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끝나지 않은 전쟁-시리즈 完.
늘 전쟁터를 서성이다
1946년의 겨울은 혼란스러웠다. 고향인 평양을 떠나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서울의 풍경을 접했을 때 느낌이 그랬다. 군사영어학교라는 곳에 들어가 한반도 남쪽의 군문(軍門) 생활에 접어든 지 14년에 나는 군복을 벗었다. 4.19가 벌어진 직후였다. 그런 뒤에 나는 외교관 생활을 했다. 1960년 자유중국(대만) 대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5.16이 벌어진 뒤에는 다시 주(駐)프랑스 대사로서 서방 6개국, 아프리카 13개 국가의 대사를 겸임했다. 우리의 국력이 약해 여러 나라에 동시에 대사를 파견할 수 없었던 실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뒤 나는 캐나다 대사를 역임한 뒤 귀국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교통부 장관을 약 1년 반 정도 지낸 뒤 한국종합화학 사장 등을 맡아 석유화학 산업의 근기(根基)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 산업화를 이뤄 국력을 키우는 일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나라가 부유해져야 병(兵)을 키우는 법이다.
-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이 전사자 명부를 보고 있다. /조선일보 DB
전쟁 뒤의 혼란을 제대로 정리하고 나서 산업화에 전력을 기울인 까닭이다. 그 모든 과정은 정말이지, 전쟁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4.19 뒤 외교관으로 국제질서가 요동을 치는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펼쳐지는 산업화의 일선에서 그런 점을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외교관으로 약 10년 동안 해외에 주재하면서도 내가 겪었던 참혹한 전쟁의 의미를 잊지 않았다. 그 당시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프랑스에 대사로 주재할 때였다. 사람들이 간혹 나를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여행을 나서는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 발걸음은 유럽의 옛 전쟁터로 향했다.
다른 이들을 남겨두고 혼자서 전쟁터 주변을 기웃거리는 내 모습을 접하면서 여러 사람들은 의아심을 품기도 했다. 나는 나폴레옹 군대와 영국의 웰링턴 군대가 격렬하게 맞붙었던 워털루 전쟁터를 아주 여러 번, 미군 주도의 연합군이 상륙했던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타 비치 등을 자주 배회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군이 진격하면서 독일군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라인강의 강변 또한 내가 자주 찾던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싸움을 회고했다. 사람 사이의 전쟁은 왜 벌어지는가, 그리고 전쟁은 어떻게 펼쳐지는가, 누가 그런 싸움에서 이기며 어떤 이가 질까, 왜 이 지형에서 커다란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장면이 벌어졌을까 등을 묻고 또 물었다.
“군인으로 남겠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일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런 싸움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국가와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품어야 한다. 그런 참혹한 싸움에 나서는 군인의 어깨는 따라서 매우 무거울 수밖에 없다.
내게 군대를 좀 더 일찍 떠날 기회가 한 번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 때문이었다. 1956년 5월 25일에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3선에 성공했다. 부통령 투표가 화제였는데, 자유당 이기붕 후보가 민주당 장면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개표 시비가 벌어져 정국이 매우 소란했다.
6월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호출했다. 경무대에 들어서자 대통령은 “자네, 내무부 장관 자리를 맡게”라고 했다. 개표 시비로 사직한 김형근 내무장관의 후임으로 오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내무부 장관은 매우 비중이 높은 자리였다. 그로써 개인적인 영달은 이루겠지만, 전국 각 지역의 행정과 선거 등을 관리하는 자리여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민감했다. 나는 즉답을 피하고 “며칠 생각해 본 뒤 결정하겠다”고만 했다.
사흘 뒤 나는 이 대통령을 찾아가 의견을 피력했다. 가족과 상의한 결과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끝까지 군에 남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하게”라고만 했다. <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