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프로그램으로 수고가 많지요?
저는 지난 7월 20일부터 29일까지 CBS TV에서 제작하는 <손정도 목사와 두 아들> 다큐 제작 지원 차 중국을 다녀 왔습니다.
중국에 남은 손정도 목사님과 그 가족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었습니다.
CBS 촬영팀(4명) 외에 영원한 답사 친구 심한보 원장님, 세리까와 교수님, 그리고 김호운 전도사님이 동행했습니다.
답사 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월 20-21일 북경
손정도 목사님이 1911년 첫 선교사로 부임했던 곳, 1919년 하란사와 함게 의친왕 망명을 위해 찾아 갔던 곳, 그리고 1920년 동아선교사총회에 참석해서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했던 곳인데 손 목사님이 거점으로 삼았던 북경 최초 감리교회 예배당(현 숭문문교회)와 성서공회 옛 건물, 그리고 하란사가 별세한 협화병원, 손정도 목사님이 현순 목사님과 임시정부 조직을 처음 논의한 감리교병원(현 동인의원)을 둘러보았고 관계자를 인터뷰했습니다.
7월 21-23일 상해
손정도 목시님이 임시정부 의정원장으로 활동하시던 곳. 제일 중요한 것은 마당로에 있는 임시정부 관사 촬영인데 중국 관리당국이 그동안 어떤 방송국이 와도 촬영도 허락치 않아서 난감해 있던 차, 예기치 않은 천사가 나타나 상해 영사관을 통해 실내 촬영을 허락받았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당로 임시청부 청사를 확보하기 전에 손정도 목사님이 현순 목사를 비롯한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을 선포하고 정부 수립을 정식 선언한 장소(김신부로가 22번지)를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김호운 전도사가 당안국과 서점에서 고지도를 찾아내 현재 지명과 비교해서 드디어 그 장소를 찾아 촬영하였습니다.
7월 23-26일 길림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길림이었습니다. 손정도 목사님이 1924년부터 1931년 돌아가실 때까지 마지막 목회하시며 독립운동을 하시고 농민호조사를 설립하여 '기독교 사회주의' 공동체 건설의 꿈을 펼치셨던 곳. 손정도 목사님은 임시정부 활동에서 손을 떼시고 1924년 9월 연회에서 길림 신참교회에 파송을 받으시면서 목회로 복귀하셨는데, 신참교회에서 6개월 여 목회하시다 길림 성 안으로 들어가 우마항에 있는 중국인 교회를 빌려 목회를 시작하였고 교인들이 늘어나 동문 밖 조양가에 조선인 교회와 학교, 사택을 건축하였으며, 농민호조사를 설립하고 액목에 '신농촌'을 건설하여 '가난한 자도 없고 부한 자도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가난한 동포들의 경제 자립과 독립운동 전진기지로사의 역할을 감당하려 노력하시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결국 사업을 접고 가족을 북경으로 옮긴 후 1931년 2월 길림 여관에서 피를 토하시고 동양병원에서 운명하셨는데 그 시신을 북문 밖 묘지에 안장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손 목사님께서 길림으로 들어가 처음 목회하신 우마항에 있던 중국인 교회 자리, 그리고 동문 밖 조양자 거리에 있던 교회와 사택 자리, 안창호 선생이 연설하다 잡힌 대동공장과 농민호조사 사무소 자리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소득은 손 목사님께서 별세하신 동양병원(후에 철도병원) 자리를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길림 조선족교회(송강교회) 목사님 안내로 북문 밖 기독교 공동묘지(해방전부터 기독교인들의 묘지로 알려진 곳)를 찾아 손정도 목사님께서 묻히셨을 묘역을 발견했습니다(묘소는 비석과 함께 사라져 찾지 못했습니다). 손정도 목사님의 맏아들 손원일이 다녔던 문광중학교 자리와 둘째 아들 손원태가 김성주(김일성)과 함께 다닌 육문중학교도 물론 둘러 보았습니다.
7월 26-27일 교하(액목)
길림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교하는 해방전 액목으로 불리던 곳입니다. 손정도 목사님이 1924년 연회에서 파송받으신 신참교회도 액목 근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길림으로 들어가신 후에도 길림교회 외에 신참교회, 액목교회, 대강자교회, 대분교회 등을 맡아 보셨습니다. 그리고 농민호조사도 액목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액목을 중심으로 손 목사님의 목회와 신농촌 건설운동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교하를 방문한 목적입니다. 우선 액목 지역에서 가장 나이 많으신 팔가자교회의 박상온 집사(88세, 경남 통영 출신)와 강경애 권사(81세, 연백출신) 부부를 찾아가 옛날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액목(교하)에서 북쪽으로 20분 정도 거리에 손정도 목사님이 처음 파송받은 신참(현재 신잔)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 조선족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액목 농민호조사 농장(3백만 평)이 있었을 법한 지역을 찾아 송화강 상류를 훑어 보았습니다.
7월 27-29일 연길
액목을 마지막으로 손정도 목사님과 관련된 촬영 일정은 끝났습니다. 귀국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연길로 옮겨 하루 시간이 남아 용정과 근방 교회사 유적지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1920년 10월 '경신대토벌' 때 교인과 주민 33명이 일본 군인들에게 학샐당한 간장암(노루바위) 마을과 교회터를 찾아 가 보았습니다. 지난 번엔 마을 터만 확인했는데 이번에는 학교와 교회 자리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용정으로 나와 동산 묘역의 현석칠 목사님 묘소와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둘러보았는데 뜻 밖의 소득으로 문익환 목사님의 동생 문두환(1924-1930) 소년의 무덤을 발견하는 감격을 얻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20년대 양주삼 목사님이 동만 선교를 재개하시면서 두도구에 세우셨던 '아이비기념예배당' 자리를 확인했습니다(현재 두도진 신북로 사우나 집). 그 곳에서 1926년 제 1회 간도지방회가 개최되었지요. 두도구교회 터 방문으로 이번 답사를 끝냈습니다.
이번 여행이 방송국 촬영 위주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예비하신 천사들의 손길과 안내로 예기치 않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구마 줄기처럼 찾으면 찾을 수록 계속 밝혀지는 과거 진실에 신비로운 두려움을 느낍니다.
특히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드렸던 "그 옛날 손정도 목사님을 인도하신 성령님, 목사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오늘 우리의 일정을 인도하옵소서." 기도가 이루어진 것 같아 감사할 뿐입니다.
기회가 되면 우리 학회원들과 함께 <손정도 목사님 발자취 따라잡기> 여행을 해보고 싶군요.
첫댓글 생생한 현장 일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함께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