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속의 고사성어
이문방부(以文放父)
[요약] (以: 써 이. 文: 글월 문. 放: 놓을 방. 父: 아비 부)
글을 올려 아버지를 풀려나게 하였다는 뜻으로, 조선 성종 때에 김규(金虯)라는 어린아이가 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구한 고사에서 유래함. 특기로써 어떤 일을 성사시키는 것을 이름.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등.
[내용] 두산백과에 김규(金虯. 1521~1565)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규는 본관은 광산(光山). 자 몽서(夢瑞). 호 탄수(灘叟). 13세 때 아버지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히자, 상소를 올려 특사하게 할 정도로 문장에 재주가 있었다. 1543년(중종 38) 생원이 되고,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이조정랑 등을 거쳐 전한(典翰=홍문관에 속한 종삼품)에 이르렀다.
1557년 선위사로 동래에 머무를 때, 윤원형(尹元衡) 일당의 무고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경원에 유배되었다. 1564년 특사로 풀려나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구한 고사의 내용을 조선 선조 때 문명을 날리며 선조의 외교문서를 전담했던 차천로(車天輅;1556.명종 11∼1615.광해군 7)는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 이렇게 쓰고 있다.
○ 성묘(성종)가 큰 가뭄을 만나, 신(神)이란 신을 다 들어 섬겼다. 임금이 친히 경회지(慶會池) 가에서 기도하는데, 뜨거운 햇볕 아래 그대로 앉아 거의 12일(浹辰)에 이르렀을 때 어디서 여러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임금이 물으니, “바로 방주감찰(房主監察= 사헌부의 우두머리 감찰)의 잔치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오래 비를 주지 아니하여 초목이 말라 비틀어져 서성(西成= 추수)의 희망이 끊어지고, 대명(大命= 천명)이 가까이 머물러, 내 바로 정전(正殿)을 피하고, 음식을 줄이고, 음악을 폐하며, 한데에 앉아 빌기를 여러 날하고 근고하기를 이같이 함은 백성을 위함인데, 녹을 먹는 무리가 감히 음악을 벌여 즐기며 노니, 매우 사리에 어긋난다. 그들은 모두 하옥하라.” 하니, 24명이 일시에 구속됐다.
그들은 그 아들들로 하여금 상소를 올려 애걸하게 했는데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이 대노하여,
“너희들이 이미 예절이 없어 죄에 빠졌고, 또 그 어린 것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내게 하니, 더욱 미워할 것이다.” 하고, 상소 올린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이게 하였다.
임금이 편전에서 기다렸는데, 마침내 모두 흩어져 달아났는데, 홀로 방주감찰의 아들만이 가지 않고 붙잡혔는데, 나이가 아직 어린 아이였다.
임금이 묻기를,
“너는 어린아이로서 어찌하여 달아나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애초부터 아버지를 건지기 위하여 글을 올렸사온데, 비록 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도망하겠나이까.”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이 소(疏)는 누가 지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자작하였사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쓴 사람은 누군가.” 하니, 대답하되,
“신이 썼사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네 나이 몇 살이냐.” 하니 대답하되,
“열세 살이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과연 능한가. 속이면 마땅히 죄를 줄 것이다. 숨기지 말지어다.” 한즉, 대답하되,
“짓고 쓴 것이 모두 신의 손에서 나왔사옵니다. 시험하여 보시옵소서.”하니,
임금이 가뭄걱정(悶旱)이라는 글제를 삼아 짓기를 명하였다.
그 애가 바로 지어 썼는데, 그 끝 구절에 이르기를,
“옛날에 동해(東海)의 원통한 여자 때문에 3년 동안 가뭄을 만났으니, 성상께서 이 점을 생각하신다면 은나라 왕 성탕(成湯)이 천리 땅에 비를 내리게 한 것과 같이 하실 것이옵니다(昔東海一冤婦。足致三年之旱。願聖主以此軫念。則成湯千里雨致之不難。).” 하였다.
임금이 보고 몹시 기뻐하여,
“네 아비는 누군가.” 하니, 대답하기를,
“주방 감찰 김세우(金世愚)가 바로 신의 아비옵니다.” 하였다.
또 “네 이름은 무엇이냐.” 물으니, 대답하되,
“규(虯)로서 이름 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필(御筆)로 종이에 쓰기를,
“예로부터 글 잘 짓는 선비는 글씨를 잘못 쓰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글을 잘못 지었는데, 너는 글도 잘 짓고 또 글씨도 잘 쓴다. 네 글을 보고 아비를 놓아주고, 네 아비를 보아서 네 아비의 동료를 놓아준다. 네 그 효도를 충성에 옮길지어다.” 하고,
이내 승전색사관(承傳色史官 승전색은 이조 내시부의 벼슬 이름, 왕지를 전달함)에게 명하여 그 글을 가지고 그 아이를 따라 의금부로 가서 모두 놓아주었다(因命承傳色史官。持其書從其兒。之義禁府盡放之。).
판의금(判義禁= 의금부 수장) 이하가 모두 문에 나와 기다려 그 서장을 펴 보았으며, 임금은 마침내 24명을 내보냈다.
김규(金虯)는 성묘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 뒤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정이품에 이르렀다. 광묘(성종)의 기제가 있을 때 마다 꼭 사흘씩 울었고, 그 달이 다하도록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죽은 뒤 그 자손이 그 글로써 병풍을 만들어 신주의 뒷벽에 달아 놓았다 한다.
**자료; 한국고전번역원
첫댓글 즐감
감사합니다.좋은글
이문방부(以文放父), 글을 올려 아버지를 풀려나게 하였다는 뜻으로,
조선 성종 때에 김규(金虯)라는 어린아이가 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구한 고사에서 유래함. 오늘도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린시절 교과서에도 나왔던 古事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