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우정(喜雨亭)

창덕궁의 주합루 바로 뒤편 언덕에 희우정(喜雨亭)이라는 것도 있다. 원래 이름이 ‘취향정(醉香亭)’으로 인조 23년(1645)에 지어진 초가로 된 정자였다.
주합루 서남쪽에 위치한 희우정은 원래 초옥으로 취향정(醉香亭)이라 했으나 숙종 16년(1690), 한발(旱魃)에 기우(祈雨)하여 단비를 얻으니 숙종이 기쁜 나머지 이를 기념하여 개명하여 희우정(喜雨亭)이라 하고 초당이던 정자를 기와로 지붕을 바꾸었다 한다. 정면 2칸, 측면 1칸, 우진각지붕, 굴도리집으로 전면과 동측면, 후면에 퇴마루를 놓으니 서측면에는 다락이 나와 있고 단청이 없는 백골집이다.
이들 집들은 궁궐 안에 있는 집인데 다 같이 면앙정 같은 작은 집이다. 살림집이 아니므로 부엌이 딸린 집은 아니지만 정자에 방을 들인 모양으로 보나 방안에 벽장까지 꾸며 놓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사람이 기거했을 것이다. 백성의 집과 다른 점은 아궁이를 들여다 보니 장작을 때는 아궁이가 아니다. 궁궐에서 하던대로 화로에 숯을 피워 구들 밑에 밀어 넣게 되어 있다.
또한 <희우정명병서喜雨亭銘幷書>를 지어 그 뜻을 남겼다.
경오년庚午年(숙종 16년) 봄에 비가 오고 개이고 함이 순조로워 풍년을 예상할 듯하더니, 사월이 되어 여름에 이르자 달포를 비가 내리지 않아 마음으로 걱정이 되기를 마치 몸에 병이 있는 듯하였다.
이에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총칭)에게 명하여 묘사(廟社, 종묘와 사직)와 교야(郊野, 궁궐 바깥의 땅)에서 비를 빌도록 하였는데 이날 기축(己丑)에 드디어 비가 내려 봄보리와 가을보리가 차츰 되살아나고 벼도 성하게 자랐다.
나라 사람들이 길에서 서로 기뻐하였고, 농민은 들에서 서로 좋아하였으며 걱정하던 이 즐거워하고 병든 자도 기뻐하였다. 이 어찌 보필하는 신하의 정성이 남김없이 신명(神明)에게 달했기에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겠는가?…
농사가 국가경제의 기반이었던 임금으로서 당시에 천재지변을 임금의 덕과 연관지어 생각했기 때문에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희우(喜雨)’ 즉 ‘반가운 비’였다. 그래서 희우를 소재로 한 시가 적지 않다.
영조가 오랜 가뭄 끝에 오는 비를 기뻐하며 지은 시 <희우(喜雨)>는 이렇다.
새벽부터 한밤까지 가뭄 걱정 이 마음 애태우며
온갖 정성 산과 내에 다하라고 명하였네
반가운 비 어제 오늘 내 시름 씻어주니
바라건데, 단비 넉넉하게 온 나라에 내려라
그리고는 사위 김한신(金漢藎) 에게 화답하여 시를 바치게 했다.
김한신의 시는
붉은 깃발 선명하고 햇볕은 타는 듯
가뭄 오래되어 냇물도 말랐네.
기우제를 지내려니 하늘이 먼저 감동하여
주룩주룩 단비가 우리 서울부터 뿌려 주네.
기우제(祈雨祭)는 지내지 않더라도 옛날에 비가 오기를 바랐던 조상들의 마음이라도 되새겨 보면서 비가 흡족히 내리기를 기대해 본다.
나라 안이 몹시 가물면 궁중에서도 기우제를 지내는데 임금님의 침전 앞에 큰 항아리를 갖다 놓고 물을 담아 도롱뇽을 잡아넣는다. 그리고 내의원에 소속된 동남(童男) 20명에게 푸른 옷을 입혀 둘러 세우고 버들가지 들려 항아리를 치며 주문(呪文)을 외우게 했다.
도롱뇽아 도롱뇽아 구름을 일구어
이슬을 토하여 비를 내리게 하라
그러하면 너를 살려줄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기우제로 흔한 것 중에는 부녀자들이 강가에 모여 키에 물을 담아 나르게 하여 물이 새는 것이 마치 장대비 내리듯 하게 하는 것이다.
공감주술(共感呪術)이라 하여 비슷한 것끼리는 서로 공감하여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원시적 사고방식에서 생겨난 기우제다.
옛날 경주지방에서는 아가씨들이 손잡고 돌며 음란한 춤을 추고, 날이 가물면 젊은 무당들로 하여금 버들가지로 만든 푸른 고깔을 머리에 씌우고 치마를 들추었다 놓았다, 저고리 자락을 펼락 말락 속살을 슬쩍슬쩍 들추며 추는 음탕한 춤(淫舞)을 추었다.
물가에 자라는 버들가지는 비를 부르는 주력이 있고,
음탕한 춤은 양기(陽氣)에 치인 음기(陰氣)에 활력을 주어 음기에 속하는 비를 부를 수 있다고 여긴 때문이다.
삼남 지방에서 날이 몹시 가물면 여인들로 하여금 산위에 올라가 방뇨를 시켰던 것도 같은 이치다.
미국 아메리카 인디언간에 전해 오는 전통 기우제중에 인디언들의 성지에 모여 비 뿌리듯 물을 뿌리고 다니며 비를 부르는가 하면, 개구리를 담은 항아리를 치며 주문을 외우고, 아가씨들이 손잡고 돌며 음란한 춤을 추어 비를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도롱뇽과 개구리 차이가 있을 뿐 너무 흡사하다. 원시적 사고방식인 공감주술이 공통분모로 작용하여 기우제가 닮은 건지, 아시아와 미국 대륙이 연륙(連陸)돼 있을 때 알래스카를 거쳐 간 동북아시아 문화가 미국에서 그렇게 살아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전통적으로 사직단(社稷壇)이라는 것이 있다. 토지(土地)를 주관하는 사신(社神)과 오곡(五穀)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에게 고을의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매년 중춘과 중추나 혹은 나라의 큰일이 있을 때에 사직제를 지내고,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풍 사직단은 세조 14년(1469)경 당시 현풍 현감이었던 채석견(蔡石堅)이 현서(縣西)인 지금의 달성군 현풍면 성하리에 설치하였으나 순종 2년(1908)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허되고 그 자리에 신사(神社)를 지었던 것을 1945년 1월 우리 애국지사들이 신사를 불태워버렸다.
현재의 사직단은 1996년 1월 향토사학자 채수목의 자문을 얻어 이곳 상리에 사직단을 복원하였고, 2009년 12월 향토사학자 윤홍석 등 유림의 주선(周旋)으로 옛 문헌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의 고증考證에 의하여 2010년 6월 지금의 사직단을 개축 복원하였다.
용은 물을 좋아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용이(물이 증발되어 올라간 결정체인) 구름을 몰고 다니고 비를 내린다는 믿음을 가졌다.
구름은 땅에 흩어져 있는 음기(陰氣)가 하늘로 올라가 뭉친 것이고, 빗방울은 그 구름이 흩어져 땅으로 떨어지는 양기(陽氣)이므로, 비(雨)는 용의 신성한 기운을 지닌 특별한 물로 여겨졌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농사를 짓는데 꼭 필요한 풍우(風雨)를 용이 일으키고 몰고 다닌다고 여겨, 가뭄이 심할 때는 용에게 고사를 지내며 비를 내려 달라고 빌었다. 농업 비중이 큰 우리나라는 용이 신성한 서수(瑞獸)로 여겼다.
옛날 우리나라의 마을 신성한 곳에 긴 막대 끝에 새를 장식한 ‘솟대’가 있었다. 솟대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솟아오른 장대’에서 따온 말로 짐작된다. 새 모양은 대개 오리 혹은 정체를 잘 알 수 없으나 원래는 기러기가 본보기였다. 솟대의 새는 하늘에 계신 신과 사람들 사이를 오고 가며 마음을 전하는 전달자로, ‘신조(神鳥), 신의 새’라고 불렸다.
그래서 풍년을 비는 농부는 소중한 볍씨를 주머니에 담아 솟대에 높이 달아매어 바치면서 풍년을 기원했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을 경우 마을에서는 입구에 붉은 칠을 한 솟대를 세워 하늘에 감사의 뜻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면서 소리꾼을 불러다가 기러기 울음소리를 내도록 한 것도, 기러기를 통해 하늘에 계신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함이었다.
그런가 하면 솟대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장승이 무서운 얼굴을 한 채 땅을 지킨다면, 솟대는 여러 마리의 새가 나무에 앉아 하늘을 지키는 것이다.
충주 남한강의 목계나루터에 세워져 있는 솟대는 나루터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목이기에 장승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물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안녕을 기원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바로 옆에 목계대교가 놓여져 나루터의 기능은 잃었다.
설악산 십이선녀탕(十二仙女湯) 계곡은 열두 개의 물웅덩이와 열두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개수는 계절, 수량,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며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년~1982년)은 8탕 8폭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예전에는 암반이 패여 만들어진 물웅덩이나 소가 많다하여 탕숫골, 탕수동(湯水洞)이라고 불리었으며 여러 물웅덩이 중 하나인 '용탕(龍湯)'은 뒷벽의 큰 바위굴(龍穴)에서 용이 나왔다 하여 가뭄이 계속되면 기우제를 올렸던 곳이다. 모양이 복숭아와 비슷하다하여 '복숭아탕'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관왕묘(關王廟)라는 것이 있다.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이름난 장수 관우(關羽) 운장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의 관왕묘에 대한 국가적 제례는 처음에는 외교적 입지 때문에 시작되었으나,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 시대부터는 자발적인 행사로 변화하게 된다.
광해군은 관왕묘 제례를 매년 경칩일과 상강일에 올리도록 했는데, 이는 관운장을 치우와 같은 군신(軍神)으로 대접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조선의 관운장 신앙은 점차 진전되어 숙종 때는 관왕묘의 제식(祭式)에 대한 지침이 내려지기도 하였고, 영조 때에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소사(小祀)]로 규정되었고, 정조 때에는 소사에서 [중사(中祀)]로 격상시키고 제례악도 제정하였을 정도로 국가가 능동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한편 숙종 ․ 영조 ․ 정조 대를 거치면서 국왕이 관왕묘에 친행하는 예도 많아졌는데, 영조 15년(1739) 5월에는 왕이 친히 사직과 우사(雩祀)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안동 관왕묘(安東 關王廟)는 [광감루(曠感樓)]를 지나 좌우에 동재 · 서재(東ㆍ西齋)가 있고 조금 더 오르면 묘우삼문이 있다. 대문에 [무안왕묘(武安王廟)]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사당인 무안왕묘가 자리잡고 있다.
관왕묘에 석상(石像)이 봉안된 곳은 이곳뿐인데 당시 안동부사의 현몽에 의해 무안왕상(武安王像)을 조성 봉안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