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에 견줄 ‘신품제일의 글씨’
올해 말에 있을 ‘추사전’ 작품조사차 화곡동 박영감님을 찾았다. 영감님은 언제나처럼 머리를 박고 고탁본 가묵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분은 산산조각나 없어진 인각사 ‘일연선사비’를 40년 국내외 자료 수집 끝에 복원해낸 사람이다. 때마침 올해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선사 탄신 800주년이 되는 해가 아닌가. “어이 이거봐, 추사선생이 탁한 김생의 백월비여.” 나는 이미 정교한 추사의 탁 솜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운 건 탁 솜씨가 아니고, ‘정희수탁(正喜手拓)’이라는 이 인(印)이여. 천하의 대 추사도 김생 앞에 홀라당 벗었단 말이여.”(그림1) 그렇다, 영감님 설명을 듣고 보니 ‘추사수탁’이라 아니한 것은 김생 앞에서 자신을 극도로 낮춘 것이다. 김생과 추사, 절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천년해후를 나는 이렇게 목격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김생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신라 성덕왕 10년(711)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80이 넘었는데도 글씨쓰기를 쉬지 않아 각체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는 정도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과도하리만치 중국 글씨에 집착하고 있는 오늘 김생의 존재는 우리 기억 속에 전설 속 인물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 ‘뜻밖에 오늘 왕희지의 친필을 보는구나’-
우리 역사에서 김생(711~790?)은 왕희지에 비견되는 ‘해동서성(海東書聖)’이다. 그 명성만큼 그 필적에 대한 상찬도 자자하다. 송 휘종 연간(1102~1106)의 일이다. 고려학사 홍관이 진봉사(進奉使)를 수행하여 변경(변京, 하남성)에 머물 때, 휘종황제 조칙을 가지고 온 송의 한림대조 양구와 이혁이 김생의 행초 두루마리를 보고 놀라 “뜻밖에 오늘 왕희지의 친필을 보는구나(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하였다. 이에 홍관이 “아니다, 신라사람 김생의 글씨다(非是 此乃新羅人金生所書也)”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기면서 “천하의 왕휘지를 제외하고 어찌 이와 같은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하면서 끝내 믿지 않았다고 ‘삼국사기’ 열전에서 전하고 있다.
고려 때 이인로(1152~1220)는 김생에 대해 ‘용필이 신과 같아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한데, 멀리 57종의 제가체세(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用筆如神 非草非行 逈出五十七種齊諸體勢)’고 하였고, 이규보(1168~1241)는 왕희지와 짝하여 ‘신품제일(神品第一)’로 극찬하였다. 또 조선에서도 서거정, 이황, 허목, 홍양호 등 문인들의 평이 줄을 이었다. 그중 이광사(1705~1777)는 ‘탑본 역시 기위(奇偉)하고 법이 있다’고 하였고, 성대중(1732~1812)은 백월비 글씨에 대해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서 한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其劃如張 千鈞之弩 一發可碎千軍)’고 하면서 손자(孫子)의 ‘그 형세가 험하고 그 마디가 짧다(其勢險 其節短)’는 말에 비유하고 있다. 요컨대 김생은 한국서예 조종(祖宗)으로 왕희지에 비견되는 입신의 경지라는 이야기다.
-‘용필이 신과 같아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
그러면 김생 글씨가 조형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는가. 아직 이에 대해 이렇다 할 분석은 없지만 이 시점에서 이인로 성대중 이광사의 평은 김생 글씨에 나타난 필법과 체세, 점획과 결구, 조형미에 대한 분석의 실마리를 잡는 데 요긴하다. 이유는 김생 글씨가 ‘57종 제가체세에서 나왔다’는 이인로의 지적이 ‘순화각첩(淳化閣帖)’에 실린 한·위·진·남조의 명서가 57명의 필적의 특장을 김생이 제대로 소화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또 성대중이 백월비의 필획을 ‘그 형세가 험하고 그 마디가 짧다’고 한 것은 김생 글씨의 조형적 특질의 핵을 지적하고 있고, 이광사가 ‘기위(奇偉)하고 법(法)이 있다’고 한 데서는 김생 글씨의 미학적 성격이 간취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김생의 주요 필적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명’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해동명적의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그림2), 대동서법의 ‘망려산폭포시(望廬山瀑布詩)’ 등 열손가락 안쪽이다.
-삼만 근 활(千鈞之弩)의 기세를 지닌 필획과 납작한 구조-
그러면 ‘백월비’ 글씨의 조형을 점획과 결구 중심으로 보자. ‘그림3’과 같이 대체적인 점획의 운필은 방(方)·원(圓)의 혼용과 기필(起筆)과 종필(終筆)의 강조, 점획의 축약(縮約)과 태세(太細)의 대비가 극심한 가운데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글씨의 짜임새 또한 상층부가 육중한 횡장(橫長)한 구조로 다이내믹한 향세(向勢)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모두 이인로가 ‘용필이 신과 같다’고 한 말, 성대중이 그 획을 ‘삼만 근 활(千鈞之弩)’이나 ‘그 형세가 험하고 그 마디가 짧다(其勢險 其節短)’고 한 평가를 실증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김생 글씨는 이광사가 본 대로 기위(奇偉)하면서도 법도(法度)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동시대 여타 글씨에서 보기 어려운 독보적 경지인데, 자유자재한 광초풍의 탈속적 경지는 ‘송하빈객귀월’(그림2)에서 더 잘 확인된다.
이러한 김생 글씨가 통일신라나 당나라 등 8세기의 여타 글씨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 시기는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등 당나라 초기 3대가(三大家)에 의해 해서(楷書)의 전형이 완성된 시기이자, 글씨의 기준으로서 왕법의 복고가 만연한 때다. 이것은 통일신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무왕릉비편(681년경), 황복사지비편(8세기경, 그림4), 성덕대왕신종명(771년), 영업의 단속사신행선사비명(813년), 고선사 서당화상비명(808년경),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801년), 사림사홍각선사비명(886년), 최치원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명(887년) 등에서 증명된다. 다시 김생 필적에 대한 역대 평가를 빌린다면 김생은 당시 시대서풍인 왕법의 신수를 체득했고, 이를 토대로 당해(唐楷)의 전형을 수용하되 이것과는 유(類)를 달리하는 독자적인 글씨를 변화무쌍한 필획과 짜임새로 구사해냈던 것이다.
이것은 특히 ‘그림1’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험경한 획질과 결구에 있어 대비적인 음양요소를 극심하게 운용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내는 데서 확인된다.
김생 글씨의 가치는 바로 이와 같이 외래문화를 수용하되 그것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미의식에 맞게 재해석하고 실천해낸 우리 역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이라는 데 있다 할 것이다.
▶ 김생서예 연구의 보고(寶庫)-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는 통일신라 고승으로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인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7)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비문은 신라말 고려초 문장가이자 명서가인 최인연(崔仁연, 868~944)이 지었고, 김생의 해서와 행서 글자를 낭공대사의 문인인 단목스님이 집자(集字)하였다. 비음기는 낭공대사 법손(法孫)인 순백(純白)이 짓고 썼는데, 입비(立碑)는 고려 광종5년(954)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비신 높이 200㎝, 폭 96㎝로 글자 한 자의 지름이 2~3㎝이다.
백월비는 처음 경북 봉화군 하남면 태자사에 세워졌지만 폐사가 된 후 방치되었다가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자민루로 옮겼다. 그리고 1918년 비신만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두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집자비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 국에서도 흔하지 않은데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대당삼장성교서’나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801), ‘사림사홍각선사비’(886), ‘인각사보각국사비’(1295)가 손꼽힌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