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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金弘道)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천재 화가
출생 – 사망 : 1745 ~ ?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의 글이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다
김홍도는 1745년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이다. 증조할아버지가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림과 아무 연관 없는 집에서 태어난 중인 소년이 당대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뛰어난 문인화가이자 명문사대부인 강세황에게 어떤 연유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홍도는 “젖니를 갈 때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강세황은 마흔 살 무렵으로 벼슬 없이 경기도 안산에 있는 처가에 살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김홍도가 안산 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스무 살 무렵 이미 당대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김홍도는 스무 살 이전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되어 있었던 듯하다. 1765년 영조가 71세가 되어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望八)에 이른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고 이를 위해 병풍을 만들었는데,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한 김홍도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로 임금의 큰 잔치 그림을 홀로 그렸다는 것은 당대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773년 스물아홉의 김홍도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그림 인생에 중요한 인연을 또 한 사람 만난다. 뒷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은 당시 김홍도의 솜씨가 썩 마음에 들었다. 뒷날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이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화사(畵事)에 속한 일은 김홍도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듯이 이후 정조는 김홍도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후원자가 된다.
영조의 초상화를 그린 김홍도는 그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 사포서(司圃署)의 감목관(監牧官)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마침 두 달 뒤 스승 강세황이 사포서의 별제로 발령을 받아 사제지간이 함께 근무했다. 이때의 일에 대해 강세황은 이렇게 회상했다.
“일찍이 군과 더불어 사포서의 동료가 되었을 때, 매번 일이 있으면 군이 나의 노쇠함을 딱하게 여겨 바로 힘든 일을 대신했으니, 이는 내가 더욱 잊을 수 없는 바이다.”
삼십 대에 김홍도는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는 말이 전할 만큼 그림으로 높은 이름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 가운데서도 풍속화는 인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각 장면의 극적인 구성이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하는 백성들이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거나 집을 짓는 장인들, 밭을 갈고 꼴을 베는 사람, 물을 긷고 빨래하는 사람, 장사하는 상인들의 모습 등 서민들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그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현감의 자리에 오르기도
김홍도는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았다. 그에 대해 강세황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벼슬살이를 하고 돌아온 40대의 김홍도는 화조화, 기록화 등을 주로 그렸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 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렸고, 그 이듬해 사신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모시며 현륭원을 건설할 때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의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해, 조선 후기 불화의 명작 중 하나를 남기기도 했다. 입체감을 나타내는 음영을 넣어 독특하게 표현한 이 불화들은 기존의 화풍을 뛰어넘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만 3년 뒤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파직됐다. 백성들 중매를 해주던 인간적 관리였으나 행정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현감 자리를 내주고 평민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자유롭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전념해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명작들을 쏟아냈다. 50대에 이른 김홍도의 그림들은 보다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대담한 생략과 거침없는 붓길이 대가다운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시기의 대표작들은 [해산선학도], [마산청앵도], [세마도] 들이다.
아름다운 풍채가 신선 같았다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낭만적인 예술가였지 생활력 있는 가장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김홍도는 매우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증언도 있고,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도 즐겨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 한두 곡을 연주하며 스스로 즐겼고, 즉석에서 한시를 남길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갖고 있었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두 살이던 1806년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현재 300점 정도의 작품이 전한다.]
김홍도의 대표 작품으로 《군선도병풍》, 《풍속화첩》, 《투견도》, 《소림명월도》 등이 있다.
김홍도 <군선도> (1776년) : 국보 제139호, 호암미술관 소장, 서른두 살 때 그린 병풍 그림. 신선이 신선동자를 데리고 서왕모의 생신잔치에 가는 모습을 그렸다.
1971년 12월 21일에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도석인물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도석인물화란 불교나 도교에 관계된 초자연적인 인물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원래는 8폭의 연결된 병풍그림이었으나 지금은 8폭이 3개의 족자로 분리되어 있다.
이 그림은 모두 연결한 상태에서 가로 575.8㎝, 세로 132.8㎝의 크기이며, 그것이 분리된 3개의 족자는 가로 48.8㎝, 세로 28㎝ 내외이다.
종이 바탕에 먹을 주로 사용하고 청색, 갈색, 주홍색 등을 곁들여 채색하였다.
여기서 묘사된 신선들의 명칭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른쪽에 외뿔소를 타고 도덕경을 들고 있는 노자를 선두로 복숭아를 든 동방삭 등의 신선들과 동자들이 모두 3무리로 나뉘어 있다.
선학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제1군의 10명 중, 붓을 들고 두루마리에 글을 쓰는 인물은 문창, 복숭아를 든 소년은 동방삭, 푸른 소를 탄 도인은 노자이다. 제2군의 6명 중 대나무 통처럼 생긴 어고간자를 든 젊은이는 한상자, 딱따기(박판)를 치는 인물은 조국구, 나귀를 거꾸로 탄 노인은 장과로이다. 제3군에서 호미를 든 여인이 하선고, 복숭아를 진 여인이 마고이다.
김홍도는 각 신선의 도상을 충실하게 지키되 이들을 자유롭게 재구성하여 19인의 형상에 활기찬 생명력을 부여했다. 10, 6, 3으로 축소되는 인물군과 그들의 다양한 동세, 밀착된 군상을 안배한 여백, 그리고 무배경 처리. 이는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김홍도만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19명의 신선은 진귀한 물건을 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시 곤륜산에 머물고 있다는 서왕모(불로장생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불로장생을 꿈꾸는 이들과 신선도 수행자들에게 깊은 숭배를 받아온 선인들을 다스리는 최고위 지위에 있는 신)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것은 아닐까. 김홍도가 재현한 군선의 당당한 자태를 보면서, 일간지의 카피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개성과 조화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신선, 포스가 장난 아니네’.
인물들의 시선과 옷자락이 모두 왼쪽을 향하고 있고 그 방향으로 갈수록 인물의 수를 점차 줄어들게 하여 화면의 전개와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인물의 윤곽을 굵은 먹선으로 빠르고 활달하게 묘사한 뒤 얼굴과 손, 물건들은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처리하여 인물들의 표정을 살렸다.
아무런 배경 없이 인물을 나열한 구성과 감정이 살아 있는 듯한 인물들의 묘사, 그리고 얼굴의 둥근 눈매 등은 그의 풍속인물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비록 화본에 따라 그렸으나 호방한 필치로 독특한 인물묘사를 한 작품이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후에 김득신, 이명기 등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신선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풍속화
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풍속화는 거의 대부분 그가 30대에 그린 것이다.
그의 풍속화는 그가 34세인 1778년 그린 8폭의 〈행려풍속도〉 병풍과 30대 중후반에 그린 25점의 〈풍속화첩〉(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김홍도가 풍속화에 눈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행려풍속도〉병풍은 강세황이 각 폭마다 그림을 설명한 평을 써넣었고, 비단 위에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섬세하게 농어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필력과 화면의 짜임새가 미숙한 대로 흑립을 쓴 선비와 관료, 머슴과 농어부들의 생활상 등 일상 속에서 흔한 소재로 현장감 있는 배경처리와 함께 회화적으로 이끌어내려한 김홍도의 의욕이 배어있다.
〈행려풍속도〉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인물 소묘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풍속화첩〉이 있다. 한 폭의 크기는 27.0X22.7cm이고 전체 25점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정확한 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물들의 묘사기법과 필치로 볼 때 30대 후반 작품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풍속화첩〉는 배경을 생략하고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본격적인 풍속 그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투견도
조선 말기에 화원이 그린 그림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린 이를 몰라서 아직까지 '작자作者 미상未詳'으로 남아 있는 그림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투견도鬪犬圖> 또는 <맹견도猛犬圖>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이 그림 제목을 <투견도>로, 그리고 다른 명칭으로 <김홍도 필 투견도>라고 기재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 인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관련 학계나 전문가들은 거의 작자 미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고희동의 술회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1886~1965)은 1910년대에 서울 북촌의 한 고가古家(지은 지 오래된 집)에서 이 그림은 처음 발견하고서, 우리나라 동양화를 이끌던 선배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등 셋이서 이 그림을 감식했다.
당시 우리나라 동서양화단을 좌지우지하던 세 화가의 감식 결과 이만한 작품은 단원 김홍도나 그릴 수 있다고 결론 내리면서, 세 사람은 이 그림에 단원 김홍도의 가짜 주문방인朱文方印을 찍어서 화상畫商에 팔아넘긴 돈으로 여러 날 같이 호음豪飮했다고 고희동이 술회한 것이다.
그 후 이 그림을 이왕가李王家에서 사들일 때에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인정했다고 하는데, 이는 세 사람이 만들어 찍은 '사능士能'과 '김홍도金弘道'의 가짜 주문방인 때문이었다(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에는 주문방인이 보이지 않는다).
<투견도>는 생동감 넘치는 정확힌 필묵筆墨(붓과 먹)의 묘妙로 보건대 단원의 그림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화기畵技(그림 그리는 기술)인 것은 분명하지만, 작품 주제인 개 자체가 서양개일 뿐만 아니라, 음영 표현이나 구도가 서양화의 기법인 요철법으로서 단원풍의 선묘線描(선을 그리는 기법)보다는 묵법墨法(먹을 칠하는 기법)이 강한 것으로 보아 단원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다.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
단원이 평생 남긴 작품들 중에서「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만큼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없다. ‘성긴 숲에 걸린 밝은 달’이란 뜻이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숲에서 달 뜨는 걸 본 사람은 안다. 그 허황하면서도 소연한 분위기를 말이다.
소림명월도는 저밀도의 감흥, 즉 성긴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명품이다. 이 그림은 나무와 달만 등장하는 순전한 무언극이다.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은 이 무대는 소박하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기막히게 우려내고 있다.
단원 김홍도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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