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비 수금원 소년>/구연식
1960년대 초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시기여서 사회 전반에 걸쳐 국민들의 생활이 참 어려웠다. 몸이 아무리 아파도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웠고, 중증 환자가가 아니면 몸으로 때우거나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 같은 단방약으로 대처했다.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과학적으로 풀기보다는 인명재천이라는 운명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아무리 산간벽지라도 면단위 소재지에는 보건지소가 설치되고 있어 간단한 응급처치로 국민보건복지에 부응하고 있다. 60여 년 전 내가 사는 왕궁면 소재지에는 공중진료소는 없었고 우리 마을 옆집에는 송씨 의사선생이 의료계 학교를 수료했는지 간이 민간 진료소를 설치해 놓고 진료를 하였다. 바로 우리 옆집인지라 나는 수시로 그 집을 들랑거렸다. 의사 부인은 부엌에서 날마다 주사기와 각종 의료 기구를 솥에다 넣고 삶아서 소독하는 것이 일과였다. 의사 선생 집에서는 언제나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해도 나는 그 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진료실 벽에는 인간 해부도가 걸려 있었고, 해부도에는 알기 쉽게 그 기능을 그림으로 그려놓아 글씨를 모르더라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나는 해부도가 너무도 신기해서 그 집에 가면 언제든 그 해부도를 보고 오는 것이 내가 그 집을 가는 목적의 제1순위였다. 의사 아저씨는 인근 마을에서 긴급 호출이 있으면 두툼하면서도 낡음하여 축 처진 왕진가방을 자전거에 싣고 달려갔다. 지금 생각으로 보면 119 호출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왕궁면 지역에서는 대단히 용한 의사로 알려져 있었다. 인근에 있는 마을 사람들로 날만 새면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당시는 사람을 진료하는 병원도 보기 힘들었는지라 동물병원은 생각지도 못한 시대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강아지나 닭 등을 안고 와서 치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금이 없어도 우선 급하여 그냥 오거나 곡식을 가져와서 진료비로 계산하고 가는 경우도 있었고, 외상으로 달아 놓고 가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외상진료비를 꽤 기간이 지났어도 갚지 않은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선생은 나한테 왕궁면 일대의 외상장부를 보여주면서 일요일에 외상값을 받아오면 용돈을 주겠노라는 말을 나에게 했다. 용돈을 준다는 말씀에 귀가 번쩍 띄어 난생처음 용돈이 생긴다는 말에 무조건 “예예”하고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때 내 나이는 14세쯤으로 기억된다. 마을마다 간단한 진료비 외상 내역을 적은 장부를 건네받고 용돈 받을 욕심으로 부모님 몰래 나섰다. 해당 마을로 어르신 이름을 찾아 진료비 외상값 받으러 왔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모두 다 한결같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환자가 급할 때 진료해 주었음으로 고마움에 따른 진료비는 꼭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진료비가 비싸다는 투정이었다. “아니 병아리다리 부러져서 그까짓 것 머큐럼 빨간약 몇 방울 발라주고 되게 비싸네∼”하면서 외상값을 주기는커녕 “다음에 와라”하고 언성을 높여 핀잔을 주기도 했다. 여러 동네를 용돈 몇 푼 좀 벌려고 발품 팔며 돌아다녀도 수금 상황은 별로였다. 돈 대신 무거운 곡식을 주는 집도 있어서 쌀자루를 메고 해가 저물도록 돌아다녔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 수금장부와 돈, 그리고 쌀을 의사 선생께 드렸더니 나에게 용돈을 주었다. 처음 만져본 용돈이 너무 좋아서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모두 드렸더니 어머니는 좋아하기는커녕 혼을 내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머니 허락 없이 그런 심부름을 어떻게 했고 어린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하는 안쓰러운 표정도 스며있었다. 어머니는 그 용돈을 나의 호주머니에 도로 넣어주면서 다음에는 그런 일은 부모 허락 없이 하지 말라며 오늘 일은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할 것이라면서 용서해 주었다. 그런데 달포쯤 지나서 의사 선생은 나한테 지난번 미수금 받으러 갔다 오지 않겠느냐고 다시 말씀을 하였다. 어머니와의 약속도 있었지만 그 용돈이 솔깃하여 이번만 또 하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마을마다 사람 이름도 익혀두었고, 여러 가지 요령도 생겨 해가 동동할 때 마치고 올 수 있어서 용돈도 벌고 어머니한테 걸리지도 않고 일을 무사히 마치고 다녀올 수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 의사 선생은 무자격 의료인이 아니면 병원을 개업할 경제 능력이 없어서 시골집에서 진료를 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 뒤 나는 객지에서 학업을 마치고 직장 따라 옮겨 살았다. 몇 년 후 고향에 돌아와서 그 병원 집을 찾아가 보니 지붕만 그대로 남아있고 폐가가 되어 을씨년스러웠다. 마치 안톤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연상되어 마음이 써늘했다. 그 의사 선생은 우리 마을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진료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지금도 병원 터 그 집이 시골 우리 집 바로 옆이어서 가끔 일부러 그 집 모퉁이를 둘러보곤 한다. 그 때 신기하게 보였던 인체해부도도 이젠 찾아볼 수가 없다. 싫지 않은 소독 냄새가 없더라도 그곳에 가면 지금도 그 시절 그대로 나를 반겨준다. 의사 선생이 시골뜨기 소년인 나한테 왜 진료비 수금을 두 번씩이나 맡겼는지 궁금하다. 그 용돈 때문에 수금책을 자처했던 나 자신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