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 (루가 2,36-40)
Worshiped night and day with fasting and prayer.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고 악을 물리쳐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제1독서). 한나는 여예언자로서 인생의 대부분을 홀로 지내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온갖 정성을 쏟아 왔다. 그러한 그녀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아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드라마에는 언제나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주인공만으로 흘러갈 수 없습니다. 주인공 말고도 조연, 그리고 수많은 단역이 필요합니다. 이는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이시기는 하지만, 예수님 밖에도 수많은 조연과 단역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루카 복음서에서는 모범적인 인물로 그려진 단역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자식이 없음에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에 주어질 구원을 기다리며 한평생을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나는 평생 과부로 어렵게 지냈지만 성전지기로 살면서 하느님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 밖에도 겸손한 모습의 모범을 보인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 세관장으로서 죄를 지으며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자캐오, 예수님께 다가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죄 많은 여인, 예수님의 옆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된 강도, 스스로 나서서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단역들이 보여 주는 여러 이야기가 엮일 때 드라마의 전체 내용이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의로움을 잃지 않은 이들 등의 이야기가 모여 복음이 완성되었습니다. 드라마의 단역들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것처럼, 복음서의 단역들은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데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처럼 위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처럼 큰 인물이 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단역들처럼 크게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주님의 눈에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약해지지 마
-전삼용신부-
송정림씨는 자신의 책 ‘화양연화’에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영화 주인공은 예쁘고 착한 젊은 여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중년 아줌마. 아이가 셋이며 두 번 이혼했고 무시를 당하면 절대 못 참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가리지 않고 다 하는데 주로 하는 말은 지독한 욕설입니다. 의상은 가슴이 훤히 보이는 밤무대 의상. 걸음걸이는 투박함 그 자체. 가방끈 무지 짧습니다. 통장 잔고는 달랑 16달러. 그런 그녀에게 있는 유일한 재산 한 가지. 그건 바로 용감무쌍하다는 것. 그녀의 이름은 에린 브로코비치.
직업소개소를 전전하며 직장을 알아보던 에린은 차 사고로 알게 된 변호사 에드를 무턱대고 찾아갑니다. 자식이 굶게 생겼는데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요. 돈 되는 일은 무저건 해야 했습니다. 에린은 “일 좀 시켜 주세요.”라며 변호사 사무실에 눌러앉아 버립니다. 거친 말투에 맘대로 입은 옷차림, 남들 이목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태도... 가람들은 그녀와 일하기 싫어했고 그녀는 쫓겨나기 직전이었지요. 그런데 에린은 이상한 의료사고 기록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대기업 공장에서 크롬 성분이 유출되고 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불의는 절대 못 참아!”
지금껏 그 누구도 대기업에 맞장 뜨는 일은 차마 벌이지 못했건만 이 무식한 아줌마는 풍덩 뛰어듭니다. 그리고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자,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에린은 용감한 것 하나로 최고의 성공을 거둡니다. 수질오염의 피해 주민 643명에게 3억 2천 3백만 달러라는 큰 보상금을 타 내는 소송에게 성공을 거둔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며 이렇게 외칩니다.
“오~ 예!”
오늘 복음에 한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만 단식과 기도로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목격하고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성경에 기록되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단 하루라도 살게 하신다면 그 이유는 그 하루를 그냥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일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언가 역사에 남을 일을 하는데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그런 일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고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라고 예언자가 못 되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시바타 도요는 올해 102세 할머니입니다. 도요가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모아둔 100만 엔을 털어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판 100만부가 돌파되어 지금 일본열도를 감동 시키고 있습니다.
1911년 도치기시에서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도요는 열살 무렵 가세가 기울어져 갑자기 학교를 그만둡니다. 이후 전통 료칸과 요리점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20대에 결혼과 이혼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33세에 요리사 시바타 에이키치와 다시 결혼해 외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가며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1992년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는 우쓰노미야 시내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 하고 있습니다.
배운 것도 없이 늘 가난했던 일생. 결혼에 한번 실패 했고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한 후 2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던 노파. 하지만 그 질곡 같은 인생을 헤쳐 살아오면서 100년을 살아온 그녀가 잔잔하게 들려주는 얘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먹고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습니다. 그분의 시를 몇 편 감상해 볼까요?
<비밀>
나,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의 격려를 받아
지금은 우는 소리 하지 않아
아흔 여덟에도 사랑은 하는 거야
꿈도 많아 구름도 타 보고 싶은 걸
<나에게>
뚝뚝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멈추질 않네
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언제까지
끙끙 앓고만 있으면 안 돼
과감하게 수도꼭지를 비틀어
단숨에 눈물을 흘려버리는 거야
자, 새 컵으로 커피를 마시자
<너에게>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어 있으면 안 돼
나도 96년 동안 못했던 일이
산더미야
부모님께 효도하기
아이들 교육
수많은 배움
하지만 노력은 했어
있는 힘껏 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자 일어나서
뭔가를 붙잡는 거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출처: 다음 카페 ‘사랑과 평화’]
마데 데레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가난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지금도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요? 새 해에는 마음만 먹이면 될 수 있는 그런 참다운 부자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 박사는 BBC 방송과 함께 행운에 대한 실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먼저 신문광고를 내서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100명 모았습니다. 그리고 두 부류 간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박사는 그들에게 미리 준비한 신문을 주고,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사진이 있는지 파악하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기 전에 신문 중간쯤에 커다랗게 글을 써놓았지요. “이 글을 발견한 사람은 내게 와서 돈을 달라고 조용히 말하시오.”라고 말입니다.
결과는 ‘행운이 따른다’는 쪽의 많은 사람들이 박사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운이 없다’는 사람들은 글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사진 세는 데에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박사는 “운이 없는 사람들은 긴장한 상태였고, 그런 긴장이 행운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로 막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즉, 사진의 숫자를 정확히 세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눈앞에 있는 커다란 것을 놓치고 만다는 것이지요.
사실 어떤 사람은 행운이 항상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러움 속에서 바라보고, 나 역시 그러한 행운이 왔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동시에 불공평한 하느님이라고 불평불만을 던져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행운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왔었고, 내 자신의 문제로 인해서 발견하지 못할 때가 더 많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한나라는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았을 뿐 과부로 여든네 살까지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회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이 한나라는 예언자의 삶이 얼마나 기구합니까? 당시 혼인할 때의 여자 나이가 보통 15살이라고 따졌을 때, 20대 초반에 과부가 되어 60년 가까이를 혼자서 그것도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성전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는 정말로 행운이 따르지 않는 불행한 사람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주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하며 주님께 매달립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구세주 메시아를 직접 보고, 당신의 품에 안는 영광을 즉, 모든 이가 부러워할 수 있는 커다란 ‘행운’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 어렵고 힘들어도 그것이 결코 벌이나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과거를 자랑하지 마라. 삶을 사는 지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셰익스피어)
“한나라는 예언자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양승국신부-
<기다리다보면>
하느님께서 의인들에게는 넘치는 복을 주시고 악인들을 벌하시리라 ‘상선벌악’ 사상은 신앙인들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근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끝까지 풀리지 않고 고민하게 만드는 숙제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의인의 불행이요, 선인의 고통이었습니다.
이런 고민거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대두되는 잘 해결되지 않는 숙제입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런 꼴을 보게 하시는지?”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형벌 같은 일을 우리 가족들에게 겪게 하시는지?”
예수님께서 강생하셨던 유다 백성들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백성, 가장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받던 선택된 백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정작 실제 삶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살아갔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다방면에 걸친 굴욕적인 생활을 하루하루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왕이라고 있긴 한데 로마제국의 꼭두각시였습니다. 그나마 믿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한 몫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 예언자는 당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던 유다 백성들 가운데 대표선수였습니다.
그녀가 한 평생 겪어온 고통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열여섯의 나이에 혼인한 그녀는 남편과 혼인한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의 나이는 겨우 스물셋, 그때부터 60년 동안 홀로 살아왔습니다.
당시 여자로서 가장 큰 행복은 남편 잘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에 종속되어 한 평생 별 탈 없이 백년해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건강한 아들 펑펑 잘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나는 정말 빵점이었습니다.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 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고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 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기도와 단식
-이병우 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여예언자는 남편과 일곱 해를 살다가 과부가 되어 그 후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과 기도를 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사람입니다. 예언자 한나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슬퍼하며 원망과 탄식으로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기도와 단식 안에서 오히려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킨 여인입니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충실함이란 덕목은 쉽게 잊혀 가고 있습니다. 이제 2010년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먹고 마시는 송년회, 망년회도 중요하지만, 2010년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왔는지를 살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보다 나은 내년의 나와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위해서 말입니다. 나 자신은 하느님께 얼마나 충실하였는지, 또 나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충실하였는지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얼마나 충실하였는지를 잘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나처럼 고통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얼만큼 기쁨으로 승화시켰는지를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우리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한나의 후예들
- 김혜경-
과부 예언자 한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복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과부는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가장 우선적인 사람으로 손꼽힌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힘없는 여자가 혼자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회 · 문화가 주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밤낮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와 단식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과 시련이 끊이지 않는 인생에서 하느님만이 삶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과부란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성을 일컫는다. 국어사전에도 등장하는 과부의 종류는 크게 청상과부 (靑孀寡婦) 와 생과부 (生寡婦) 가 있다. 청상과부는 알다시피 젊어서 남편을 잃고 혼자 된 여자지만, 생과부는 ①남편이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거나 소박 맞아 과부나 다름없는 여자 ②약혼자나 갓 결혼한 남편이 죽어 혼자 사는 여자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 생과부는 이러한 사전적 이유 외에도 직업 (주말부부 포함), 자녀교육, 버림, 이혼 등으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또 남편이 있되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은 상황에서 살아가는 생과부도 있다. 우리 속담에 과부의 남모르는 설움과 고단한 삶을 비유하여 ‘과부가 일생을 혼자 살고 나면 한숨이 구만구천 두라.’ 라고 했다. 또 먹는 것이 부실하여 허약해진다는 뜻으로 ‘과부가 찬밥에 곯는다.’ 는 말이 있다. 반면에 남편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되어 과부의 마음이 편하다는 뜻으로 ‘과부는 찬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 는 역설적인 속담도 있다. 이른 새벽 성당이든 예배당이든 많은 과부가 모인다. 그들은 한나처럼 분명 하느님만을 우주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그분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몰아와 몰입
-김찬선신부-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며칠 전, 부산에서 영 한우리 송년 자선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오래간만에 전문 연주가의 연주를 듣는 기회였고,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연주장에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렸는데, 그것은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연주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주가 끝나고 제가 인사 겸 소감을 얘기하게 되었을 때 저는 그가 피아노로 기도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얘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의 연주는 그저 연주가 아니고 기도라고 느끼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 그가 몰아의 상태에서 피아노에 몰입을 하고 피아노 안에서 청중과 대화하고 소통하였으며 비록 신자가 아니지만 하느님과 대화하고 소통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몰아(沒我)와 몰입(沒入)은 동시적인 두 현상입니다. 몰아의 경지에 도달해야 어디에 몰입을 할 수 있고, 어디에 몰입을 하게 되면 몰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에게서 빠져나오지 않고 절대 다른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나에게서 나와야지만 다른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때 나에게는 없어져야 할 “나”가 있고 나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것 안으로 들어가는 “나”가 있습니다. 내가 몰락해야 내가 다른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빠져나와 몰락해야 할 “나”는 무엇이고 다른 것 안으로 들어가야 할 “나”는 무엇입니까?
빠져나와야 하고 그래서 몰락해야 할 “나”는 육의 나, 자기중심적인 나, 세속적인 나이고 다른 것 안으로 들어가야 할 “나”는 영적인 나, 사랑의 나, 신적인 나입니다.
이 육의 내가 죽지 않으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내가 죽지 않으면 이웃 사랑 할 수 없으며 사랑이신 하느님 안으로 몰입할 수 없습니다.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하늘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한나라는 예언자가 아기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과, 성가정이 나자렛으로 돌아가 거기서 아기 예수는 튼튼하게 잘 자랐다는 내용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성전 분위기를 좀 살피면 좋겠네요. 예수님의 가족 외에도 다른 이들이 많이 오고가고 할 터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과 성 요셉과 성모님 그리고 시메온과 한나가 도드라져 나옵니다. 배경과 인물, 인물과 배경의 관계성 속에서 깊이 머물다 보면 뭔가 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비춰져 나올지 모릅니다.
다음으로는 한나의 모습을 살핍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평소 한나의 삶의 모습을 살펴봄도 유익할 것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이래로 성전에서 지극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겨오는 이의 모습을 보는 거예요. 조심할 것은 너무 간단히 결론을 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훌륭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것이 중요한데 난 그렇지 못하다면서 한숨이나 내쉬는 식으로 쉽게 정리해 버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한나가 이야기할 때 성모님과 성 요셉의 표정이나 행동도 유심히 보는 것이 좋겠고, 포대기에 싸여 있을 아기 예수님도 물끄러미 바라보면 도움이 될 터입니다.
끝으로 성가정이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광경과 아기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좀 더 꼼꼼하게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과의 관계,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 혼자 있는 모습 등을 두루 보면서 선입관에 젖지 않은 신선한 기운과 에너지를 길어올리면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관상에 있어 자연스레 떠올라 오는 이미지나 생각 그리고 느낌에 민감하게 깨어 있으면서 주목할 일이지, 인위적이거나 상투적인 생각이나 상상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했으면 합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역대의 대통령 중에서도 매우 겸손한 대통령으로 유명했지요. 그의 겸손을 보여주는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링컨 대통령이 백악관 복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더랍니다. 마침 지나가던 직원이 있었고, 그 직원은 링컨 대통령이 쭈그리고 앉아 신발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직원은 대통령에게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신분으로 직접 구두를 닦으시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에 링컨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신발을 내가 직접 닦는다고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그건 내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지금 내 행동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의 신발을 자기가 직접 닦는 것이 결코 문제되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신발을 남에게 맡기는 사람이 오히려 문제 있는 사람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오히려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문젯거리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렇게 문젯거리를 만들어 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축시키고 많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특별한 모습으로 오신 것 같기도 하지만, 그 특별한 부분은 아주 일부분이고 나머지의 삶은 우리와 아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때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로 할례를 받던 날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12살 때에 있었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12년 동안의 예수님 삶은 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기 때문에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우리와 완전히 똑같이 사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신데, 우리들은 왜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취하려고 노력할까요? 즉, 다른 사람보다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윗자리에 올라가서 지배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남들과 내가 달라야 한다는, 그래서 내가 윗자리에 올라가고 지배해야 한다는 이상한 시선은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겠다는 아름다운 시선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자신의 서간에서 적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한다면, 항상 얻는 결과만 얻을 것이다(스티븐 코비).
날마다 주님을 인식하기
-손영순 수녀-
임박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흔히 하는 말에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고 죽겠구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죽는 것이 모든 죽음의 완성으로 보기도 합니다. 호스피스 현장에서도 돌아가시는 분이 눈을 감지 못하면 주변 사람들은 떠나는 이가 무엇인가 한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못다 이룬 일,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합니다.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떠나는 이들이 뭔가 마음속에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 의지로 자신의 생명을 놓지 않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의학적으로, 신체적인 상태로는 이미 죽음에 이른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그 사람이 올 때 혹은 외국에 살다가 공항에 도착해서 전화로 들려주는 목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편안하게 눈을 감습니다.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까지 오직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을 기다리며 밤낮으로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겼던 한나는 자신의 전 생애를 오직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미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갈망이 그녀의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그 아기가 세상의 구원자임을 선포하고서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메온과 함께 한나는 이 아기를 세상에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하였습니다.
빠지면 빠지니 빠지지 말라!
-김찬선신부-
한 해의 끝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시간 앞에 섰습니다. 시간 앞에 서니 그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았음을 새삼 느낍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무엇에 몰두했을 때, 무엇에 빠졌을 때입니다. 노는 것에 빠졌을 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빠졌을 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일에 내가 빠졌을 때 하느님은 내게서 빠지십니다. 내가 놀이에 빠져 있을 때 하느님은 내게서 빠지십니다. 아레오파고스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빠지고 세상사에 빠지고 세상의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고, 이때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빠지십니다.
오늘 요한의 편지는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하고 얘기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빠지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빠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세상도 사랑하지 말고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함은 베푸는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이웃 사랑을 해야 합니다. 바라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은 오히려 이웃에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베푸는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받으려는 사랑, 만족을 구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 대해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는 일, 놀이, 헛된 생각 등, 세상사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 바람에 하느님도 빠지고 이웃도 빠졌습니다.
올 해의 끝에 와서야 가는 세월을 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았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반성합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오롯이 하느님을 섬겼던 오늘 복음의 과부 한나를 보며 하느님이 빠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부끄럽고 허무한 것인지 돌아봅니다.
인생의 최종 목적
-전삼용신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장래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고 시킬 때가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누구나 다 하고 싶었던 비현실적인 꿈인 ‘대통령’이,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오면서 그냥 ‘정치인’에서 나중에는 돈이나 많이 벌자는 식으로 대학교를 경영학과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떤 선생님이 인생의 목적은 무조건 크게 잡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목적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생의 목적이 선생님인 사람이라면 결국 선생님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성공이지만, 목표가 교육부 장관이었다면 적어도 학교의 교장 선생님쯤은 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저는 그 말이 참 맞는 말 같이 들렸습니다.
실제로 1953년 미국의 예일 대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인생의 진정한 목표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예가 있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1. 60% -단기 목표는 있지만 장기적인 목표는 없는 사람
2. 27% -그냥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
3. 10% -인생의 목표는 있지만 생각만 하는 사람
4. 3% -이루어야 할 명확한 목표를 종이에 적어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5년마다 설문조사에 대답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사해 보았더니, 20년 후 결과는 이루어야 할 명확한 목표를 종이에 적어 갖고 있던 3%가 나머지 97%의 사람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실천하는 사람과 그냥 막연하게 생각만 하는 사람과는 세월이 지나면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목표의식을 정확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늘 하루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정해지지만 구체적이지 않은 사람은 오늘 하루의 목표 또한 지니지 못하여 시간을 허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성탄 전야미사를 제가 논문을 쓰고 있는 교수신부님과 함께 드리고 다음날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피렌체 시골 한 본당을 맡고 계신데 로마에서 차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처음에 올라가면서 기름을 완전히 채웠습니다. 기름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탄 전야미사를 마치고 다음 날,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갔던 다른 신부와 신학적 토론을 꽤 깊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연료 계를 보았더니 빨간불이 깜빡깜빡 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토론에만 열중하였던 것입니다. 앞으로 주유소는 이십 킬로 이상이 남았고 차는 이삼 킬로 가면 멈출 것 같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갓길에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으로 레커를 불러 비싼 돈을 지불하고 기름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히 목적지는 로마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지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름이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달리기만 했던 것입니다. 목적지에 진정으로 도달하고 싶다면 매 순간 그 목적지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살피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목표는 저절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안나 예언자는 평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밤낮으로 기도와 단식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려오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와 단식은 이렇게 정신 줄을 놓지 않고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꾸준한 기도로 순간순간 하느님께만 집중할 줄 알았기에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규칙적인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인생의 목표였던 바로 그 분을 만납니다. 비록 아기의 모습이지만 자신이 평생을 기다려온 목적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하고 그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전해 줍니다.’
목표가 없는 인생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불교에서는 물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여인을 그려놓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물동이를 이고 열심히 걷기는 하는데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고생만 하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표라고 다 같은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에 닿으면 지금 죽어도 좋을 목표여야 합니다. 돈이나 권력 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추구하다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는 많은 예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된 목적지는 시메온이 평생 바라오던 것처럼 세상의 구원을 만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고 그 분과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아쉬운 점이 많을 수 있습니다. 아쉬움은 그나마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것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이 더 나빠졌음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년 한 해도 우리 인생의 목적인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만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하루하루 지치지 말고 정진합시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무엇 하나 줄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넘쳐흐르는 사랑이 있었지요.
어느 날 그런 그들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덮쳐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었지요. 그렇게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남편은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러 날을 골똘히 생각하던 남편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속이기로 한 것입니다.
남편은 이웃에게 인삼 한 뿌리를 구해 그것을 산삼 꿈을 꾸어 구했다고 아내에게 건네주었지요. 남편은 말없이 잔뿌리까지 꼭꼭 다 먹는 아내를 보고 자신의 거짓말까지도 철석같이 믿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삼을 먹은 아내의 병세는 놀랍게도 금세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기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아내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내의 건강이 회복된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미소를 띠고 조용히 말했답니다.
“저는 인삼도 산삼도 먹지 않았어요. 당신의 사랑만 먹었을 뿐이에요.”
그렇습니다. 이 사랑의 힘은 고통과 시련까지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을 믿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힘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고통과 시련에 쉽게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나’라는 예언자가 나옵니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여자 혼자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성경 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그 첫 번째가 바로 과부들을 일컫습니다. 왜냐하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연약한 여자 혼자 살기란 쉽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나 예언자의 고통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혼인해서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는 것. 보통 15~16살에 혼인했었던 이스라엘의 관례를 따른다면 22~23살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60년 이상을 혼자 살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요. 즉, 6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어렵고 힘든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 예언자는 절대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삶을 보냈으면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즉, 하느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함없는 사랑을 간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 인류를 구원할 예수님을 만나는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한나 예언자의 그 변함없는 사랑을 내 마음 깊숙이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어떤 고통과 시련도 다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한번 속으면 그 사람을 탓하되 두번 이상 속으면 자기 자신을 탓하라.(탈무드)
“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양승국신부-
<앞으로 6개월, 길면 2년>
가톨릭교회 안에서 출판되는 잡지 가운데 베네딕도회에서 발행되는 "들숨날숨"이란 잡지가 있습니다. 모든 잡지들이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들숨 날숨"은 진지하고 알찬 내용으로 우리들의 흔들리는 영성생활을 바로 잡아주는 방향타 역할에 충실하기에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잡지이기도 합니다.
이 잡지의 주간인 조광호 신부님께서 지난 호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얼마 전 미국 전시회에서 만난 화가 박안젤라 씨는 유방암 4기 환자로,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골수에까지 퍼진 암을 몸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환자답지 않게 그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두 아들과 남편을 보살피는 주부로서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살아있는 세포까지 공격하는 항암주사를 매주 맞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그림으로 그리며 왕성하게 활동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어려운 일들을 자기 일처럼 도와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보호자로 암 병동에 따라가서 그녀가 말기 암 환자들에게 정기적으로 투약하는 주사를 맞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나서야, 그녀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해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초췌한 모습의 말기 암 환자들이 즐비한 병원에서 한 시간 가까이 투약을 받으면서도,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안부를 묻고 농담을 건네며 마치 영양주사를 맞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고통스런 가운데서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부님, 이러한 고통과 시련이 없었다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하고 말했다.
얼마 전 주치의로부터 앞으로 6개월, 길면 2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도, 그녀는 마음속으로 "아닙니다. 나에게 시간이란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오늘>이 있을 뿐이기에 그 시간의 분량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가 믿는 하느님은 그녀에게 병을 주고 약을 주는 하느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녀와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돌아보니 수도자로 산다고 살아오면서도 지독하게도 세상에 집착했던 삶이었습니다. 철저하게도 세상에 안주했던 삶,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던 삶을 반성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극복하고 초월한 자매님의 삶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이 세상에 연연하지 않는 삶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만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들
-심종민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하느님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지속되는 기다림에 지치지도 않고 꾸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한나가 하루쯤 게으르면 어때라고 생각하면서 그날 성전에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준비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한 번만 다녀가시는 게 아니라 늘 그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가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찾아가는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을 뵙는 영광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노력이나 준비도 없이 그저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과욕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의 준비를 통해 하느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세모에
-김찬선신부-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이면 묘한 감상적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빠진다는 표현이 너무 부정적이라면 즐긴다 함이 좋을 듯합니다. 결국 지나가고 마는 것을 뭐 그리 대단한 것인 양 뭐 그리 조바심하고 뭐 그리 집착하고 뭐 그리 열을 내었는지 약간은 우습게 여기기도 하고 약간은 허탈해하기도 하면서 그것들을 놓아버린 해방감과 자유를 즐기고 그것들을 털어버린 후련함을 즐깁니다. 30년도 더 전 대학 시험을 치를 때입니다. 저는 집중력이 꽤 강한 편입니다. 하여 저의 공부는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열심히 듣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예습이나 복습이라는 것도 별로 없고 노트를 하지도 않지요. 그런데도 1등을 곧잘 하고는 하였기에 방자한 마음과 젊은 날의 치기로 대학 시험을 조롱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세상이 대학 합격을 그렇게 중요시 하고 다른 친구들은 대학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매달리는데 나는 그 대학을 일부러 떨어지기로 마음먹고 친구들을 꼬셔서 시험 보는 날 술을 같이 먹고 시험을 치렀습니다. 모두 떨어졌고 저도 당연히 떨어졌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공부할 생각이 없어 한 해를 거의 다 허비하다가 시험을 50여 일을 앞두고 한 번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마음을 먹으니 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고 하루에 한 시간만 자도 피곤하지가 않았고 읽는 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40여 일만에 해야 할 공부 다 하고는 책을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남은 날을 같이 재수하는 친구들을 다시 꼬셔서 들로 산으로 다녔습니다. 친구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시험에 초연할 수 있어야 시험을 더 잘 본다는 저의 말에 끌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행동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친구들을 성당으로 데리고 가서 코헬렛서를 들려주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을 리 없다.” 이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사를 우습게 보는 근거이고 제가 이 세상사에서 승리를 하고 성공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리고 욕심을 부릴 때마다 떠올리는 것이 이 구절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오늘 편지도 떠올립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감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벼운 것도 아니고 욕망으로 살아가서도 아니 되는 소중한 것입니다. 열심히 치열하게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되지만 천상을 갈망하며 살아야 하는 거룩한 것입니다. 요 며칠 사이 가슴 아픈 두 탈북자를 만났습니다. 하나는 하나원을 갓 나와 이제 한국 사회 정착을 시작하는 36세의 남자인데 넘어오는 과정에서 아들을 강물에 떠나보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하나원에 있는 50대의 남자인데 이분 역시 배를 타고 넘어오다 인천 앞 바다에서 큰 파도에 배가 뒤집혀 같이 오던 사람은 죽고 자기는 밧줄로 몸을 배에 묶어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이들에게 삶이란 만족한 삶이냐 아니냐 행복한 삶이냐 아니냐를 한가하게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현실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곧 행복이고 살아있기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 삶일 뿐입니다. 이분들 앞에서 옷깃을 여밉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 황지원 신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광우병 때문에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 가운데 광우병이 걸릴 확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갔습니다. 그 확률에 대해 천만 분의 일이다, 로또를 10번 맞을 확률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는데, 반대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확률보다는 안전한가, 위험한가를 따지는 논쟁이었습니다.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이 ‘걸리지 않는다.’와 동일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보면 낮은 확률에도 병에 걸린 사람한테는 백 퍼센트의 확률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메온은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은총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나한테는 그러한 약속도 성령의 이끄심도 없었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시메온의 모습과 닮아 있다면 한나는 우리 신자들의 모습과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아기 가운데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광우병에 걸릴 확률 정도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나가 매일같이 성전에 찾아온다면, 그 확률은 분명 높아질 것이고, 더 나아가 밤낮으로 기도하는 한나에게 그 확률은 점점 높아질 것이고 어쩌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로 하느님 안에서 백 퍼센트가 된 것입니다. 우연히 성전에 갔다가 그 구원을 본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사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 역시 그분을 스쳐지나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분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 확률은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숫자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에 있음과 없음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때로는 헛된 노력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하나하나가 그분을 뵙게 해주는 생명에 백 퍼센트로 이끌어 주고 있음을 기억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시다.
-박태정신부-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우거진 야자수와 맑은 샘물이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야자수 그늘 아래서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떠 주는 것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그네들이 물을 마시고 나서 몇 푼의 동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 나중에는 동전을 안 주는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동전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더 많은 물을 나오게 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샘터를 최신 시설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샘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주변의 야자수가 샘물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야자수 그늘도 없어져 버렸고 샘물은 말라 버렸습니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 1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 15.) 위의 예화에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떠주면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던 노인이 동전이 쌓여 가면서 더 많은 동전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고 이 끝 없는 욕심이 결국노인을 눈멀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재물에 눈이 멀게 되면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실 수 없으면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세상을 극복하는 사람은 얼마만큼 우리 자신의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우냐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 17.) 영원한 세상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예전에 어떤 가게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랄만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그 가게의 입구에 커다란 멧돼지가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멧돼지를 처음 보는 저로써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저절로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멧돼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맞습니다. 이 멧돼지는 박제되어서 가게의 입구에 장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살아가면서 이렇게 박제된 동물들을 꽤 많이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박제된 동물들은 모두 무섭고 사나온 동물이 아니었나 싶어요. 여러분 혹시 그냥 집돼지가 박제되어 있는 것 보셨습니까? 아니면 박제되어 있는 황소를 보셨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어요. 그런 동물들은 흔하니까 박제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납고 무서운 동물들은 대체적으로 흔하지 않은 동물 같습니다. 사납고 무섭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흔하지 않은 동물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반면에 온순하고 얌전한 동물들은 사냥꾼의 표적이 될 리도 않고, 또한 박제되어 장식품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겠지요.
거칠어봐야 공격 목표만 될 뿐이라는 것을 이 동물의 세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도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성격이 예민하고 공격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곁에 친구가 많은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강한 척 하지만 친구들이 없어서 늘 외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반대로 부드럽고 온순한 분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곁에는 그들과 같은 친구들도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부드럽고 온순한 것이 보기에도 좋고 친구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왜 공격적이고 예민한 모습을 취할까요? 결국은 내가 공격 목표가 되어 오히려 손해가 되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지금 당장 손해 본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것이 바보스러워 보이고, 내가 어쩐지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공격적으로 변해서 스스로 손해 보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살았던 한나라는 예언자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과부의 몸으로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여자 혼자 산다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 반대하면서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한나 예언자는 그렇지 않았지요. 그럴수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과 기도로 주님께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성이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을 직접 보게 되는 영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나의 모습을 반성하여 봅니다.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려는 그래서 모든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는 공격적인 나는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주님처럼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일까요?
부드러운 남자, 부드러운 여자가 됩시다. 빠다킹신부
피해가지 않는 은총
-민경철 신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매달 봉성체 날 뵙게 되던 한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아는 것이 참 많으셨습니다. 말도 기똥차게 잘 하셨지요. 스스로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니 보통이 아니셨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어서 오쇼’ 하면서 인사하자마자 신부를 앉히더니 신앙강좌를 따발총처럼 쏴대신 분이셨습니다. 이 양반이 신부가 되었으면 분명 설교가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셨을 텐데….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지 물어봤더니 하루 종일 평화방송 라디오를 들으신다는 겁니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하루 하루 방송 메시지가 할머니의 교회지식과 신심을 높여준 것이지요. 듣기만 한 것이 아니고 기도는 또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묵주알 돌리며 하루 종일 중얼중얼 하시고 사셨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오랜 세월 홀로 살아오신 분이셨는데, 예수님 뵙기만을 기다리며 여생을 준비해온 삶이 오늘 복음의 한나와 많이 닮아 있어 불현듯 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경건함으로 한 생을 살아온 한나가 한 아기에게서 메시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입었듯이 참되고 열심한 신앙인에게 은총의 순간은 결코 피해가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하자
-박용식 신부-
아프리카에서 룸코라는 연수를 받던 중 연수원에 있는 개에게 물려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병원에서 돌아와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처난 양미간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오른쪽 눈꺼풀에 실 같은 상처가 있었다. 개 이빨이 눈꺼풀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서 미간에 상처를 냈던 것이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0.1밀리미터만 눈 안쪽으로 지나갔더라면 영락없이 눈을 다쳤을 것이다. 나는 개에게 물린 것이 속상하고 화가 나면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감사의 마음이 일어났다. 눈을 다쳐 실명할 수 있었는데도 양미간만 다쳤을 뿐 눈을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전에는 건강한 두 눈에 감사하지 못했지만 그후에는 멀쩡한 눈에 감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불행해지기 전에는 감사하지 않다가 불행에서 헤쳐 나오면 감사드린다. 내가 만일 하느님이라면 건강한 사람에게 불치의 중병을 걸리게 하거나 평화로운 사람에게 고민거리를 준 다음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들은 후 치유해 주고 해결해 줌으로써 감사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와 같이 하지 않으신다. 지금 내 몸이 건강하다면, 큰 문제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자체에 감사드려야 하지 않을까? 불시에 병이 찾아오고 우환이 닥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할 수있다면 그 자체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은 그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기에. 오늘 복음에서 한나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수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처럼 우리도 감사하며 살자.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이회진신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데리고 갔을 때,
아기 예수의 부모는 예언자 시메온으로부터
그가 구원의 표징이자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나 역시 아기 예수를 보고 난 뒤,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신앙인으로 그리고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때로 하느님 체험을 한 사람,
혹은 예언자 시메온이나 한나처럼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일을 식별할 수 있는
분들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내심 그분들의 통찰력에 대해 부러움과 신비로움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복잡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마음은 결과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상 안에서 혹은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을 움직이는 하느님의 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일까요?
한나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간 예언자였습니다.
그녀는 적어도 50년 이상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한나의 이러한 항구한 기도는 그녀를 하느님과 매우 가까운 관계로 이끌었고,
이러한 친밀함은 주님에 대한 내적 지혜를 갖도록 그녀를 이끌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항구한 기도가 가능할까요?
우리 자신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온갖 경쟁과 유혹들이 난무하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항구한 기도는 가능할까요?
성 이냐시오는 “활동 안에서 관상”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활동 안에서의 관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활동 안에 자신의 삶을 친밀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람들이 활동에 집중하거나 속박되는 것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그는 세상 안에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활동하기를 원했으나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세상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이 되는 한편,
세상과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항구한 인식을 동시에 갖는 것입니다.
“활동 안에서의 관상”은 이렇게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께 눈을 맞추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항구한 기도”가 필요한 것이죠.
오늘 복음에서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께 “항구한 기도”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0년이 넘는 동안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을 갖았기에
그녀는 세상 안에서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식별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하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습니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이 있어서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길 원하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길 원한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한나 예언자처럼 “항구한 기도”는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그럴 때는 우리가 그런 능력을 지닌 이들을 부러워하거나 질시할 필요도 없겠죠.
왜냐하면 항구한 기도 안에서 이미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식별하고 있을 테니까요.
오늘 주님께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달라 청합시다.
“주님, 기도하는 데 지치지 않게 하소서. 주님, 기도하는 것이 보상받을 것이 있음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데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영원한 고향(故鄕)
-이수철신부-
시간과 죽음 앞에는 누구나 공평합니다.
그 누구나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살아야 하며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유한한 시간 안에서 영원한 자유를 누리며,
또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을까요?
서서히 한 해가 저물어가는 오늘 새벽 말씀 묵상 중,
‘아,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왔음은
하느님께 갈 날이 가까웠음을 뜻하는 구나!’ 생각과 더불어
언뜻 기쁨을 느꼈습니다.
죽음의 날이 공포의 날이 될 이들에게는 세월의 흐름이 안타깝겠지만
죽음의 날이 그리운 하느님과의 상봉이 될 이들에게는
세월의 흐름이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의 거부나 배척이 아니라,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초연히 살라는 요한 사도의 권고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마음을,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하느님께 뿌리 내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하느님께 뿌리내려야 세상 안에 살면서도
비로소 시간과 죽음에서,
세상의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참 자유와 참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혼인해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는 동안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과 기도로 밤낮 하느님을 섬기다가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만난 한나가 여기에 해당되는 성녀입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의 영원 안에 살고 있는 한나였습니다.
마침 오늘 매일 미사 책 끝부분에 나오는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이 좋아 나눕니다.
“우리는 온갖 선이신 하느님께로 마음을 드높여 하느님 안에 있고,
그분 안에서 살며, 그분과 일치하도록 합시다.
최고의 선이신 그분께서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으시며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한없는 평화와 고요함을 누리고 계십니다.”
이 복된 미사시간
이런 좋으신 하느님의 영원성을
우리의 전존재로 흡수하는 시간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아멘.
안나와 마틸드 2004-12-30
-강영구신부-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의 혈통을 이어받는 안나라는 나이 많은 여자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결혼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같이 살다가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왔다. 이 여자는 예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바로 그 자리에 왔다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이 구원될 날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의 이야기를 하였다.(루가 2,36-38)
사랑하는 예수님, 여기 두 여인이 있습니다. 아셀 지파에 속하는 할머니 안나와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입니다.
모파상 (Maupassant)의 단편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는 문부성에 근무하는 하급 공무원 루아젤의 아내입니다. 어느 날 마틸드는 문부성장관이 베푸는 연회에 초대받습니다. 허영심 많은 마틸드는 학교 동창인 포레스티에 부인으로부터 진주 목걸이를 빌려 목에 걸고 연회에 참석합니다. 파티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운 눈초리와 찬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목에는 진주 목걸이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마틸드는 집을 팔고 빚을 얻어 새 목걸이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줍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온갖 궂은일을 다해 빚을 갚기는 했지만 그녀는 폭삭 늙어 쓸쓸하고 비참하게 됩니다. 그 목걸이는 모조품이었습니다.
하느님께 귀의(歸依)한 안나는 평생을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삽니다.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청상(靑孀)이 된 그녀에게는 자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대지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하느님 안에 인생의 뿌리를 박고 고난과 시련, 유혹과 고통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는 평화를 누립니다. 안나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모습으로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허영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돈이나 재물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의 소망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만나는 것입니다. 평생 기도와 단식으로 경건하게 살아왔던 안나의 소망은 성취됩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손에 쥔 것도 없고 사람들로부터 부러운 눈길을 받지도 못하지만 안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그녀는 행복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저도 안나처럼 당신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一明)
기나긴 기다림의 성취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진 마리아의 정결예식과 아기 예수의 봉헌예식을 통한 예수의 공현(公顯)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예언자 시므온에 이어 예언녀 안나가 등장한다. 남녀를 차례로 등장시키는 기법은 루가복음의 특징에 속한다. 특히 예수를 따라 다니며 도왔던 여자들(8,1-3), 겨자씨의 비유에 이어 누룩의 비유에 등장하는 여자(13,18-21), 잃은 양의 비유에 이어 잃은 은전의 비유에 등장하는 여자(15,3-10), 마티아를 비롯한 12사도와 함께 있었던 마리아와 여인들(사도 1,13-14) 등의 대목이 그렇다. 예언녀 안나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을 잃고 84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 몸담아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겨온 사람이다. 그녀의 나이가 84살인지 아니면 과부생활이 84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성서원문을 따른다면 안나는 과부로 84년을 살았다. 따라서 그녀의 나이는 구약에서 105살을 살았던 유딧처럼 대략 104-105살로 추정된다.(유딧 16,23 참조)
과부로서의 안나의 삶은 구차하고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경건했을 것이다. 가난한 자가 하느님을 먼저 공경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안나는 오늘을 보기 위해 84년을 기다려 왔다. 따라서 안나의 삶은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다.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임박한 메시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자들이다. 안나는 이들을 대표하는 자로 묘사되며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과부들의 가난하고 경건한 삶을 이끌 수 있는 모범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그녀가 시므온의 팔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았고, 시므온의 예언을 밖으로 배달한다. 루가는 안나가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알렸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시므온의 예언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었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루가 2,29-32) 예언녀 안나도 시므온처럼 평안히 눈감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 시므온의 말씀과 메시아로서의 예수 아기에 관한 이야기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해진다. 이 말은 예수의 탄생사건이 그 자체로서 세상의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메시아의 현존에 대한 의식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 예수도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키워가야 하며, 동시에 세상 또한 메시아와 그 현존에 대한 인식과 의식이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예수도 세상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시간은 성령의 시간이다.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시며,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또 선포하는 일을 도와주실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공동체는 가난하고 경건한 예언녀 안나처럼 성령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이에 합당한 자신을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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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