”이란 산선 또는 정선을 말하고, “은밀함隱”이란 정선도 산선도 아님(非定非散)을 가리킵니다. 왜 “드러남”은 정선과 산선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이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의 공덕을 정선 또는 산선의 공덕으로 여기면서 육도만행의 공덕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이것을 “만행수일萬行隨一”이라 부릅니다.
『관경』의 문자로부터 보면, 염불은 정선·산선과 동등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한 걸음 더 나아가 『관경』의 맨 마지막의 종지로부터 보면, 『관경』에서 말하는 염불의 공덕은 정선과 산선의 공덕을 초월합니다. 다시 말해 삼복구품의 공덕을 초월하기 때문에 “정선도 산선도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선도대사님은 『관경사첩소』의 첫머리에서 요지를 밝히면서 『관경』은 요문要門과 홍원弘願으로 나뉜다고 말씀하셨지요. 요문은 생각을 쉬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과 악을 버리고 선을 닦는 것입니다. 생각을 쉬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바로 정선이고, 악을 버리고 선을 닦는 것이 바로 산선인데, 이 두 가지 법문의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왕생하는 것을 요문이라 부릅니다. 또 다른 하나가 홍원입니다. 홍원은 『무량수경』의 제18원에서 설한 것으로, 그 의미는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에 의지하는 것을 염불의 증상연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무량수경』 하권에서 설한 삼배문三輩文에서는, 비록 삼배의 근기가 각각 다르지만 모두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명호공덕에 의지해야만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고, 게다가 평등하게 일생보처의 과위를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상배 왕생자가 상배의 지혜와 근기에 의지하고, 중배·하배 역시 각자 자신들의 근기에 의지하며, 본인의 집착을 내려놓고 완전히 아미타불 명호의 공덕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극락세계에 이르러 당연히 품위계급의 차이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불께서 삼배를 설하고 구품을 설한 목적은, 중생의 근기에 비록 삼배구품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아미타불을 의지하고 모두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으로 회귀해야만 비로소 삼배구품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삼배구품의 범주 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무량수경』에서 설한 “태생”으로, 오백세 동안 연꽃이 피어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미 범부의 영역을 뛰어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 삼계의 육도윤회에서 벗어났지만, 인지因地에서 잡행잡수雜修雜行를 하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해 의혹을 품었기 때문에 극락세계에 가서도 의혹에 의해 가려진 것입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바로 깊이 참회하고 자책한다면 바로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설했듯이, 우리의 마음은 대단히 미묘하고 힘도 있어서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면 어떠한 과보가 있게 됩니다.
이 두 장의 도표는 뒤로 갈수록 앞에 있는 것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뒤에서 말한 “은밀함”은 정선도 산선도 아닌 진실한 홍원염불로서, 이 염불 자체에는 이미 열세 가지 정관과 삼복구품의 공덕을 포함하고 있는데, 비단 만행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원만하게 만행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법문은 수승하고 미묘하며 절대원융하여 범부의 사량분별을 초월하므로, 상대적인 품위계급의 높낮이와 위아래가 없이 원만히 구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법문과 경계는 우리 범부 불자들의 지혜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불법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춰본다면, 자기에게 해탈의 희망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옥의 불길이 이미 발밑까지 타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과응보와 육도윤회가 없는 게 아니라면, 인과응보와 육도윤회의 거울로써 자기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데, 그러면 본인에게 지옥의 업이 있어 나중에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제아무리 학문·명예·재산·권력이 있어도 죽을 때가 되면 조금도 쓸모가 없지요. 그때가 되면 오직 외롭고 두렵고 어둡고 도움이 없고 무기력하게 혼자서 염라대왕의 심판을 직면해야 합니다. 따라서 『염불감응록』 제1집의 서문에 “귀졸에게 끌려가는 길을 눈물 흘리며 외로이 걷고, 염라대왕이 꾸짖는 뜰에서 무릎 꿇고 홀로 슬퍼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눈물 흘리며 외로이 걷다”, 눈물 흘리고 슬퍼하며 어쩔 수 없이 귀졸을 따라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도 곁에서 함께 할 수 없고, 아무리 권세가 있던 사람도 자기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면 예전에 아무리 권세가 있었어도 이때는 빈손으로 무릎을 꿇고 발뺌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무량수경』에서 한 사람이 임종할 때의 심경을 “수명이 다할 때에서야 비로소 후회와 두려움이 번갈아 찾아오게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사람의 본래면목은 무엇일까요? 바로 “후회와 두려움이 번갈아 찾아오는 것(悔懼交至)”이고, 최후의 운명 역시 “후회와 두려움이 번갈아 찾아오는 것”입니다. 만약 염불법문이 없다면 우리는 크게 안심할 수 없을 것이고 시종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