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과 ‘노란봉투 법’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로 살았던 때는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광풍이
일던 시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해 값싼 인건비를 제공하는
산업예비군이 됐습니다. 노동조건이 열악해도 일할 사람들이 넘쳐났기에
기업과 정권은 노동조건을 개선할 필요가 없었고, 노동자들은 착취당했습니다.
인간과 노동은 산업화를 위한 도구였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그 당시 열악한 노동 현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지금도 인간과 노동은 철저히 자본에 종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지금도 죽어갑니다.
끼어 죽고, 맞아 죽고, 떨어져 죽고, 심지어 자신을 스스로 죽입니다.
이 시대에 자본은 피도 눈물도 온기도 없고 매우 위악적입니다.
자본은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무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손배가압류’가 그것입니다.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와
2012년 한진 중공업 노동자 최강서는 손배가압류로 인한 고통을 세상에 알리며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2009년 회사의 구조조정에 맞서 파업을 벌였던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에게 사측은 47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노동자들의 재산과 임금이 가압류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3~4년 사이에
쌍용 자동차 노동자와 가족들 25명이 이 손배가압류 때문에 얻은 생활고와
병마로 숨을 거두거나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한때 이들의 고통을 함께 지려는 ‘노란봉투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이 손배가압류는 지금도 마치 유령처럼 떠돌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목숨을 노리고
삶을 파괴합니다. 최근에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이유로
470억 원의 손해배상이 청구되었습니다. 하이트 진로 화물노동자들에게도 회사는
파업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며 27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손배가압류가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무기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사용자가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에 손해배상 재판을 걸고 노동자의 재산과 임금에 대해
가압류를 하여 노동조합의 활동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들의 권리는 너무도 쉽게 무시됩니다. 손배가압류의
악용을 막을 수 있는 개정된 노동조합법, 일명 ‘노란봉투 법’이 필요한 현실입니다.
노동자와 사용자와의 관계는 계약 관계지만 다분히 권력 관계입니다.
이 권력 관계에서 약자는 당연히 노동자입니다.
약자인 개별 노동자는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없습니다. 힘의 균형이
깨지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강자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노동자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들의 단결권을
인정합니다. 또 교회는 파업권이 노동조합 활동의 핵심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파업이 합법적인 수단이지만 동시에 어떤 맥락에선 극단적인 수단이란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은 파업권을 남용하지 말아야 하며, 사용자는
이들이 파업에 이르기 전 협상을 통해서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정당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은 상대
집단 특히 고용주들에게 대항하는 최종 수단으로서 파업 또는 작업 중지가 있다.
이 방법은 올바른 조건과 정당한 한도 내에서는 합법적인 것이라고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은 파업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따라서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여 어떠한 개인적인 처벌이나 규제를 받아서는 결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0항) 교회의 이 가르침에 의하면 사용자가 노동자의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손배가압류를
집행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노동을 단순히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봅니다.
그래서 노동을 자본에 그리고 인간을 노동에 종속시켰습니다.
최종적으로 인간도 자본에 종속됩니다. 그 노동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이런 왜곡된 노동관으로 인해 노동자에게 노동은 ‘벌(罰)’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만이 홀로 하느님을 닮았다는 독특한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은 노동하면서
자신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창세기는 가르쳐주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 25항)와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428항)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노동의 가치가 무시된 사회, 모든 것이 자본에 종속된 사회,
그래서 노동이 벌이 된 사회는 그 자체로 반교회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를 위해서도 또 노동자의 존엄성을 위해서도 노동자의 노동조합
활동은 보장되어야 하고 장려되어야 합니다.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노동조합의
활동을 무력화하는 손배가압류가 있는 한 전태일은 오늘도 죽어갑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손배가압류의 악용을 막기 위한 ‘노란봉투 법’이 필요합니다.
오늘이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52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 8,9 참조)
글 : 김정대 프란치스코 신부 – 예수회
장미꽃 향기처럼
저는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중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동료 한 명이 있습니다.
당시 73세였던 그녀는, 응급실에서 풀타임 케이스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정기건강 검진을 받다가 암 수치가 약간 높은 이상 증후군을 발견했고,
정밀검사 후 대장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병이 이미 상당히 진행된 것을 알고
통증 완화만 하기로 하고 임종 간호를 선택했습니다.
며칠 뒤 퇴근 후 동료 몇 명이 모여 노란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노란 장미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습니다.
장미향이 거실 가득 퍼졌고, 그 향기 안에서 그녀는
“전 재산을 병원에 기부하기로 했다.”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모두들 놀라며
아들과 딸, 손자, 손녀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응급실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지 못하는 이들을 많이 만났고,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것이 다 경제적인 문제들로부터 왔던 것이라며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결정을 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통증 완화 치료를 받는 것도
병원과 본인의 변호사가 절차를 밟는 중이어서 시간을 벌기 위함이고,
그 절차만 끝나면 자신은 하늘나라로 편안하게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이 동의를 했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물론”이라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젊고, 경제적인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인간적인 욕심으로 볼 때,
‘가족들이 그녀의 유산을 받으면 더 여유 있고 편안하게 살 텐데….’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병원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고, 그 재단의 목적을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응급실 방문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재산을 기부하는 절차가 끝난 후,
친구는 임종 간호를 받으며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녀가 돌아가는 그 길에서 두 손 잡아주시며 반가이 맞아 주시지 않았을까요.
노란 장미꽃 향기가 오래오래 이곳까지 퍼지는 것 같습니다.
글; 전지은 글라라 / 『그래도,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