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아직도 내게 어려운 3가지!
지난주, 발표한 ‘나의 글’의 여운은 ‘미열’처럼 남아 잔잔하게 머물렀다. 유행가의 가사처럼,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아픈 것은 아픔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미제로 포장하여 잘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나의 심신이 평안함이 그 증거일 것이다. 과거에서 지금까지의 시간여행은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은 이제껏 살아온 세월의 경험으로 좀 더 잘 살아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를 더 들여다보고자 이글을 써내려간다.
에나, 지금이나 내게 가장 어려운일은 3가지중 한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반백년을 좀더 살아왔고, 크리스찬이 된 지도 어엿 30년이 되었는데도 이리 힘든지! 일은 10년만 열공하니 가닥이 잡혔고 그 이상을 하니 자유자재로 play 할수있었는데,,,. 왜 믿음만은 가면 갈수록 닿기가 힘든 고지가 되어가는지, 참으로 애통하다. 성경도 읽고 설교 말씀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심오한 뜻을 알기 위해 여러 존경하는 목사님의 버전으로 듣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말씀 중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은, CS루이스, 마틴 존슨, 팀 켈러, 유진 피터슨, A.W.토저, 로레스 형제, 제럴드 싯처외 증빙된 신앙서적들을 주제별로 구입해 완독했다. (훗날, 이 탁월한 선택을 한 나 자신에게 칭찬했다.) 지성의 풍요함을 가장한 ‘허영’을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라도, 지성의 풍요 또한 믿음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기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뒤 온몸을 뒤덥은 ‘열정’으로 수영로 교회에 스스로 등록한뒤 10여년간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그 열공의 시간으로 지금의 이 자리에라도 있을수 있었다 생각한다. 예배마다 쏟아지는 ‘설교말씀’으로는, 나는 일상에서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하는지 그 거룩하기만 한 말씀 앞에서 고민하고 고민했다. 나에겐 좀더 구체적인 말씀해석이 필요했다. 성경의 주님은 너무나 이해되기 쉽게 ‘비유’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목사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 살고 있는 나에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살아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진 못했다.
그 길을 찾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웃은 누구이며, 어떤때 어떠한 방법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또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서 적용해야하는지? 애매하고 모호한 ‘거룩한 말’ ‘신령한말’ 보단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act를 찾기위해 고민하고, 경험을 통해 연구하고 생각했다. 기독교도 아닌 유교도 아닌 ‘교회의 문화’도 그 고민에 한몫 했다. 이렇게 긴 몸부림의 세월들을 지내고 나니 쬐끔씩 ‘the way’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길을 찾는데 지치고 갈증이 날대로 난 나에게, 마침내 한 목사님의 설교가 그 오래된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바로 100주년 교회의 ‘이재철’목사님이셨다. 이땅에서 살아내려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땅의 말씀으로 해석해 주신 목사님이셨다. 나의 모든 의문들은 물론, 이땅에서의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는 아주 구체적인 길로 해석, 설명해 주셨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하다보니 ‘the way’가 보이기 시작했다.
목사님을 만나기전까지의 시간들이 허공에 먼지처럼 날려버린 것 같아 억울하기 까지 했다.
그 이후 나의 믿음은 ‘거룩한 말씀’을 그저 ‘아멘’으로 허공에 먼지처럼 흩어져,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으로 발로 지갑으로 내려오지 않는 믿음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나의 믿음의 언어와 행동으로 실수하고, 넘어지면서 나의 복음을 정립해나가고 살아나가고 있다.
두 번째로 어려웠고, 아직도 어려운 일은, ‘나의 부인’이다.
많은 목사님들의 목회경험의 통계로 가장 어려운 성도가 ‘자수성가’한 성도라는 ‘설’을 많이 들어왔다. 나는 이 주장이 ‘설’이아니라 ‘사실’임을 증명한다. 누가 나이가 들어가면, ‘현자’가 된다고 말했던가? 아니요, 절대 아니라고 말할수 있다. ‘나 자신’이 그 증인이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함께 싸여가는 ‘경험들’과 그 경험의 결과물이 세상보기에 조으면 조을수록 더 나 자신을 부인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다. 말씀앞에 서 있으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지만, 뒤돌아서서 ‘관계’앞에서는 ‘라떼’가 절로 나옴을 어찌하랴? 로고스 서원 입학 전, 잠시 가졌던 담임목사님과의 ‘글쓰기’의 첫 수업에서 목사님은 나의 장점과 단점, 그 단점을 어떻게 장점으로 변화시킬수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적어오라는 숙제를 내 주셨다. 숙제를 하느라 끙끙거리며 적어 내려가는 동안, 나의 모든 단점의 원인은 ‘자기부인’을 하지 못해서임을 확실히 파악하게 되었다.
수많은 신앙의 고전서적들의 저자들도 인간의식 연구의 대가인 테이비드 호킨스같은 영적스승도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영적인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ego의 판단과 집착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Ego의 세계는 실상도 본질도 아닌, 단지 의식이 만들어낸 에너지장의 환영에 불과하기에, 자신이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졌다는 생각, 시시비비 판단하고 평가하는 마음, 자신이 울고 웃는 인생 모두 ‘나’라고 하는 ‘ego’가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라고 한다.
지금껏 열공으로 살아온,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견뎌내어 온 세월의 옷이 ‘진짜옷’이 아니라며 버리라고 하는 말이다. ‘ego’가 주는 ‘환각’에서 깨어나아만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개똥철학이라도, 긴 세월동안 내안에서 동거동락하면서 나를 지탱해 준 나의 ‘에고’는 억지로 떠나보낼수도 없고, 쉬이 떠나지도 않을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담임 목사님과의 ’글쓰기‘수업에서 이미 나의 ‘에고’의 실체를 살짝 엿보아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내안의 에고를 객관적으로 충분히 바라보아주고, 내속의 에고의 변명들과 스토리에 귀기울여주면서, 그들에게 공감해주고 토닥거려주며 작별의 ‘예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내안의 내가, 에고가 스스로 미련없이 떠나갈때까지.
이 깨달음앞에 서니,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그리고 감사했다. 이런 무지하고 교만한 나를 기다려주시고, 모든 상황들을 통해 이끌어 주셔서 이 자리에 서게 하신, 약속말씀을 지키신 신실하신 하나님께!
그리고 이런 교만한 나를 참아내주며 견뎌주면서 성도로, 친구로,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사랑은 오래 참음이란 말씀을 살아내신 모든이들에게!
빌립보서 1:6 “너희안에서 착한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감사함’으로만 끝내기에는 이리보아도 저리보아도 너무나 많이 진 ‘빚’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공동체식구들에게, 나의 남편에게, 나의 가족에게, 나의 친구들에게!
영화 “미션‘의 로버트 드니로의 역 ’로드리고‘가 원주민 과라니족으로 가는 멀고 긴 여정에 스스로 참회의 댓가로 죄의 도구였던 갑주와 무기들을 온 몸에 지고 그들을 만나러가는 길에 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한뒤 그 무거웠던 ‘죄의 그물’을 끊어버리고 참 자유를 만난다.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았지만, 참 믿음의 길을 보여주는 영화였기에, 오늘도 이 영화의 이 장면이 생각난다.
목사님께서 이런 나의 마음을 읽으셨는지, 새 부서를 만들어 일을 맡기셨다. 부서의 명칭은 ‘우체부’였다. 나부터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와 사랑의 편지를 쓰기 시작해, 모든 성도들이 서로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 ‘부흥’을 일으켜보라시며. 하나님의 지시였음에 분명했다. 매주 편지를 썼다. 사모님에게, 권사님에게, 집사님들에게.... 요즘은 로고스 서원의 글쓰기로 좀 뜸하지만, 계속 편지를 쓸 것이다. 한분, 한분께 감사와 위로의 편지를 쓰면서, 매일 말씀앞에서, 사람앞에서 나를 깨뜨려 갈 것이다. 그럼으로 ‘나의부인‘을 명령하신 주님의 참뜻을 더,더 크게 넓게 깊게 알아갈 것이다. 이 길만이 내가 진정으로 살수 있는 길이기에!
그리고 나를 ’탈피‘해 나의아버지가 ’우리의아버지‘ 되심을 더 알아가면서 공동체를 섬길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나의 작은비원‘이 있는 우리집을 그들의 ‘쉼터’로 제공해 그동안 나로 인한 어려웠던 마음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장소가 되게 할 것이다.
남편에겐, 앞으로의 남은 인생을 신실히 같이 하면서 먼저 믿은자로써 주님을 대신하여 섬길 것이다.
나에겐 세 번째로 힘든 일은 예전에는 ‘돈 버는 것’이였고 지금은 ‘재정관리’이다.
수입의 원천이 되는 직장을 구할수 있는 실력과 경험을 쌓고 원하는 직장에 입사하는 것이 감히 말하건데, 예나 지금이나 오랜 시간과 인내와 성실함을 요하는 일일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시대의 흐름’ 또한 중요한 요인이라 할수 있겠다. 나는 가난이 죽도록 싫었다. 아니 가난과 패케지로 오는 모멸감, 수치심, 하대를 다시는 내 인생에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나이 또래의 사치와 지출은 보지도, 하지도 않고 열심히 저축했다. 열심히 한달 근무하면 어김없이 지급되는 ‘월급’을 감사히 받고 알뜰히 저금했다. 그 시대 이자율이 최소 10% 였던 ‘적금’은 항상 나의 절친이었다.
나는 돈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그러기에 귀중히 다룬다. ‘돈’은 정직하다. 성경의 “돈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진리이다. 사람들은 ‘돈’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것 같다. 자신들의 과신이나, 욕심으로 인한 결과들을 말 못하는 ‘돈’에게 비겁하게 책임을 전가한다. 나는 ‘돈’ 앞에서 정직하려고 애써며 살았고 살고 있다. 공적이던, 사적이던 모든 돈거래앞에서 투명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돈’은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과 맞서는 ‘맘몬’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 악명을 익히 알고도 그 악명에 걸맞는 ‘주의’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항상 준비하며 살았다. 어떠한 상황이 와도, 이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나의 영혼을 팔지 않게, 나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라고 말씀앞에서 너무나 추상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은 자기만의 해석으로 결말이 좋지 않은 경우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시고, 나는 이땅에서 내가 해야하는 일을 해야한다” 라고 믿었기에 좋지 않는 결과를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라며 자신의 무지나 게으름의 결과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행동들은 참으로 마땅치 않았다.
‘돈버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성실과 근면은 기본이요, 철처한 계획 아래 다른이보다 지혜롭게 부지런히 알뜰하게 관리해야 숫자가 늘어난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얻은 ‘돈’으로 나를 식사에 초대해주고, 선물까지 해 주는 이들에겐 나는 최선을 다해 감사의 표현을 한다. 그들이 나에게 조은 것을 주기 위해, 그들의 삶에서 자기것을 포기한 ‘선의’임을 알기에
남편의 퇴직과 나의 퇴직으로 수입의 근원이 없어져 버린 지금은 ‘관리’가 더 힘들다.
아무도 예측할수 없는 수명과 질환들앞에서 무엇을, 얼마를, 계획할수 없는 지금은, 참으로 매일매일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느낀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내일이 두려워 마냥 움켜지며 ‘인정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의 삶을 내가 책임져야하기 한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불안함으로 인한 ‘인색함’ 위에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가 덥어져 움켜쥐고 사는 삶이아닌 베풀며 살아가는 남은 나날들이 되어지길!
남아있는 나날들 동안 주신 은혜들을 충직한 청지기로 잘 관리해, 많이 베풀고, 후원하고, 대접하며 살수 있기를. 나의 ‘믿음의 품격’을 지키고 ‘믿음의 본’이 되는 삶을 살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