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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開拓者)★
1. 노숙 [206~210]
206
“마쓰다의 방은 이층 오른쪽에서 두번째입니다.”
옆에 엎드린 윤성식이 손끝으로 이층의 불을 밝힌 창문을 가리켰다.
“아마 지금쯤 북한 사람들 숙소 근처에 배치시킨 저격자가 실종된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 긴장하고 있겠지요.”
김명천은 잠자코 앞쪽의 저택을 보았다.
야마구치조 마쓰다 부회장의 숙소인 것이다. 마쓰다는 정보원을 풀어 북한 측은 물론이고 안재성이 묵을 숙소도 탐지해 내었지만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야마구치조에 침투해있는 정보원이 작전 내용까지 탐지해온 것이다.
김명천의 오른쪽에 엎드려 있던 신해봉이 머리를 들고 낮게 말했다.
“사장님, 공격조가 담장을 넘었습니다.”
저택과의 거리는 100m 정도였지만 그들이 엎드려 있는 낮은 구릉 위에서는 담장과 건물의 이층까지만 보일 뿐이었다. 거기에다 대여섯 채의 주택에 가로막혀 있어서 공격조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김명천은 팔목시계를 보았다.
밤 12시 10분 전이었다.
“이노우에 겐지에 이어서 마쓰다까지 제거되면 야마구치조는 한랜드에서 물러나게 되겠지.”
김명천이 혼잣소리처럼 말하고는 어깨를 움추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추위가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털모자에 파커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드러난 피부는 얼음처럼 차겁게 굳어졌다.
“언제나 우리 측 정보가 한걸음 빨랐습니다.”
신해봉이 흰 입김을 품으며 말했다.
“현대는 정보전이지요. 정보수집에 전력투구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때였다. 밤하늘에 요란한 총성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와락 긴장했다. 총성은 마쓰다의 숙소에서 울렸고 곧 더 요란해졌다.
처음에는 한정의 연속 발사음이었는데 이제는 7, 8정의 자동소총이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저택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리시버를 귀에 꽂고 작전 중인 공격조의 행동을 모두 듣고 있던 신해봉이 숨가 뿐 목소리로 보고했다.
“저택 1층은 거의 제압되었습니다.”
총성은 더 요란해졌는데 그때는 김명천도 총성만으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쪽은 주로 이스라엘제 우지를 사용하고 있어서 날카로운 짧은 여운의 발사음이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지의 발사음이 압도적이었다. 드문드문 들리는 아카보 자동소총은 야마구치조의 반격일 것이다. 그때 신해봉이 퍼뜩 머리를 들고 김명천을 보았다.
“2층으로 진입했습니다.”
김명천은 앞쪽의 저택을 노려보았다. 저택의 불빛은 환했다. 총성은 아직도 울리고 있었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멀쩡했다.
“5분 경과했습니다.”
왼쪽에 엎드린 윤성식이 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작전시간은 10분이었다. 따라서 8분 동안 저택 청소를 끝내고 나와야 되는 것이다.
“사장님.”
그때 신해봉이 와락 소리쳤으므로 김명천은 눈을 크게 떴다. 어둠속에서 신해봉의 두 눈이 김명천을 쏘아보고 있었다.
“마쓰다가 권총으로 저항하고 있답니다.”
신해봉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그것은 마쓰다가 도망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나 같은 것이다. 김명천은 저택 안에서의 총성이 조금 전보다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전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때 다시 여러 정의 총성이 한꺼번에 울렸다. 그리고는 신해봉이 머리를 들었을 때 김명천의 가슴이 뛰었다. 신해봉이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사장님, 마쓰다를 사살했습니다.”
207
다음날 아침 8시가 되었을 때 아무르강이 내려다보이는 하바로프스크 북쪽 통나무집 마당에 7, 8대의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 차거운 날씨여서 서성대는 사람들은 모두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지만 활기찬 분위기였다.
하바로프스크를 장악한 양대 조직이 모인 것이다. 통나무집 안의 넓은 응접실에는 구석쪽의 페치가에서 통나무 장작이 기운차게 타올랐고 테이블 양쪽에 갈라 앉은 김명천과 백남철의 얼굴도 열기에 쏘여 붉게 상기되었다.
“자, 그러면.”
백남철이 말을 이었다.
“야마구치조는 당분간 재기하기가 어려울거요. 이제 한랜드에 개입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야마구치의 마쓰다가 제거된 지금 한랜드 사업의 장애물은 걷혀진 셈이 되었다.
어젯밤 김명천의 고려인 조직은 마쓰다를 제거했고 안국철이 지휘한 북한 특무조는 저격자 가또와 안내역 박태현까지 찾아내어 제거한 것이다. 물론 일성회장 안재성의 숙소를 숩격했던 로스토프와 야마구치조의 연합 세력은 허탕을 쳤다.
그리고 지금 남북한의 연합 세력이 일류신의 잔당인 로스토프와 야마구치 조직원들을 소탕중인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김명천이 백남철을 보았다.
“한랜드에는 먼저 고려인이 입주할겁니다. 그 다음 순서가 중국의 조선족 동포가 될 것이고 북한 주민 이주는 맨 마지막입니다.”
“맨 마지막이라.”
쓴웃음을 지은 백남철이 김명천을 보았다.
“그것이 언제쯤 될 것 같습니까?”
“늦어도 1년쯤 후부터 이주해야 될 겁니다.”
“북한 주민 할당량은?”
“회사측의 계산으로는 1차로 20만명이 입주하고 나서 5년내에 200만명입니다.”
“한국의 이주민은 얼마로 예상합니까?”
“약 200만입니다.”
백남철의 시선을 받은 김명천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러시아의 고려인과 중국의 조선족 동포,
그리고 해외에 흩어진 한국인 동포 이주민을 약 300만으로 예상하고 있지요.”
“거기에다 러시아인까지 포함하면 1000만이 훨씬 넘겠군.”
“한랜드의 인구는 약 1500만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광대한 면적에 비하면 인구 1500만은 적은 편이지.”
머리를 끄덕인 백남철이 말을 이었다.
“좋소. 우리는 한랜드측에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 했습니다. 한랜드 건설에 순수하게 동참한다는 말씀이요.”
“감사합니다. 부부장님.”
“이것은 위원장동지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위원장동지께서는 적극 협조하라고 지시하셨소.”
“일성측에 전달하겠습니다.”
“한랜드는 한민족의 새로운 희망이요.”
눈을 가늘게 뜬 백남철이 김명천을 보았다.
“한랜드에서 남북한이 통일된 힘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소.”
“그래야지요.”
길게 숨을 뱉은 김명천이 팔목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으로 남북한의 한랜드에 대한 협상은 일단락이 된 것이다. 북한은 놀랍게도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수하게 동참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야마구치조를 전면에 내세운 일본과 러시아 마피아 조직에 공동 대응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남북한은 하나로 뭉쳐졌다. 김명천이 차에 올랐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난데.”
수화기에서 일성회장 안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10시에 의원들을 만나야겠는데. 자네가 말이야.”
“제가요?”
놀란 김명천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차에 오르자 곧 승용차는 앞뒤로 경호차를 붙이고 통나무집 마당을 떠났다. 안재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김사장이 참석해야만 될 것 같은데, 상황 설명도 해줘야겠고.”
한랜드는 일성전자가 한국을 대표해서 임차를 받은 것이니만치 경영권은 일성전자가 맡는다고 해도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일성전자측으로서는 러시아로부터 임차권을 따내는 과정에서 정부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상황인데다 통제권만 행사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만 했다.
안재성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회의에서 자네가 나를 조금 도와줘야겠어. 북한과의 문제 때문에 말이야. 국제호텔 1203호로 와주면 좋겠는데, 그 곳에서 회의를 하기로 했어.”
“알겠습니다. 회장님.”
“고맙네.”
안재성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그는 어젯밤 세 번째로 변경한 숙소에서 묵었지만 밤에 전쟁이 일어난 것은 모른다. 김명천이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앞좌석에 앉은 신해봉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국회의원들을 만나야겠다. 국제호텔에 10시까지 도착해야 돼.”
“국회의원을 말입니까?”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신해봉이 정색하고 김명천을 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김명천은 시선을 돌리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명천이 국제호텔 1203호실에 들어섰을 때는 10시5분이었다. 방에는 이미 안재성과 비서실장 박수근, 전자사장 전기용까지 와 있었으므로 그가 제일 늦은 셈이었다.
1203호실은 특실로 회의실에 대기실까지 갖춰져 있었지만 국회의원 7명에다 비서와 보좌관까지 수십명이 모인터라 안재성은 옆쪽 방 두개를 더 빌렸다. 회의실로 들어선 김명천과 신해봉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여졌고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장방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의원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어서 오시오.”
안재성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조금 큰 목소리로 김명천을 맞았다.
“이분이 아무르교역의 김명천 사장입니다. 한랜드 임차에 김사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안재성이 직접 의원 하나씩을 김명천에게 소개했다.
의원들은 모두가 여야 중진들로 한랜드와 관련된 위원회 소속이었다. 인사를 마친 김명천과 신해봉이 자리에 앉았을 때 의원들의 대표격인 여당의 국회 건설위원장 오수택이 안재성에게 물었다.
“한랜드의 모체는 대한민국이어야 하고 대한민국 헌법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지요?”
“물론입니다.”
정색한 안재성이 머리를 끄덕였다.
“일성전자는 곧 대한민국 기업이니까요. 한랜드는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기초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북한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오수택이 다시 묻자 안재성의 시선이 김명천에게로 옮겨졌다.
“여기 있는 김사장이 북한측을 접촉하고 있습니다만.”
김명천은 상체를 폈다. 모두의 시선이 모여졌고 방안에 잠시 무거운 정적이 덮였다.
208
“협조적입니다.”
김명천이 말하자 오수택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뜨고는 탐색하는 표정으로 김명천을 보았다.
“북한측 누구하고 접촉했습니까?”
“그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니, 뭐요?”
대뜸 이맛살을 찌푸린 오수택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한쪽 귀를 김명천을 향해 내밀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허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오수택이 안재성과 동료 의원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의원들이 제각기 나섰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그런 말대답이 어디 있어?”
여당의원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당신. 우리를 뭘로 보고 있어? 이런 식으로 해서 한랜드 사업이 한 발짝이라도 진전될 것 같아?”
건설위 소속의 여당의원 하나가 그렇게 소리쳤다.
동료 의원들의 응원을 받은 오수택이 조금 느긋해진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장내를 진정시킨 다음에 다시 김명천을 보았다. 그동안 안재성과 일성그룹 관계자들은 눈만 꿈벅이며 외면하고 있었다.
“이것 보시오. 김사장이라고 하셨던가.”
“예, 의원님.”
“북한측에서 접촉한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뭐요?”
다시 오수택의 눈썹이 곤두섰고 의원들이 술렁대었다.
“아니, 그러면.”
“예. 제가 결정한 일입니다.”
“좋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상반신을 세운 오수택이 그 얼굴 그대로 안재성을 보았다.
“안 회장님.”
“예, 위원장님.”
“이런 식으로는 정부에서 일성그룹을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위원장님. 그것은.”
“제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안재성에게 손바닥을 펴 보인 오수택의 얼굴이 엄격해졌다.
“솔직히 우리는 저런 신분도 확실치 않는 젊은 친구가 이 자리에 참석한 것부터가 불쾌합니다. 한랜드 임차에 어떤 공을 세웠거나 간에 일성그룹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을 것 아닙니까?”
“예. 그것은.”
“어떻게 저런 태도로 여기 계신 의원들까지 싸잡아 모욕할 수가 있습니까?”
“의원님. 제 말씀을 들어보시지요. 여기 있는 김사장은.”
안재성이 웃음 띈 얼굴로 말을 하다가 다시 멈췄다.
오수택이 다시 손바닥을 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북한측의 반응과 한랜드에 대한 협상이요. 안회장님이 북한측과의 협상을 주선해 주시지요. 우리가 이 곳에 온 목적중의 하나가 그것 때문이니까요.”
그러자 안재성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풀석 웃었다. 김명천은 잠자코 있었지만 안재성은 물론이고 일성측 관계자들이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회의원들은 노기가 등등한 반면에 그들은 조금도 긴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안재성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일에 관해서는 전혀 도움을 드리지 못하겠는데요.”
그러자 오수택이 다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긍정적인 대답에만 익숙해진 사람이 분명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겠다니?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왜냐하면.”
정색한 안재성이 손으로 김명천을 가리켰다.
“북한은 지금까지 김사장하고만 대화를 했습니다. 나는 김사장한테서 결과를 들었을 뿐입니다.”
“으음.”
오수택의 목구멍에서 신음같은 헛기침 소리가 울렸다.
김명천을 무시할 작정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울화가 치민 것이다. 그때 의원 하나가 나섰다.
“어쨌건 간에 김사장은 일성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을 것 아닙니까? 김사장이 독자적으로 행동했을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이 기회에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정색한 안재성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런 상황이 될 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무르교역은 일성그룹의 계열사나 용역회사가 아닙니다. 일성에서 지시를 하고 보고를 받을 입장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오히려 한랜드 입찰에서부터 지금까지 일성은 아무르교역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 안재성은 옆자리에 앉은 비서실장 박수근의 눈짓을 받고는 말을 멈췄다. 그러자 방안은 한동안 어색하고 무거운 정적에 덮여졌다. 김명천은 아까부터 신해봉의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신해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선 김명천이 안재성에게 말했다.
“저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있는 것이 불편하게 만들어 드리는 것 같아서요.”
“그래 주시겠소?”
안재성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내심으로 현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국회의원들과 등을 돌린 자세에서 김명천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기 때문이다. 김명천이 밖으로 나왔을 때 따라 나온 신해봉이 악문 잇사이로 말했다.
“더럽게 거만하군요. 사장님이 이렇게 무시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잠자코 걷는 김명천을 향해 신해봉이 쏟아 붓듯 말했다.
“분위기를 그렇게 만든 일성측도 책임이 있습니다. 미리 사장님에 대한 설명을 그놈들한테 해놓았어야 했습니다.”
“잘한거야.”
엘리베이터 앞에 선 김명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낮게 말했다.
“일성측도 내가 그렇게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어. 그것이 앞으로를 위해서도 낫다.”
“아니, 그렇다면.”
“아쉬운 건 우리가 아냐. 아마 다시 연락이 오겠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으므로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 로비층 버튼을 눌렀다.
“그렇군요.”
잠시 생각했던 신해봉이 이윽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닙니다. 국회의원들과 일성측이지요.”
그리고는 신해봉이 빙긋 웃었다.
“국회의원들은 뭔가 성과를 가져가야 할테니까요.
그래야 TV에 나가서 얼굴을 보일 것 아니겠습니까?”
209
김명천이 밖으로 나갔을 때 안재성이 국회의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이었다.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랜드 입찰 배후에서 여러 번 조직 간의 전쟁이 일어났지요.”
오수택은 그냥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귀찮다는 시늉을 했고 나머지 의원들도 시큰둥했다. 안재성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러시아 마피아와 야마구치조를 앞세운 일본 정부의 방해, 그리고 북한도 처음에는 우리측과
적대 관계에 있었지요. 우리는 사방에 적을 두고 일을 했던 겁니다.”
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킨 안재성이 다시 의원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르교역의 김사장은 야마구치조의 지휘자를 두 번이나 처치했습니다. 바로 어젯밤에 야마구치조의 제2인자인 부회장 마쓰다가 숙소에서 사살되었습니다. 마쓰다는 러시아 마피아의 잔존 세력과 연합해서 내 숙소를 습격해서 나를 암살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김사장이 역습을 한겁니다.”
“…....…”
“김사장이 지휘하는 고려인 조직은 하바로프스크의 거대한 마피아 조직을 분쇄했습니다. 그 마피아 조직은 한랜드의 지분을 요구했지요. 이주민 한 명당 얼마씩 말입니다.”
말을 그친 안재성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어보였다.
“참고로 말씀드리겠는데 처음에 북한의 요구 조건도 러시아 마피아와 비슷했지요. 그랬지만 지금은 서로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안재성이 웃음 띈 얼굴로 의원들을 보았다.
“왜 그렇게 된지 아십니까?”
당연히 의원들은 눈만 꿈벅였고 방안의 분위기는 더 무거워졌다. 이제 느슨한 표정을 짓는 의원들은 없다. 모두 긴장으로 뻗뻗하게 굳어져 있는 것이다. 안재성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것은 김사장의 고려인 조직이 북한측을 야마구치조와 러시아 마피아로부터 보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즉 고려인 조직과 북한 특무조가 연합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김사장은 북한측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것입니다.”
말을 그친 안재성회장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길게 숨을 뱉았다.
“덧붙여서 말씀드리는데 김사장의 고려인 조직이 의원님들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이 호텔에는 고려인 조직원 수십명이 경비를 서고 있지요. 그 고려인 조직 수백명의 보스가 바로 그 젊은 애송이라고 하셨던 김사장이죠.”
“안회장님, 그건 오해입니다.”
조금 전에 큰소리로 떠들었던 여당 의원이 금방 나서더니 손까지 흔들었다.
“말을 비약시키지 마십시오. 난 김사장을 애송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비서실 직원 하나가 서둘러 들어섰다. 그러더니 안재성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긴장으로 굳어진 표정이어서 모두의 시선이 모여졌다.
“회장님, 보고드릴 것이.”
안재성의 시선을 받은 직원이 부동자세로 서서는 침부터 삼켰다.
“저, 아무르교역 직원들이 호텔에서 모두 철수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구?”
소리치듯 물은 안재성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 갑자기 지시를 받았다면서 모두 철수해 버려서 지금 호텔 경비는 공백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이런.”
비서실장 박수근이 벌떡 일어서더니 안재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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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무방비 상태엔 이곳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그러자 안재성이 일어섰다. 안재성의 얼굴도 쓴 약을 삼킨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군. 여러분.”
안재성이 의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몸을 피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다시 김사장과 접촉해 보겠습니다만 지금은 여러분의 신변을 제가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것 보십시오.”
여당의원 하나가 따라 일어서며 눈을 치켜떴다.
“지금 우리한테 협박을 하는 겁니까? 이게 도대체 뭡니까?”
“이게 현실입니다.”
의원의 항의를 맞받아 친 것이 비서실장 박수근이었다. 박수근이 정색하고 비대한 체격의 여당 의원을 보았다.
“아무르 교역의 김사장은 공기중의 산소 같은 존재였지요. 평소에는 있는듯 없는듯 했다가
사라지면 모든 생명체가 죽게 됩니다. 이건 과장도 협박도 아닙니다. 의원님.”
의원들은 모두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고 박수근의 말이 이어졌다.
“김사장이 경호를 철수시킨 것은 일성 전자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무르 교역은 이미 하바로프스크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역의 주도권을 쥔 조직이 되어 있으니 아쉬울 것이 없는 입장입니다.
김사장의 애국심이 우리에게 협조하는 유일한 근거였는데 정부를 대표한다는 의원들께서 김사장을 모욕하신 것입니다.”
“아니, 이것 보시오.”
이번에는 다른 의원이 나섰을 때였다.
안재성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몸을 피해야 돼.”
그러자 의원들은 우르르 따라 나섰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도 챙기지 않았다. 이제는 모두 겁에 질린 표정이다.
“이보시오. 안회장님.”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오수택이 안재성의 옆으로 바짝 붙어섰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러시아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렇게 할 겁니다.”
안재성이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들은 서둘러 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