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국전쟁의 상영은 그동안 잠시 잊고 있던 6.25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것을 다시 꺼내 보게 했고 자료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이사를 다닐 때 마다 무겁고 귀찮고 어떤 이들은 갖다 버리라고 했으나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었다.
특히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사실을 찾고자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의존을 하지 않고 문헌이나 사진을 찾기 위해 온집을 뒤졌다.
심지어는 자칭 민족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자료도 찾았다 .
아직 확인이 안된 것도 있으나 결론을 내릴 때 까지 구석구석 찾아 볼 것이고 혹시 내가 알고 있던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생각을 해 보았다.
국방부와 육군본부, 유엔군 전사가 기본으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 당시 다리를 통과하거나 통과전 목격한 것을 적은 것이 있는데 공통적인 주장은 수많은 피난민과 군경이 있는데 예고 없이 폭파를 했고 중간에 중단을 하려고 시도는 했으나 용산부터 다리까지 수많은 피난민과 군인들로 인해 현장으로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당시 터뜨린 폭약의 무게 또한 증언마다 각각 다른 데 한강철교까지 3톤 이라는 내용도 있고 그러함에도 철교 하나는 완전하게 끊지 못해 사람이 지나갔고 일부는 강을 건넜으며 공병대가 준비한 단정이 있었지만 모르다 보니 다양한 방법으로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또한 강안인 노량진 흑석동의 가옥과 건물의 유리창이 박살나고 건물이 피해를 봤으며 용산의 이촌동에도 충격이 갔다는 기록이 있고 피난민들이 엄청나게 한강다리와 입구에 있고 차량들이 충격으로 망가질 정도면 그것의 피해 결과와 인명 피해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다시 말하지만 깊은 밤 그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고 후퇴하기에 급한 사람들은 정확한 사상자를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고 본다.
또한 한강철교까지 폭파가 되었으니 그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다.
당시 증언자의 기록을 토대로 언론인 출신인 오경환님의 저서 '젊은 용사들'에는 이 당시 증언들이 있다.
문제는 춘천 전투나 홍천 전투 , 강릉 전투의 경우는 고위급 지휘관 부터 전투원까지 다양한 증인들이 있는데 한강교 철수에 관한 건 육군전사에 기록된 것 이상이 많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다리위에 그리고 다리를 건너기 전 수많은 인파가 있었다는 증언이 일반적이며 군인들이 총을 쏘며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당시 소년이던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증언을 들으면 부통령인 이시영선생 조차도 전쟁의 상황을 알 수 없었고 잠시 수원의 지인에게 피해 있으라는 연락을 받고 이전에 북에서 내려온 자가 접근 대통령이 없으니 부통령이 '김일성'과 협의를 언급하는 것을 봐서 같은 정부의 대통령과 부통령인지 알 수가 없고 또한 3부 요인들에게 서울을 지킬 것 처럼 이야기 하고 더 이해 안 가는 건 수행원들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따라 나섰다는 것과 미 고문단 장교들도 모르고 서울에 있다가 부랴부랴 철수를 한 건 이해할 수 없다.
당시 미국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공군기를 띄우고 선박을 급파하는데 우리는 도망갈 다리부터 먼저 끊어 수많은 피해와 전력손실을 보았으니 어떤 이유를 들어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본다.
참고: 오경환, 젊은 용사들 , 금란출판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