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과 속칭의 매력
힘과 돈을 안 들이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화와 용역을 우리는 자유재라고 한다. 물, 공기는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자유재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속성 때문에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낸다. 이것들이 없다면 한시라도 살 수 없는 데도.
흔한 것이 결코 값싸고 가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진리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그 은혜로운 혜택을 받아 누리고 있는 자유재는 물, 공기뿐만이 아니다. 어버이의 사랑은 가장 큰 자유재라 하겠다. 아무 조건 없이 한없이 우리를 감싸 덮는 것이 어버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공기나 물처럼 그 소중함에 비해 너무 쉽게 우리 주변에 자리해서 자칫하면 그 고마움을 잊고 지내기가 쉽다.
눈을 돌리면 이러한 자유재는 많다. 우리가 항상 그 속에서 숨 쉬며 또 그것을 사용하면서 삶을 이어가게 하는 우리의 문화와 전통, 언어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의 소중함을 평소에 느끼지 못한다. 소중함을 인식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이들을 낮게 여기는 경향마저 가끔 보게 된다. 조상들이 애써 갈고 닦아 물려준 문화 요소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다루어야 함은 당연한 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경제적 발전, 조국의 근대화란 벅찬 사명을 이룩하느라 우리 자신의 내부를 살피는 데는 다소 소홀했던 감이 없지 않았다. 더러는 외국 문물을 선망한 나머지, 우리의 것을 비하하는 태도마저 팽배한 때도 있었다.
개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들만이 지닌 고유한 것이 진정한 값어치를 지닌 것이며,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 외치고 있는 ‘세계 속의 한국’이나 ‘선진 조국의 창조’도, 자기의 것에 대한 확고한 발판 위에서 이루어져야 진정 건강한 조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자식이 곱게 보이려면 제일 먼저 자신이 자기 자식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 남도 내 자식을 곱게 봐 줄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자식을 천대하고 구박한다면, 남들이 그 자식을 귀히 여겨줄 리가 없다. 이러한 평범한 생각의 한 실마리를 풀어, 우리의 전통 문화 내지 언어문화에 대한, 작은 생각 한두 가지를 사족(蛇足)으로 덧붙일까 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영랑(泳郞)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의 일 절이다. 이 시를 읽으면, 곱게 다듬어진 시어들이 주는 샘물같이 맑고, 햇살같이 따스한 느낌을 받게 됨은 물론,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어느 초가집 몇 채, 그리고 인공미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돌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돌에는 검은 이끼, 돌 버섯이 돋아나고 군데군데 호박 덩굴이 치렁치렁 얽히고, 가을이면 누렁덩이가 햇빛에 단맛을 더해가고 있을 그런 돌담. 어디서 낮닭 우는 소리라도 들릴 참이면, 고요에 못 이겨 크고 작은 돌담의 구멍 사이로 바람 한 줄기 드나들고…….
옆집 돌이네와의 인정도 이 구멍을 통하여 오고가지 않았던가. 닷새 만에 한 번 서는 읍내 장에 가서, 어쩌다가 고기를 조금 사서 국이라도 끓일 양이면, 나지막한 이 담 너머로 국그릇이 오고 가고 했던 그 돌담. 국그릇처럼 따스한 이웃과의 인정이 숨을 쉬던 곳이 바로 돌담이다.
돌담은 자기를 때리는 비바람에게 가슴을 열어 줄 줄 알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도 가졌다. 어느 수필가는, “돌담은 큰 돌, 작은 돌, 둥근 돌, 네모난 돌, 때로는 깨어지고 부서진 돌까지 모두가 제 모습 그대로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작거나 깨어졌다고 무시되거나 버려지지 않고, 작으면 작은 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로 서로 힘이 되어 함께 모둠을 이룬다.”고 하였다. 우리 사회도 이러한 돌담 같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 돌담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대신 회색빛 블록 담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근대화라는 물결에 돌담도 함께 밀려나 버렸다.
새마을 운동의 필요성과 그 성과의 지대함은 모두가 잘 아는 바다. 그러나 우리는 성급한 근대화에 쫓긴 나머지,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우리 것을 너무 소홀히 다루어 버리지는 않았나 하고,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농촌의 블록 담을 볼 때마다 그런 걸 느끼곤 한다. 우리의 돌담이나 흙 담의 윗면에 기와 같은 것으로 덮어서, 우리의 풍물을 살렸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의 근대화가 곧 서구화란 말과 동일한 뜻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에게 보이려고 우리가 새마을 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외국인이 우리의 농촌을 둘러보면 무어라 할 것인가? 이런 것은 외국에도 얼마든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들도 어쩌면 실망할 것이다. 블록 담은 돌담처럼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 높이도 돌담보다 훨씬 높아졌다. 막히고 단절되고 각박해져 가는 인심의 도(度)를 블록 담에서 보는 것 같아, 한 가닥 안타까움마저 든다.
좀 더 나은 것을 구하려는 성급함 때문에 오히려 자기의 좋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어야겠다. 전후 일본에서는 이 점을 경계하여 아이 씻은 물을 버리는데 아이까지 함께 내다 버리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자신들을 다독거렸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사극 같은 역사물이나 옛 조상들의 얘기를 다룰 때 ‘민속촌에서 촬영’ 했다는 자막을 보면서, 저곳이 아니었다면 어찌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며, 또한 우리의 풍물이 없어져도 참으로 깡그리도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런 아쉬움을 어찌 한낱 돌담에서만 느끼겠는가. 서구의 핵가족 제도를 선망한 나머지, 한때 우리의 고귀한 전통인 효(孝)를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팽배한 적도 있다.
조그만 일이라 할 지 모르지만, 이런 예를 근래의 우리 언어 생활에서도 보게 된다. 이때까지 쓰이던 순수한 우리말 마을 이름을 버리고, 한자말로 행정명을 삼았다는 보도가 그러하다. 행정명이 반드시 한자말로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없다. 가능하다면 한자어로 된 이름도 고유어로 바꿔야 함이 옳겠거늘, 널리 쓰이고 있던 고유어 마을 이름을 굳이 한자식 행정명으로 바꾸다니 매우 섭섭한 일이다. ‘대나무골, 납닥바우, 물뜸이, 쪽골, 새터, 밤실 등으로 불리는 우리말 지명이야말로 다름 아닌 무형 문화재다. 우리는 이를 ‘속칭’이라 부르고들 있지만, 결코 비천하고 더러운 이름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문화재가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기왓장 하나, 도자기 한 점은 귀중한 줄 알면서도, 보이지 않는 언어 문화재의 소중함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이는 마땅히 보존되어야 한다. 지금도 편지 겉봉에 가끔 이러한 속칭을 행정명 곁에 부기하는 것을 본다. 이것은 우리말로 된 ‘속칭’이 얼마나 그 지방 사람들의 가슴에 밀착되어 있으며, 유용성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러한 효용성도 살리고 우리의 유산도 보존할 겸, 순수한 우리말 마을 이름 내지는 지명을 다시 살려 썼으면 싶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지리산 기슭 대원사 계곡에 가랑잎초등학교라는 고운 이름을 지닌 학교가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이름만 들어도 가랑잎이 굴러다니고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산골의 조그만 초등학교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산새 소리가 들리고, 바람결에 일렁이는 학교 뒤 억새풀의 모습도 보이고, 마당 곁에 피어 있는 메꽃의 향기도 코에 스친다. 그 속에서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개울물 같은 맑은 소리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우리나라 서울 이름이 한양(漢陽)이 아닌 고유어 ‘서울’임은 실로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