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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 / 엡3:1~13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드러내시고 싶은 비밀은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입니다. 이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성령으로 나타나시면서, 이 놀라운 비밀을 경험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교회를 통해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소원이며, 이 비밀을 알아가며 그리스도와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들로 세워진 교회는 아버지 안에 아들이 거하고 아들 안에 아버지가 거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거하고 교회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여 생명으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세상에게 그리스도를 빛으로, 주인으로, 창조주로 나타내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을 세상이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인 목장에서의 교제는 그리스도가 나누어지므로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생명의 교제이어야 하고, 그 교제가 교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하나의 조직이나 단위가 아니라, 교회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는 복음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드러내려면, 내 안에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져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은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이 감옥이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찾아오는 사람 만나 전도하고, 감옥 안에서 전도하였으며, 에베소서를 비롯한 중요한 성경들을 기록하는 등 더 큰 일을 했습니다(엡3:1, 12). 노예로 팔려간 요셉, 양 치던 다윗,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어떻게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이기면서 승리하고 하나님을 나타내었습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복음의 능력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나약했던 주님의 제자들도 복음에 붙잡히자 죽음 앞에 도망하던 그들이 주님을 전하는데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었습니다. 특히 본문의 바울은 오히려 두렵고 힘들고 약해졌을 때와(고전2:1~5), 질병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고후12:9~10).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들의 인생의 완전 해답인 복음이 없고, 어떤 이는 복음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눌려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을 누리면 우리 약점, 상처, 환경을 완전히 정복하고, 삶의 현장을 정복하고, 경제를 정복하고, 문화를 정복하면서 즐겁게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면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가지는 특권입니다.
▣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 믿음으로 모든 죄와 저주에서, 사단의 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엡3:6~7). 그 피로 우리의 죄와 저주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부활하셔서 원수 마귀의 머리를 밟고 그 권세를 꺾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는 절대로 망할 수 없도록 해방 받았고, 하나님께 응답받고, 축복받고, 능력 누리며 살도록 자녀가 된 것입니다(요1:12, 롬8:15). 이 복음의 능력으로 힘없는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고, 무식하고 연약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령충만 받은 성도들에 의해서 로마가 정복됐고, 핍박자 바울이 이 복음의 능력을 누리므로 로마를 정복한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바울은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엡2:8).
본문 8~9절에서 바울은 이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인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경륜”이란 무엇입니까? 완벽한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시간표를 만들어서 그 시간표대로 준비했던 것을 때가 됨에 복음을 전하여 받을 사람과 더 나가서 복음을 전할 사람을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 이 복음의 비밀을 교회를 통해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5장을 통해서 우리로 교회의 몸의 지체들로 삼으셔서 교회생활이 그리스도를 담고 나타내고 전파하고 성령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함을 나타내게 하심을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림으로 이 세대를 본받아 살지 말고 늘 마음을 새롭게 하여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아 분별하며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롬12:1~2).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라는 것입니다(롬12:3~8).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들로서 교회생활이 성도들의 생활의 전부인 것을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통해서 알게 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라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모든 생활을 하라는 것이며, 교회가 성도들의 삶이고 생활의 전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복음에 붙잡혀 무슨 일을 하든지 교회 중심으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 그러면 교회생활에서 어떻게 이 복음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까?
1) 말씀을 통해 누리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복음을 주의하여 듣고 행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누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은혜를 받는 다는 것은 바로 내가 듣고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으로 변화되어 확신을 가지게 되고 이해하여서 내 몸에서 체질화 되도록 굳게 봍잡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려고 훈련하면 되는 것입니다
2) 생각을 가지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을 생각하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된 복음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람을 만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나는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의 기준, 전도의 기준을 가지고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4) 문제가 올 때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나를 좋게 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 진정한 복음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5) 내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처럼, 노예로 팔려갔어 도, 옥에 갇혔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굳게 지키면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양을 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수금키고, 심심할 때 열심히 돌 던지는 연습하고, 시를 쓰면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 자리에서 믿음을 굳게 세우고 열심히 전하면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모든 삶의 행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밀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서 알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이 귀한 비밀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늘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자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 하늘꿈공동체” / 행 20:25~35
지난 두 주 동안 교회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떡을 떼고,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픔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며, 예수님 때문에 울고, 예수님 때문에 웃고, 한 방향, 한 머리에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룬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행20:18~19).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강력한 성령님에 이끌림을 받으며, 내가 눈물을 흘리는 심장에서 솟아오르는 고백을 품에 안고 또 다른 사명의 길을 달려가겠다는 것입니다(행20:24). 바울은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지체들을 생각하니 염려도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끄러움 없이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고 떠나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들, 목자들에게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 양떼를 잘 섬기는 것이 목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부탁은 양떼를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행20:28). 양떼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지불한 예수님의 생명을 대신 한 자들이며,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서 세운 공동체입니다. 목자는 누구입니까? 양떼를 잘 섬기라고 성령이 친히 감독자로 삼은 자들이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로 부름 받은 사명자들은 성령이 감동하셔서, 양떼를 섬겨야할 강력한 영적 부담을 마음에 주셔서 세워진 사람들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목적도 동일합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양떼를 돌보는 것입니다. 양떼를 잘 돌보고 섬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목자는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는 것입니다(요10:14~15).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어준 곳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양들의 생명을 자신의 피 값으로 사심으로, 십자가에는 양들의 생명이 있는 것이며, 십자가로 나아가면 나의 생명이 내 지체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과 회개한 베드로가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나옵니다. 세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묻고 대답하는 둘의 대화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이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네 생명이 다할 때까지,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정말 나를 사랑하며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물었던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하늘꿈교회 성도들아,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의 고백은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표현이 따르는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목자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표현이고 행동인 것입니다.
▣ 양떼를 잘 지키는 것이 목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로 사신 이 귀한 양떼들을 두고 떠나는 바울의 심정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목자들에게 목장을 섬기고, 양떼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 흉악하고 사나운 이리들을 경계할 것을 신신당부 합니다(행20:29~30). 사단의 세력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이단의 무리들이 흉악하고 사나운 이리들입니다. 흉악하고 사나운 이리들은 특징은 양떼를 아끼지 않고, 왜곡된 말을 좋아합니다.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유혹하고 파당을 만들어가며 남을 헐뜯는 왜곡시키는 어그러진 말들을 하는 자들입니다. 멀리서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여러분 중에서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목자 중에서도 흉악하고 사나운 이리가 나와서 어그러진 왜곡된 말로 파당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삯군이 되어서 양떼를 돌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떼들은 병들고 영양실조로 죽어갈 것입니다. 양떼들은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목자들이 갖고 있는 사랑의 관심이 양떼들에게 흘러들어가야 합니다. 전화도 해주고, 기도해 주고, 어루만져주고, 심방도 해주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목자가 좋은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입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목자가 좋은 목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깨어서 경계하라고 목자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행20:31). 그러면서 에베소 교인들과 자신이 목자의 심정으로 목회하던 3년의 시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지식으로 양떼를 섬기지 않고 눈물로 양떼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서 섬기고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목자의 섬김과 돌봄과 지킴이 없이는 안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자의 품을 그리워하며 그 품속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자의 품을 시냇가의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푸른 초장으로 표현했습니다. 미가서 2장 12절에서 ‘보스라’는 에돔의 푸른 초장으로 가득한 도시를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단어의 뜻은 “요새와 같은 울타리 안에 보호 받는 양 떼”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품이 이런 것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이제 주님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맡아주십니다(행20:32).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을 따라 양떼를 섬기고, 지키는 목자의 꿈을 품으시기 바라며,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헌신의 삶은 만남을 복되게 한다.” / 행 18:1~11
구약에서 헌신의 단어 중 하나는 자신을 드려 예배한다는 의미의 ‘아바드(דבצ)’는 “섬기다, 일하다, 수고하다, 헌신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출3:12). 이 ‘아바드(דבצ)’는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일하는 것을 말하며 섬기는 사람의 위치에서 행하는 헌신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에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신된 자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자, 또는 예배드리는 자로 쓰이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헌신이란 직접적인 용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헌신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파리스타네테(πριστανετε)’라는 단어는 ‘곁에 둔다.’ ‘준비한다.’ ‘처분에 맡긴다.’ ‘드린다.’ 혹은 ‘바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롬6:13). 우리 자신과 지체를 하나님의 곁에 두어서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준비하라는 말씀이요, 우리 자신과 지체를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그분께 맡기라는 말씀이십니다. 곧 우리 자신과 지체를 성별(聖別)하여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쓰이는 헌신의 단어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바친다는 의미로 쓰였던 것입니다.
▣ 그러므로 성도들의 헌신된 생활은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아덴에 있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의 변론에 심취되어 학문을 가지고 서로 논쟁하다가 복음의 진정한 맛을 못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고린도에 돌아와 아덴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아덴의 생활은 주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위한 싸움이었음을 알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만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생활 방식으로 자신을 바꾸었는데,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위하여 하겠다는 생각에서 결단한 생각이었습니다(고전1:18, 23~24). 이러한 생각은 곧 바로 바울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일을 같이 하여야 했기 때문에 장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습니다(행18:3). 이같은 결단은 자기의 생활을 위한 전념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전념하기 위한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교훈을 따라 우리도 생활자체가 자신의 욕심을 위한 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고전10:31).
▣ 헌신은 생활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굿간에 탄생하심, 공생애의 전체, 십자가를 지심은 인간들의 죄를 위한 최대의 헌신이셨습니다(빌2:6~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삶 자체가 곧 헌신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헌신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에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에서도 칭찬을 받았습니다(고전16:19).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했으며, 교회를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고린도 지역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역사는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장에도 한 사람의 헌신하는 사람으로 부흥되는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본장에서 보면 복음에 헌신한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에 내놓은 디도 유스도, 또 회당장 그리스도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서 합류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과 함께 헌신된 사람들이 일어날 때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 헌신된 일꾼들인 것을 잘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 헌신은 만남을 복되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다(고후5:17).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과 만남은 이들 부부의 삶의 방향, 목적을 송두리 채 바꾸어 놓은 축복의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정도 고린도에서 사역을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부였습니다. 고린도에서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보고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행18:5). 바울이 고린도를 전도할 때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들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에 불타올랐던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이들 부부에게 옮겨가고,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헌신된 마음이 이들 부부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전이"라고 말합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고 훈련받는 일에 헌신했으며, 교회와 교회 지도자, 특히 바울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동역자라고 불렀던 이들 부부는 바울과 함께 로마로 와서 복음전도를 돕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어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16:3~4). 헌신하려면 먼저 헌신할 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범죄하여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롬4:25; 5:8),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주와 함께 죽어 주와 함께 장사지냈고, 새 생명 가운데 거하도록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입은 자라 말씀하십니다(갈2:20, 고후5:14, 롬6:1~11). 그러므로 신자들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롬6:11). 이와 같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된 성도의 삶을 살되, 일생동안 주를 향한 전적인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고후5:9), 깨든지 자든지 주와 함께 살고(살전5:10),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고전10:31),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해 하는(롬14:17~18), 그리하여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나타내는 자(빌1:12)가 되는 그러한 참된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붙잡힌 헌신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이요 나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을 받아 우리 하늘꿈의 가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흘러들어가는 영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 행 11:1~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기관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믿음의 본이 되는 성도는 가정을 잘 살피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화목한 가정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도 웅장한 건물을 가진 교회나 부자들만 모인 교회나 많이 배우고 세련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서로 화목하고 하나 되는 교회인 것입니다. 볼록렌즈로 햇빛을 통과시키면 빛이 모아져서 하얀 종이를 태우는 것처럼, 하나 된 교회가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 됨을 방해하는 위험한 일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도 보면 위기는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 될 수 있었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하늘꿈교회를 잘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 위기를 만날 때마다 대화로 극복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그들과 교제했다는 사실 때문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방인들과 교제했다는 것은 큰 책망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서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지만 일반 성도들은 경험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의견의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갈등을 대화로 풀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고넬료의 가정에 가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보여주셨던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말씀 후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했고, 성령님께서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아무런 의심도 말고 따라가라고 말씀하셔서 여섯 명의 성도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갔습니다. 이 때 고넬료도 천사의 음성에 따라 초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중에 성령님이 임하셨음을 설명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성도들은 오해를 풀고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베드로를 불러놓고 비난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처럼 경험하지 못한 성도들에 대해 교만하거나 무조건 책망하지도 않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체험하게 하신 것은 아직 체험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시켜주고 겸손한 마음으로 도와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오해인 것들이 많이 있는데 대화가 없으면 오해를 풀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 2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는 일도 마무리됩니다. 열두 지파 중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강 동편 땅을 분배받았는데, 두 지파 반 사람들이 요단강 언덕 가에 커다란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아홉 지파 반 사람들이 오해하여 전쟁을 하려고 무장하여 달려갔으나 우상숭배를 위하여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제단과 똑같은 모양을 쌓아 자기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임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해가 풀리고 끔찍한 전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비난하고, 신앙적 경험이 많은 사람은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무시해 버리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사단은 분열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오해를 받을 때에 인내를 가지고 잘 설명해주고 내 생각과 다른 성도들의 말을 대화로 잘 풀고 인내로 잘 들어주어서 하나 되어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 언제나 교회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악한 일에 하나가 되지 말고, 선한 일에 하나가 되고 좋은 일에 하나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행5). 예루살렘의 모든 성도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과 교제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자 지금까지 했던 비난을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의 생각과 신념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합니다. 이방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서는 지금까지 자기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생각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습니다(행11:18). 교회가 무슨 일을 결정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시겠는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또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교회의 지도자들인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순종해야할 최종 권위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바르게 가르쳐주고 인도할 책임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움직이는 신앙 공동체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 생각으로 통일되어야 하며, 성경의 가르침 앞에 잠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신앙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훈련이란 자신의 뜻이나 감정,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훈련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큰 축복과 신앙의 성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굴복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주일날 놀러가고 싶은 마음,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할 십일조와 헌물을 떼먹고 싶은 마음, 어떤 사람을 미워하여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는 마음, 기도에 깨어있지 못한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고 순종하여 큰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자” / 요 6:66~71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고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역사를 만들고 말씀을 듣고 믿고 지켜 행하는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나라에서 부강한 나라로, 작은 나라라 할지라도 크게 만들었습니다(렘22:16, 32:27). 영국, 독일, 미국이 부강한 나라가 된 이유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말씀대로 사는 나라만이 세계 최강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구도 적고 땅도 작고 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의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의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온 국민이 성경말씀을 읽고 그 안에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 모든 부정부패와 죄악에서 떠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능력이 있고, 살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말씀이 깨달아 지며, 지켜 행할 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어,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 부요한 삶, 풍족한 삶을 살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은 “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성경번역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씀과 삶이 일치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 때 그 말씀은 우리에게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고 마치 의사가 가지는 예리한 칼처럼 그 사람을 찔러 쪼개며 수술하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 우리에게 있는 기록된 성경 말씀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 마귀에게 세 가지의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마4:3~10, 신8:3, 6:16, 6:13).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우리를 시험할 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암기하고 묵상함으로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한 길로 우리를 치러 들어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나아와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 때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8)라고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인정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는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 하인의 병을 즉시로 고쳐주셨습니다(마8:7~13). 말씀에는 권세가 있어서 고통 가운데 처한 우리가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시107:19~20).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마5:18).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고 받아들이면 지금도 백부장과 같이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이나 경험이나 감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의지하고 인정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믿음으로 체험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며 떠드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이가 잔다”는 말씀을 하실 때 비웃었지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야이로는 그 말씀대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을 비웃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고 선포하실 때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으며 이를 본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성경의 말씀에서 예수님과 성령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10:8). 문제는 성경 66권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도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성경말씀을 보고 읽기만 할 뿐 영혼의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는 실제적인 역사는 그냥 흘려보내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고 눈에서 떠나지 않게 늘 읽고 묵상하면서 지켜 행하는 자에게 생명이 되고 육체의 건강이 된다고 하였습니다(잠4:20~22).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항상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상황도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함없고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늘도 항상 신실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 하늘꿈의 공동체들이 능력의 말씀으로 무장하여서 신앙생활의 경주를 매일같이 함으로 모두가 승리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순절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 출 3:13~14
본문의 말씀은 모세를 부르시어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맡길 때에 이름까지 밝히면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인도를 받은 곳이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이집트에서 종살이와 노예생활이 몸에 밴 종과 노예근성을 씻어내는 자리였습니다. 광야생활의 고통으로 드러난 종살이와 노예근성을 가지고는 계속해서 전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사로잡혀 종살이 하던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 모두 광야에서 사라지고, 광야에서 새로 태어나 훈련받은 2세들만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순수 믿음의 회복과 민족의 정화와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얻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광야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일상의 익숙함과 편리함에 빠져서 믿음의 행진을 거부하게 하는 일들, 경쟁과 탐욕에 물들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우리들 자신만을 자랑하고 좌절의 아픔을 경험하는 우리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금식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실상을 대면하여 이를 씻어내고, 순수한 믿음, 새로운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절기의 은혜입니다. 사순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표현인 것을 깨닫고, 사순절을 통해서 다시금 그 무한한 사랑에 붙잡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의 삶을 통해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를 찾는 일에 열중하며, 그 일을 찾아 행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경건을 생활화 하므로 사순절의 참 의미를 되살리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기독교에는 교회력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안에서 완성된 우리의 구원 역사를 매년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력은 처음에는 부활절을 전후로 해서 사순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로 발전하게 되었고, 4세기에 이르러 하나님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됨과 관련하여 주현절이 등장했습니다. 이 주현절이 4세기 말에 성탄절과 나누어지고, 그 후에 마지막으로 대림절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력은 초대교회의 삶과 믿음의 내용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수난, 죽으심, 부활, 영으로 임하심, 그리고 재림 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의 연 주기(Annual Cycle)는 부활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주기와 성탄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림(강)절, 성탄절, 주현절 주기로 나뉘어집니다. 이러한 주기로 이루어진 교회력의 중요한 특성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절기라는 점을 명심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부활절은 교회력의 모든 축제절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근원이기도 합니다. 부활절의 기쁨과 승리의 분위기는 초대교회를 세우게 한 힘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기 성도의 전도활동의 원동력이었으며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에 초점을 맞춘 매 주일의 예배는 작은 부활절(little Easter)로서 교회력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당하는 어떤 고난이나 고통도 그들을 좌절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부활절은 교회력의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사순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순절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세례 받을 자들의 준비기간으로서의 사순절과 개인적인 경건과 회개의 의미가 있는 사순절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 때에 이르러서는 세례와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수난에 접하고 머무르는 준비의 기간으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사순절은 시간이 흐를수록 엄숙한 예배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세상에 물들고 세속의 경험한 것들을 부정하고 참회하므로 씻어내는 기간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은 회개, 기도, 화해, 금식을 통한 신앙성장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때 방해하는 옛 생활의 모습을 버리는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 그러므로 사순절은 자신의 신앙점검의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순절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살펴보는 기간이지만, 우리들의 신앙 점검과 회개의 기간이 되어야 하며, 거듭남과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의미를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내가 온전한 믿음이 되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가?’ 늘 시험하고 확신을 가지라고 말합니다(고후13:5).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줄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2) 말씀을 늘 먹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썩을 양식’ 이상으로 ‘영의 양식’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요6:27, 32, 33, 35). 말씀을 먹어야 생명이 풍성해지고 감사와 찬송이 나옵니다.
3) 기도는 매 순간 끊임없이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말씀을 매일같이 먹고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건강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4)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전도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주신 사명이며 성령님의 충만한 권능을 받은 사람들이 가지는 사명입니다(마28:19~20, 막16:15, 행1:8, 20:24). 전도는 하나님의 소원이시고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잣대 중에 한가지 입니다.
5) 나는 항상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는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다시 오실 주님을 늘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얼마든지 인내하고 참아내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2012년 40일 사순절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고 주님의 뜻을 되새겨 보는 은혜의 사순절이 되고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시는 하늘꿈의 모든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축복” / 출 16:1~12
‘고난’이라는 영어단어를 「킹 제임스」버전(KJV)에서 “toiling”으로 쓰고 있는데, 여기에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의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영어단어 “passion”은 “고난”이라는 뜻과 더불어 “열정”이라는 뜻도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고난이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잘 인내하고 극복하면 새로운 삶의 열정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모진 고통과 아픔 그리고 실패를 겪고 난 후 결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고난은 나를 망하게 하는 것만 아니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막스 다이몬트(Max I. Dimont)가 쓴 책 「유대인, 하나님, 그리고 역사」가 「이것이 유대인이다」라는 제목으로 1979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모든 문명은 반드시 소멸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죽음이 없고 소멸되는 것을 거부하고 계속하여 독특한 문명을 유지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은 자녀들에게 참혹했던 과거 고난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들고 어려웠을 때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과 같은 고난을 잊어버리면 따뜻한 봄날과 같은 축복은 맞이할 수 없습니다.
▣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을 나온 후 홍해를 만났고, 마라의 쓴물을 만났고, 두 달 동안 그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등 계속적으로 어려움만 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리기를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렵고 힘든 광야의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호위하시며 보호하셨고,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켜 주셨음을 체험했습니다(신32:10).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는 똑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더라도 참고 인내하고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만나주시고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 고난은 강한 자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훈련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수리처럼 훈련시키셨습니다(신32:11). 독수리는 날카로운 가시로 외벽을 만들고 내부는 자신의 부드러운 털과 풀잎으로 포근하게 둥지를 완성하고 때가 될 때까지 새끼를 지켜주며 편안하게 양육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나는 훈련이 시작되면 둥지의 부드러운 부분을 없애고, 새끼 독수리를 둥지 밖 절벽으로 밀어버립니다. 어미는 떨어지는 새끼가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 새끼를 날개에 받아 둥지에 올려놓았다가 또 다시 떨어뜨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결국 높은 하늘을 나는 하늘의 왕 독수리를 길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독수리처럼 훈련을 시키십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들고, 꿈에 제동을 걸고, 자신감을 꺾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당신뿐입니다”라고 고백할 때까지 이일이 계속됩니다. 그리고는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도록 만드십니다. 바로의 궁을 뛰쳐나온 혈기왕성한 모세보다는 지팡이를 짚고 바로 앞에 나가던 모세가 더욱 강하듯이 말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면서 우리들이 만나는 내적, 외적인 고난은 물론 우리들의 삶의 환경을 통해서 오는 고난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강한 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훈련 방법인 것입니다.
▣ 고난을 통해서 믿음의 간증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셨습니다(출19:6). 하나님은 먼저 400여 년간 이집트의 풍족한 땅 고센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둥지를 흩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갈 날갯짓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머물던 둥지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죽음의 두려움과 목마름, 그리고 배고픔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예전에 머물었던 땅 편했던 보금자리를 생각하며 원망했습니다(출14:11, 16:3). 이렇게 고난만 오면 불평과 원망이 많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보호하신다.’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갖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운 세상살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의 날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들의 불평」이라는 동화에서 새들은 짐과 같은 날개를 원망하였지만, 날개는 괴롭게 지고 있는 ‘짐’이 아니라 창공을 가르는 도구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짐을 지고 삽니다. 어떤 분에게는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짐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와서 이런 저런 짐을 집니다. 그러나 그런 짐이 하늘을 향하는 날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에, 근심에, 고난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하는 우리의 자세가 해결의 열쇠입니다. 성경은 고난과 근심이 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라고 가르칩니다(약1:2). 이사야 41장 10절에서 약속한 말씀을 믿으시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간증이 많아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연단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강하게 하시며, 능력 있게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셔서 담대하게 하시고 준비된 축복을 받게 하시는 분,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나타나는 고난이 날개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나는 독수리와 같은 삶이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특징” / 눅 24:44~49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으면서도 자신이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혼동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입으로 시인한 사람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해서 모두가 다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성령 세례란 무엇입니까?
토레이(R. A. Toray) 목사님은 중생과 성령 세례에 대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의 서로 다른 역사”라고 말하였습니다. 거듭나는 중생이 성령의 기본적인 역사라고 한다면 성령의 세례는 그 기본적인 역사에 더욱 진전되어 제 2차적인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이미 중생한 상태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그들이 중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 10절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말씀도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중생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헬라어 “밥티조”(ϐαρτιξω)는 ‘담근다’ ‘잠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뜻이며, 부정과거형 시제로서 이 시제는 단회성의 동작을 나타낼 때 쓰는 시제입니다. 따라서 물세례와 성령 세례는 반복해서 받지 않습니다. 성령 세례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고전12:12~13).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서 사람이 몸이신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이며,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고전12:3). 성령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가지는 첫 번째 일이며, 동시에 가장 처음 되는 성령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 성령 충만은 무엇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움직이고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역사가 인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를 바꾸는 것이지만, 인간을 바꾸는 것은 교육이나 제도가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성령님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의 욕망과 사람을 따라 살면’ 그는 육신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고전3:3). 이같이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성령님의 계속적인 간섭이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성령 충만함으로 젖어 있어야 육신의 일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롬8:11, 13). 본문 49절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3년 이상 영생의 진리를 배웠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온 세상에 나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받을 때까지 그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증거 하는 일과 주님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성령 충만을 주시는 것입니다(행1:8). 성령 충만의 주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충만함”이란 헬라어는 현재형입니다. 현재 충만함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 사이에 베드로가 세 번이나 별개의 경우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2:4, 4:8, 4:31). 우리가 죄에 넘어지면 계속해서 자백함으로 죄 사함을 받듯이 성령 충만도 반복해서 받아야 하는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 성령 충만한 성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몸으로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봅니다(눅24:45, 48). 그러기에 성령 충만을 주신 것은 예수님같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잘 섬기면서 성도다운 삶의 사명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특징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으며,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눅1:15). 그가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문안하는 소리가 들리자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습니다(눅1:41~45). 이것은 성령 충만이 뱃속 신앙을 산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뱃속 신앙의 성도는 주께서 하신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방황도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뱃속 신앙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세상 욕심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습니다.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장차 올 왕국과 그 왕께 대한 전적으로 자기를 잊은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1:17)이 세례 요한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었습니다(눅3:16). 세례요한의 죽음은 결코 억울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며(고전15:19), 세례 요한이야말로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요3:29), 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요1:23),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는 오직 하나의 진실에 충실했던 진정 성령 충만한 삶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여러분은 성령의 열매와 사역의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내 삶에 나타나는 어떤 흥분의 삶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요한 같이 사명을 깨닫고 그 일을 감당하면서 기쁘게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단지 영적인 징조만을 보면서 살기 원하십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의 축복” / 막 14:3~9
우리 하늘꿈 공동체의 가장 큰 역동성을 일으키는 제8차 비행기가 다음 주부터 열리게 됩니다. 반드시 승리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다니 동네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장소를 물색하다가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정하였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서 시몬의 집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셔서 복음이 전파되는 그 곳은 성령의 은혜가 강력하게 역사하는 현장이 됩니다(마18:20). 우리들이 준비하는 제8차 비행기가 바로 이러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비행기는 지식적인 성경공부로 끌어가서는 안됩니다. VIP가 있기 때문에 비행기의 방향은 말씀을 통한 나눔과 교제여야 합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시작할 때 이곳에서 나눈 이야기는 영원히 비밀로 간직할 것을 규칙으로 정해야 합니다. 비행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변화를 가장 확실하게 경험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길을 목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모임장소입니다. 모여서 서로의 이름뿐 아니라 서로의 형편을 잘 알고 각자의 필요를 위해 중보 기도하면 한 사람도 소외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한 참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문득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런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비행기 안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헌신의 향기가 가득이 풍기는 성령 충만한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요12:3).
▣ 비행기를 통해서 사랑과 치유와 회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우고 본 제자들도 주님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리아는 이해하고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에 증거를 통해 보면 누가복음 24장 10절에서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준비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그 준비한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가 그곳에서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루살렘에 있어 예수님의 무덤에 갈 수 있었지만 베다니의 마리아는 갈 수 없었으므로 미리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을 아시고 그녀의 행위를 평가하셨습니다(막14:8).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위하여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그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을 사모하면서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는 비행기를 통해서 영적 눈이 열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한 마음으로 한 곳에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바울의 일행과 같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가르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 2:12, 14, 16, 2:9).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마리아 같은 사랑의 지출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1C 초기 현대문화의 환경 속에서 복음전도를 위한 소그룹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합니다. 진정으로 예배하고 전도하는 교회는 성령의 충만한 위로로 계속해서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번성했던 교회가 급격히 쇠퇴했던 이유는 교회가 너무 예배 중심으로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핵심 가치이지만, 순종하는 삶이 수반되지 않는 의식적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1990년 이후에 다시 미국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소그룹 모임의 활성화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 교회처럼 비행기를 통해서 함께 기도 응답받았습니다.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과 자세로 헌신하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목장은 빛이 비칩니다. 불이 임합니다. 성령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 비행기는 나 자신이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교회가 복을 받는 시간입니다.
비행기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보다는 선포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한 성경말씀 곳곳에서 예수님과 바울은 “내 장례(my burial), 예수님의 별세(his departure)”를 선포하였습니다(눅9:28~31, 고전15:3~4, 20).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세 가지 사건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구속사의 중심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이것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복음전도입니다. 그러므로 비행기의 모임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몬의 집에서 열렸던 소모임에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기뻐하시며 그 모임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막14:9). 사무엘하 6장 11~12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있는 동안에 그 집에 복이 임했으며, 다윗이 그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니 온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복음전도에 힘쓰고 협력하면 그와 그의 온 집과 그의 모든 소유가 복을 받습니다. 비행기의 시작은 마침내 온 교회가 복을 받는 시간입니다. 여호와의 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비,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지는 의미는 결국 예수님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요1:17~18, 롬10:4).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 생명이 되셨고, 그 생명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뭔가 희생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십니다(막10:30, 눅18:30). 전도는 혼자하면 참 어렵지만 같이 하면 쉽습니다. 비행기를 통해서 같이 모여 기도하면 용기가 생기고 미지근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우리 교회 목장의 기본 틀은 G5+2이며, 비행기의 최종목표는 궁극적으로 한 명의 VIP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모으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복을 부어주시고, 가정이 복을 받고, 영생이 보장되는 것이며, 우리들의 믿음이 더 한층 성장하는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복음 증거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비행기를 위해 일 년에 6개월을 헌신하신다면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크고 장구한 복을 받고 각각 개인의 믿음이 성장하고 영생의 소망으로 넘쳐 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겨냥하면 땅을 얻게 됩니다(잠22:1, 4). 이 모든 일에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체험하시는 2012년 제 8, 9차 비행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복음의 선물 - 은혜” / 롬 6:17~23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제시하는 복음 전도의 전략을 따라서 열심히 전도해서 많은 사람을 제자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골4:6, 벧전3:15). 주님은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요3:16). 그러므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4:20~21). 우리들도 언제나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고 그래서 사람들을 잘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요일4:13).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여 계심을 아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전도와 사람을 키우는 양육과 그리고 사람을 보내는 선교의 임무를 잘 완수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고 명료한 복음의 제시를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킨 케네디 목사님은 복음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서 그의 신앙을 진단해 볼 것을 권면합니다. 첫 번째로 “성도님은 신앙생활을 하시는 중에 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는데 도달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그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진단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성도님은 오늘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가서 섰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내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그가 구원의 방법으로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가 잃어버린 영혼인지를 발견하고 복음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데 케네디 목사님은 복음제시의 제일 단계로 은혜를 먼저 말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은혜, 그 자체로서 전도가 끝날 수 있고 계속해서 말씀드릴 두 가지 복음의 핵심을 연결해서 말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제시의 제일 단계인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천국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천국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라고 쉽게 소개할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각양 좋은 선한 것들이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입니다(약1:16~17).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시며 유지자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이 세계에 가득 찬 각양 아름다운 것 곧 모든 창조물들 모든 세상의 권세나 주권자들 모두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으셨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1:3, 골1:16~17, 행17:27~28, 히4:13). 이것들을 모두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한 생명, 구원, 천국도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은총, 은혜, 은사는 영생, 구원, 천국과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은혜의 길입니다(잠14:12, 사55:8~9).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 모두는 죄인이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롬6:23). 우리는 누구든지 영적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이 있는데, 죽음의 길에 은혜의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입니다. 바로 그 선물이 영원한 생명이요 천국입니다.
▣ 은혜의 결과는 영생이요 천국입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끊어지자 그 결과로 우리 육신은 죽어 땅에 묻히고 우리 영혼은 영원히 분리 되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런데 우리 죄의 결과인 죽음을 해결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곧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주어진 산 소망입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지만, 우리 영적인 생명은 더욱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요1:14, 16). 이 세상도 하나님의 은혜요, 천국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특히 구원의 은혜는 일반적인 은혜에 비해서 충만한 은혜요, 완전한 은혜요, 영원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만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완전 충족한 것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심으로만 그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만 인류는 죄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롬16:11, 엡2:8~9).
복음제시의 제1단계는 은혜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곳은 돈이나 공로나 자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로만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얻기 위해 무슨 일을 아니할지라도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이 믿음이야말로 복음인 것입니다(롬4:3~8, 롬6:17~18, 22). 이 세상과 인간의 삶을 은혜로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현상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어찌할 수 없이 영적인 죽음에서 육체의 죽음으로, 영원한 죽음으로 필연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은혜의 복음을 통하여 천국을 주시고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번 8차 비행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초청하십시오. 그리고 영생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의 선물인 은혜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복음의 선물 - 믿음” / 롬 8:8~10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뢰를 저버린 것입니다. 믿음의 실패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실패한 인생을 바라만 볼 수 없어서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모델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고 순종하고 나아간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을 우리들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이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신한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로 인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속죄와 새 생명 주심을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되는 새로운 언약관계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인격적인 교제를 누릴 때 이 세상의 어떤 문제가 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환란이 오더라도 핍박이 오더라도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죄가 없으신 참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값을 지불하시고 천국의 처소를 마련하시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 갈 수 있는 길은 예수님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행4:12).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선물을 받는 자, 즉 생명을 얻는 길로 가는 자는 적다고 말하고 있으며(마7:14), 이 구원의 선물은 우리들의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엡2:8).
▣ 믿음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에는 지식적인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 속에 들어있던 귀신들이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듯이 귀신도 알고 떠는 믿음이 있습니다(마8:29, 약2:19). 이같은 믿음은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알고, 예수님도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러나 지식적으로 알 따름입니다. 귀신들이 주님을 안다고 해도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지도 않으며, 자신들이 믿고 있는 대로 살지도 않습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알고만 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생명력이 없는 죽은 믿음이며, 다 헛된 믿음입니다(약2:17, 20). 마음으로 굳게 믿고 행하여야 하는데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체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를 보고 열매를 안다고 하시지 않고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는데(마12:33), 그 이유는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인들 중에도 일부 교인들은 이신칭의 사상만 획일적으로 강조함으로 인하여 적극적으로 선행을 행하지 않고 논쟁만을 일으키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강조는 하면서 삶은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로만 믿는 지식적인 믿음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고, 믿음과 행함이 함께 하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약2:22).
▣ 우리들은 살아있는 믿음, 구원받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깨달은 바울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심으로 바울의 말씀을 입증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고쳐달라고 간청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는 주님께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마8:8, 10). 믿음과 고백, 믿음과 행동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행함 있는 믿음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만듭니다. 믿음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여 믿음을 고백함으로 행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가라’고 하셨듯이 믿고 행동으로 즉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마8:13). 다음으로 자신의 체면을 자신의 지위를 그리고 자신의 인격을 예수님 앞에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내 보이며 행동하였던 삭개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그래서 사람들에게 빼앗다 시피해서 얻은 돈을 다시 나누어 주겠다고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이런 삭개오에게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가 이어졌습니다(눅19:1~10). 우리 감리교회를 창시한 웨슬리는 미국 선교사로 갔다가 선교에 실패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찬송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 웨슬리가 런던의 올더스게잇 거리에 있는 조그만 모임의 집회에 참석해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체험 이전에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자기 자신을 의지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위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했습니다. 그가 자기 구원을 위하여 신뢰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옮기고 그리스도를 그의 주님으로 영접했을 때 비로소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살아있는 행함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나에게 주신 영생의 선물인 복음을 얻게 하심을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영생의 선물을 받았으니 우리들도 이렇게 우리가 가진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선물인 믿음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복음의 선물 = 예수 그리스도” / 요 1:1~14
주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전도하는 것입니다(눅4:43~44). 주님께서는 그 일을 감당하시려고 모든 고통과 아픔, 그리고 외롭고 쓸쓸함도 이겨내시고, 순종과 인내, 그리고 사랑의 본을 보이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전도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목적을 따라 살 때에, 주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고 행한다면 더욱 구체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주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빛이 있으라” 이었습니다. 빛으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원상태는 물러가고 아름답고 보기 좋은 질서의 세계가 탄생했습니다. 빛의 창조와 함께 세상이 열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지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는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탐한 그 결과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는 단절되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바른 관계를 깨뜨리므로 빛과 아름다움이 넘치고 생명과 기쁨이 충만하던 에덴동산이 다시 이전의 혼돈과 공허, 흑암 속으로 후퇴한 셈입니다. 죄악으로 빛을 잃었으며, 인간은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요8:12).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혼돈, 공허, 흑암을 빛으로 몰아내신 것처럼 참 빛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십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만이 모든 불의와 불법과 죄악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실 수 있습니다. 생명과 승리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이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어둠에 지배받지 않고 참 빛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요1:4).
▣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구주도 영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요1:11). 그러므로 전하는 자가 있어야 믿을 수 있고 믿을 때 구원을 얻게 됩니다(롬10:14).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이 복음을 위하여 빛의 증거자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이 증거를 받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 생명의 빛을 경험한 우리가 빛의 증거자들입니다. 증거자는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빛의 증거자 세례 요한은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자로 부르셨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빛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자랑했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예수님만이 진리가 되시고 그 분께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해야 됩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는 들을 수 없고 들음이 없이는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전함을 듣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요1:12).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을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믿게 됩니다(행13:48).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생명의 말씀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오실 때에 만민의 죄를 대속할 만한 인격을 가지고 오셨으므로 그는 죽을 인생에게 얼마든지 은혜와 진리를 채워주시는 아들이십니다. 본문 14절에서 ‘거하신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장막을 친다, 성막을 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는 단순한 신학적 교리가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시23:4). 하나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사자 굴에 던짐을 당한다 할지라도, 풀무불에 던짐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요셉처럼 총리가 됩니다. 우리가 광야 길을 지나가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옵니다. 물에 빠져도 주님께서 함께 하면 베드로처럼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건져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러한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본문 14절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그 어떤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죄를 짊어지심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분” 이십니다.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 감격하지 않을 수 없고 행복하고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생명의 주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무덤 문을 열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사 영광과 승리를 얻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영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은혜란 영어 ‘Grace’를 “God's Riches at Christ's Expence -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은 하나님의 부요”라고 풀이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은 부요는 죄의 용서와 천국과 영생과 평안과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행복의 시작이자 완성입니다.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위한 첫 단계로 주님께서 당신에게로 들어오시라는 사인(sign)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도 되겠느냐?”고 프러포즈를 하고 계십니다. 이 은혜를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부활과 영생의 축복” / 요20:24~31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는 예수님의 부활로써 시작된 종교입니다.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축복을 보장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었을 것입니다(고전15:14, 17).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서는 그를 믿는 자들의 부활과 영생을 보증한 유일회적 표증이며, 동시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인류 역사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계속해서 진행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계속 진행되는 역사는 이제부터 인간의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요 육신을 입었던 생명이 영원한 영생에 변화되어 가는 한 과정의 절차인 것을 깨닫고 믿음생활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도마를 통해서 현재 계속 진행되는 진정한 부활과 영생의 축복을 받는 과정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 도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되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며,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교훈에 깊이 매료당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교훈이 얼마나 놀랍고 권세 있고 새로운지 그 교훈의 아름다움과 깊이와 넓이는 그의 가슴으로는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네가 남에게 먼저 대접하라”(마7:12),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용서하라”는 말씀 등에 매료되었습니다(마5:43~44),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기독교의 위대한 미래 소망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도마는 예리한 질문을 던지기까지 합니다(요14:1~5). 도마의 진리에 대한 열정은 드디어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변하지 않는 확고한 진리를 이끌어내었습니다(요14:1~7). 이러한 가르침에 도마는 매료되어 예수님을 힘을 다해 따랐습니다.
▣ 도마는 예수님의 인품과 능력 행함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교훈 이상으로 예수님의 인품에서 더욱 강렬한 존경과 애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말씀하신대로 생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셨고 늘 하나님 중심이셨습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셨으며, 겸손하게 자기를 비워 종의 모양으로 이웃을 섬기는 분이셨습니다. 도마가 볼 때 예수님이야말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신 분이시오 또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요11:16).
그뿐 아니라 도마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놀라운 권능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병자들을 고치셨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셨는가 하면 죽은 자도 살리시며, 바람과 파도 같은 대 자연의 위력도 말씀 한 마디로 굴복시키셨습니다(막4:39). 도마는 이렇게 예수님의 교훈과 인격 그리고 크신 권능에 압도당하며 예수님께 깊이 심취해 갔습니다.
▣ 도마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대와 예상에 반하여 예기치 아니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력하게도 로마 군병에게 끌려가 불법 재판을 받고 십자가 형틀에서 무참히 죽어버린 것입니다. 도마가 실망과 좌절감으로 방황할 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요20:25). 이렇게 의심하는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강렬한 어조로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27).
▣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다시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 도마의 영혼은 새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넘쳐났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부활과 생명의 충격이었습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자신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절망하고 의심하는 나에게 다시 찾아오셨다는 것에 감동하였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질 때 도마의 영혼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무한한 평강과 안식에 안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햇빛에 시들어진 목초 위에 이슬같이 상처받은 마음에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평안이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자기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자기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시고 다시 얻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자기의 유일한 구주인 것을 발견했습니다(요일5:11~12).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요20:28).
▣ 도마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29).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넣어 주심을 통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봄으로가 아니라 눈보다 귀하고 복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분에게서 항상 부활의 생명을 얻습니다. 죄 사함의 은총 속에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며 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의 선물을 도마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앞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게 될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생명입니다. 도마의 영혼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부활의 충격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제야 도마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외치시던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요11:25~26). 우리들도 부활의 영생과 축복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성경의 기록 목적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시고(요20:31), 바울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6:23).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도 도마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부활의 충격과 함께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회는!” / 요 10:1~18
하나님이 가르치는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요2:19~21),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18:20, 고전3:16, 행11:26, 14:27, 골4:15). 교회로 번역된 희랍어 “에클레시아”는 신약에서 113번이나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가 쓰여 지는 곳마다 그리스도인 전체나, 또는 특정 지역 안에 살고 있는 지역 교회를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행9:31, 고전1:2). 그러므로 교회는 이방인도 있고 유대인도 있고 어린 아이도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 교회는 목자와 같아야 합니다
교회가 목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은 교회가 이 세상을 지키고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양의 목자는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전도와 잃어버린 양에 대한 책임을 천명하셨으며(요10:16), 항상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다고 했고(마15:24), 늘 목자의 심정으로 인생을 보셨습니다(눅15:3~7, 마9:36). 그리고 예수님께서 감당하시던 목자의 역할을 사랑하는 제자들 곧 교회에게 맡기셨으며, 예수님은 목자적 생활양식 자체가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생활양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곳입니다(눅7:37, 요8장, 요4장). 목자는 개인적 희생을 통해서 멀리 보고 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며 먹입니다. 그러면서 목자는 양의 털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또한 교회는 분명히 이 시대의 양심이요 등불이요 파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상 교회를 통하여 선하신 목자의 역할을 오늘도 계속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목자 같은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곳입니다(눅15장). 목자는 양의 털을 깎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세상을 위하여 희생합니다. 그렇기에 구제와 봉사는 교회의 귀중한 사역 중에 하나입니다. 바울도 목자적인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행20:24). 교회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양들의 초장입니다. 그리고 안식처요 보호소며 피난처입니다. 양이 목자를 신뢰하면 죽음의 골짜기도 따라갑니다(시23:4). 상처 있는 양, 길 잃어버린 양이 교회를 신뢰한다면 그들도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을 자기 영혼의 목자로 삼을 것입니다.
▣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입니다
여기서 ‘통치’라고 할 때 교회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도구로 사용하여 통치하시면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가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주권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고 순종하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로지 최고통치권자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사명감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군대와 같다고 했습니다(딤후2:3~4). 교회는 최고사령관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살고 죽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아6:10). 군대는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원수와 전쟁할 때 사소한 자기 문제로 좌절하거나 후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지켜야 할 거룩한 복음 진리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죄의 권세, 마귀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전투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입니다. 즉, 투쟁이 없으면 영광도 없는 하나님의 군대인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사요 하나님의 대사입니다(고후5:20~21).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복음적 의를 소개하는 대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말과 행동과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 나라 왕국에 대한 철저한 의무감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철저한 정치적 집단으로 하나님 안에서 질서를 지키면서 왕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며 따라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 교회는 농부와 어부와 같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포도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포도나무를 심는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명이 다른 나라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늘 깨닫고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주 예수님의 인격적 영광을 드러내고, 외면적으로는 전도의 열매를 맺어 주님 앞에 설 때 기쁨의 면류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고기 잡는 어부에 비유하셨습니다(막1:17). 바다에 그물을 친 어부는 각종 물고기를 모은 그물을 물가로 끌어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립니다(마13:47~50).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양과 염소를 판단하시며 구별하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판단하지 말고 꾹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인 우리들은 농부와 같이 열심히 씨를 뿌리고 든든하게 자신이 자라도록 하며, 열심을 다해서 고기를 낚고 모으는 일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행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이 시대의 목자로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과 심장을 가지고 이 세상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랑을 가지고(눅15:4) 교회의 안과 밖을 뜨거운 관심과 무한 책임감을 가지고 돌보는 목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며 지켜야 할 말씀과 싸워야 할 대적을 가진 엄위한 규율의 군대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집단입니다. 교회는 농부이며, 어부, 일꾼입니다. 그렇기에 주님 앞에 서는 그날이 올 때까지 여러 층의 사람들과 마음들과 형편들과 계속 부딪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추수와 심판은 하나님과 천사의 일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늘꿈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빨리 깨닫고, 교회의 형상을 빨리 회복하여, 교회다운 교회로 이 세상의 빛과 등대가 되어 영혼을 구원하고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해 내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모습” / 엡 1:22~23
현대에 이르러 교회 성장에 대한 관점도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1960, 70년대에 교회 성장의 이론을 이끌던 맥가브란과 피터 와그너는 교인의 숫자, 교회의 규모가 곧 성장이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오면서 교회 수적인 성장보다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 교회인가에 관심이 더 많아졌으며, 지금은 영향력을 주는 교회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건강하면 성장은 그 열매로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건강하다는 말은 그 교회 교인이 건강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의 건강, 교인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의 토대는 열심히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게을리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 정도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악덕이요 죄악입니다(히10:23~25, 마25:26, 롬12:11).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 중심으로 모이는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부지런히 열심히 모이는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복음을 믿고 증거 하는 삶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요, 건강한 교회요, 기도의 응답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고, 복음 전도가 뜨겁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지 알아보는 첫 번째 요소는 ‘교인들이 헌신하고 있는가?’입니다. 모이는 헌신이 따르지 않는 교회는 주님을 등지는 교회요, 주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교회요, 죄 짓고 있는 교회입니다. 모이기를 열심히 하는 교회는 교인들이 시간의 헌신, 건강의 헌신, 물질의 헌신이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건강한 교회는 ‘성도로 하여금 건강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교회, 그래서 더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입니다(엡4:12). 우리들의 몸이 건강한 증거를 통해서 건강한 교회를 3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 영적인 호흡이 강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호흡이 건강한 것과 같이 건강한 교회는 영적인 호흡을 잘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건강 진단 첫째는 영적 호흡인 기도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도 하루 세 번씩 기도하여 기적을 체험했습니다(단6:10,22). 육시 기도시간(정오)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행22:6), 고넬료와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행10장). 제 구시 저녁 소제 드릴 시간에 엘리야의 갈멜산 제단 위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오후 3시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고,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27:51).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들은 하늘꿈 공동체에 걸어 나와서 은혜의 보좌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히10:19~20).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해 주십니다(요14:13). 그런데 기도 응답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심으로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마6:14~15). 용서라는 것은 죄인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며, 그 죄인이 바로 자신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신8:2, 잠3:34, 약4:6, 벧전5:5). 다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못 고친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막9:29). 우리들에겐 용서하며 기도할 수 있는 제 구시가 있습니다. 기도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영적인 승리, 건강한 신앙생활, 영적인 능력을 경험하시려면 이른 새벽과 아침에 기도하십시오. 정오와 오후와 저녁 시간을 하나님께 바쳐 보십시오. 내 기도가 곧 내 인생이 되게 하십시오. 숨을 잘 쉬어야 건강하듯이 영적인 호흡이 길고 원만한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 말씀의 양식을 잘 먹고 소화를 잘 시키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또한 교회의 건강 진단은 영적 영양섭취인 말씀에 대한 열의와 태도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은 믿음의 성도들의 영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4:4, 요6:6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따라서 건강한 교회는 ‘교인들이 얼마나 그 말씀을 잘 흡수하며 실행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소화능력이 왕성한 사람은 어지간한 것은 다 소화해 버리고 나쁜 것은 잘도 걸러 내보냅니다. 영양가는 골고루 그리고 꾸준히 적당히 먹어야 하며, 절제가 필요합니다. 신구약 모든 말씀을, 매일 적당하게 먹어서 “은혜는 성숙과 함께 한다”는 실제를 배워야 합니다. 언제나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설교시간,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에 말씀을 잘 듣고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소화시켜야 합니다. 즉, 깨닫고 지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시고 증진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전도의 생활을 잘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호흡을 잘하고, 영양을 균형 있게 섭취해도 적당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비만해지고 몸이 무거워집니다. 교회의 건강 진단은 영적 운동인 전도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기도의 잎과 말씀의 꽃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왕성한 기도로 잎이 푸르고 청청할 때 아름답고 건강한 봉우리가 생깁니다. 말씀의 은혜로운 꽃이 피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고 또 다른 사람을 전도자로 만드는 소담스런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성도가 전도로 열심히 제자 삼는 교회입니다. 이번 제8차 비행기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셔서 자신이 건강한 신앙인 것을 확증하고 건강한 교회인 것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건강치 못한 교회는 불평도 많고 원망도 많습니다. 우리 모두는 건강한 교회로 끊임없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은 새로운 습관을 익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성령님의 감화로만 가능하고 성령님의 감동은 복음 진리를 통해 역사합니다. 말씀이 흐르는 곳에 믿음이 자라납니다. 건강한 교회는 기도와 말씀과 전도의 훈련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전도를 당장 실천할 때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며, 반드시 축복의 문, 형통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 / 삼상 22:1~5
「피터 새비지」라고 하는 신학자는 보편적인 현대교회의 모델을 4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였습니다. ①강의실과 같은 교회, 즉 말씀을 들으려고 모이는 설교를 교회생활의 핵심에 두는 모델의 교회입니다. ②극장 같은 교회, 성례의 집전, 성가대의 찬양, 공연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회입니다. ③기업과 같은 교회는 많은 상품화된 신앙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제공되지만, 교인들의 관계성은 성경적인 공동체성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④친목단체 성격의 교회는 교제에서 얻게 되는 어떤 유익 때문에 모이게 되는 교회입니다. 이러한 현대교회의 모델이 형성된 데에는 나름대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기본적인 교회상을 무시하고는 결코 바른 교회를 이룰 수 없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를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시고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보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계신 신령한 공동체이며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공동체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요1:12~13, 15:16, 엡1:5). 그러므로 교회가 공동체라는 것은 전 성도가 유기체적 존재로 주님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로서 주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따라 그 뜻을 이루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 되어 전진해 나가는 공동체를 말하며, 나 하나가 잘못되면 모두가 잘못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함께 모이고 봉사하고 예수님의 몸을 세워 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물론 초대교회이지만 구약에서 보면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사울왕을 피하여 10년 이상을 도망 다니고 숨어 다녔습니다. 결국 도망 다니다가 들어간 블레셋 땅에서도 목숨만 부지하여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는데,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모였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22:1~2). 이같이 자발적으로 모인 아둘람 굴의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새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이 아둘람 굴의 특징을 통해서 진정한 우리들이 만들어야 하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 깨닫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 하늘꿈교회는 세상을 위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둘람 굴의 모여 있는 그들은 다윗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서로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다윗이 환란당한 자와 함께 할 때에 그들의 문제들이 자연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도 삶 가운데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위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모든 교회는 위로의 샘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위로하며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특히 목장을 통해서 어떤 고통도 교회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목장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삶을 나누면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이 어루만지시는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늘꿈 공동체가 세상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 하늘꿈교회는 모두가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둘람굴에 모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다윗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동역자는 생명 걸고 같은 방향을 향하여 함께 멍에를 지고 가는 관계를 말합니다. 빌립보서 1장 7절에서 ‘참예하였다’는 것은 같이 멍에를 메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뿐 아니라 항상 바울의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어떻게 도울까를 생각합니다. 오직 사랑에 사명에 매이는 것 그들이 동역자입니다. 이들 때문에 바울이 존재가치와 살아갈 이유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동역자는 신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예배드린 것만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기본 위에 우리 인생이 세워져야 합니다. 인생의 가치관과 목적을 향해 희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동역자들 입니다. 우리 하늘꿈 공동체 모두가 이렇게 신앙생활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돕는 진정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하늘꿈교회는 새 시대를 리더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둘람 굴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온전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더불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리더가 된 것입니다.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은 “위기를 극복해 내는 희망은 오직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도행전적 교회를 모델로, 능력 있고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교회로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성도 개개인이 교회의 DNA가 되라고 하면서, 사도행전적 교회를 구성하는 10가지 핵심 DNA를 말했습니다. 첫째, 성령공동체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운행하고 지배하고 말씀하는 곳이 성령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교회의 핵심가치입니다. 둘째, 예수공동체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셋째, 기적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매일매일 기적이 일어나야 하며, 그 기적의 소문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넷째, 고난공동체입니다. 진짜 복음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정직한 말을 하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나눔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은혜 받으면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 순결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는 지도자는 거룩한 지도자입니다. 순결과 정직, 이것이 사도행전적 리더십입니다. 일곱째, 리더십공동체입니다. 사도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뛰어난 평신도를 리더십으로 세워 나눈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이방인을 부르는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아홉째, 땅 끝까지 사랑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교회가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은 선교입니다. 열 번째, 교회가 교회를 낳는 공동체입니다. 개인이 개척하지 말고 교회가 교회를 낳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실수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남는 교회를 개척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적 공동체가 바로 다가올 새 시대를 리드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하늘꿈교회가 아둘람 굴의 공동체와 같이 새 시대를 이끌며 세상을 치유하는 위로 자, 동역 자로 쓰임 받는 새 리더들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새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진정한 공동체로 지역과 한국과 세계에 영향력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 시 128:1~6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이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인도한다면 그것처럼 온전한 교육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이들이 자라는 가정은 정말 중요한 교육장이요 훈련장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가정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은 아이의 진실한 선생님입니다. 그러기에 어린이의 장래는 부모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품에서 성장하면서 가지게 되는 어린 시절의 사건들과 경험, 그리고 교훈들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것이며, 일생 동안 그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특히 어머니의 정신적인 유산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정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에게 주신 가정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유형은 하나님과의 관계 측면에서 볼 때 크게 3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모습. 둘째는 하나님 존재는 인정하지만, 아쉬울 때만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모습, 셋째는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려는 모습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대표적으로 구약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뢰의 삶입니다. 하나님만 믿는 믿음의 삶, 어떤 상황 어떤 명령에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삶으로서 이러한 믿음을 경외적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창22:3,5,7~8). 둘째는 기도의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만 기도하는 삶으로서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그의 기도는 경지에 이른 것으로서 그 기도를 가리켜 경외적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창22:4). 셋째는 예배의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만 제단 쌓는 삶으로서 어떤 예배를 요구하시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외적 예배의 삶입니다(창22:9). 넷째로 순종의 삶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대충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창22:10). 이렇게 내용을 살펴 볼 때 경외하는 삶은 어떤 삶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 형통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대로 내 삶 속에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바로 복된 자입니다(시128: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는 바로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눅11:28). 또한 말씀을 지키는 자는 먼저 그가 손으로 하는 일마다 수고한 대로 먹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사람들의 눈이 보일 때 그 생활이 힘이 드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에 언제든지 주어진 환경을 능히 이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요셉은 죄인으로 감옥 갇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요셉에게 감옥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루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형통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는 수고의 땀을 흘리는 대로 열매를 얻으며 그 가는 길이 형통한다고 하였습니다(수1:7~8).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말씀을 지키는 가정이 되어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형통한 삶의 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가정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는 자녀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녀들이 번성한다는 것입니다(시127). 본문에서 가정을 지키는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시128:3). 포도나무는 수분과 자양분을 제공하는 정말 가정마다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귀중한 나무입니다. 가정을 행복의 터전으로 만들고 잘 이끄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축복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을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 스스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가정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잠19:14). 또한 자식을 어린 감람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는 장성한 나무에서부터 새로운 가지를 내면서 활기차게 뻗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어린 감람나무는 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잘 성장하는 아이는 당연히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 결국에는 나라가 잘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기초는 나의 신앙이지만 그 신앙을 통해서 누리는 축복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시온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내가 잘 되는 것은 바로 내가 섬기는 교회가 잘 되는 것이며, 그 결과로 내가 사는 나라가 잘 되는 것입니다(시128:5). 나의 가족이 말씀대로 살아서 복을 받으면 결국 교회와 지역, 그리고 나라가 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가정이 대대로 평강의 복을 받으며 축복을 누리는 것은 내가 섬기는 교회와 내가 사는 나라가 대대로 평강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가는 가정에는 형통의 복을 주시므로 가정이 복을 누리며, 결국에는 교회와 나라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신앙으로 살았더니 복을 받고 산다는 증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효도하라” / 요 19:23~27
기독교의 효는 살아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는 아무리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고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생전에 효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 유교권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사후를 두려워하여 살아계실 때는 효도하지 못하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좋은 베옷을 입혀드리고, 좋은 자리를 맡아서 묻어 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야단을 떱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편히 모시고, 용돈을 드리며, 좋은 음식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한문의 孝(효)는 늙은 ‘노’ 자에 아들 ‘자’ 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 효도는 늙은 부모를 자식이 모시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대한 효도는 인간이 가지는 본연의 윤리이며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첫걸음입니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효를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딤전5:4, 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부모님에게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람을 보답하게 하라는 것이며, 특히 부모님과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악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효는 가르쳐야 합니다. 효가 되지 않으면 가정이나 교회나 학교가 결국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효가 살아야 가정이 편안합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자신도 잘 되는 것이고 장수하는 것입니다. 효는 가정과 삶의 기초 뿐 아니라 교육의 기초도 되는 것입니다. 효를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바로서고 교육이 바로서고 나라가 바로서서 잘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 효도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들도 당연히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효도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겠습니다.
▣ 첫째로, 환경과 형편을 초월하는 효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두 팔에 못이 박히고 두 발에 이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서 피가 흐르고 점점 그 고통은 심해만 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효도를 했는데 우리들은 무슨 이유를 대겠으며 무슨 핑계를 대겠습니까? 정말 효도할 수 없는 상황이 와도 우리들은 효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의 효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여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인내하셨듯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본받아 효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둘째로, 최후의 순간에도 잊지 않는 효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임종이 가까이 오고 기운이 쇠진하는 최후의 순간에도 어머니 마리아를 기억하시면서 효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효도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효도는 진정 자신이 편리하고 자신이 살만하고 할 때만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없고 힘들 때에도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최악의 상황 최후의 순간이 오더라도 효도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이의 격몽요결의 사친장 제5에 보면 자신에게 어떠한 순간이 오더라도 정말 나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이가 가르쳤던 살아있는 동안에 효도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로 주님의 효도관과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 셋째로, 끝까지 살펴드리는 효도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극도로 기진하고 괴로운 고통 중에서도 십자가 밑에서 마음에 큰 고통과 아픔을 참으면서 아들을 잃는 모친 마리아의 외로움과 고독을 살펴드리는 것을 봅니다. 효도는 끝까지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행하는 것입니다. 맹자의 세속에서 말하는 불효의 다섯 가지를 이야기 했고, 증자는 소학 제2권 명륜편에서 효도는 부모님께 효도하되 환경이나 지금의 나의 사정을 따지면서 효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끝까지 잘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을 여기까지 보살피고 나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살아오신 그런 부모님의 건강과 경제상황, 의복과 식사문제,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작은 부분이라도 자세히 살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나의 부모님은 외로움으로 고독함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문제나 고심은 없는지 살펴드리는 진실한 효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효도였습니다.
▣ 넷째로,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효도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순간에서도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그 제자 요한에게 ‘내 어머니를 네 어머니로 모시고 살라’고 부탁하고 계십니다(요19:26~27).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같이 오늘날에도 주님과 같이 부모님의 어려움과 문제를 최선을 다해 해결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모습에서 효도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따르는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서 그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 모시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자신이 어렵고 힘들어도 부모님을 물건 취급하여서 여기 저기 보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주님을 본받아서 늘 효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부모님에게 효도하여서 이 땅에서 잘 살고 장수하며 말씀에 있는 복을 다 받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 마11:11~19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선지자들 뿐 아니라 여자가 낳은 자들 중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와 천국을 외치며 회개하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며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메시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고 신들메 풀 자격도 없다고 겸손히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받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쇠해야 하며 그는 흥해야한다고 외치었습니다(요3:30). 당당하게 헤롯왕의 죄를 책망하여 감옥에 갇힌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요 날 때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세례요한보다 훨씬 못한 사람도 오직 예수 이름으로 그보다 더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세례요한 이후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세례요한 이후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복음을 증거 하시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속량의 근거로 하여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이래 구원의 복음은 유대의 벽을 넘어 모든 이방인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사망의 그늘 아래 죽음에 종노릇 하던 모든 사람들이 참 구원의 빛을 받고 줄지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도 요한의 때까지 율법으로 신앙을 판단하지만 그 후부터는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천국은 영적으로 힘 있는 자들, 강한 자들, 용기 있고 인내하며 결단력이 있는 자들에게 빼앗기고 점령되고 있습니다(막9:23, 마8:31). 우리는 천국과 교회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 변함없이 하나님께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섬기는 지금의 교회가 천국에서도 놀라운 일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지상에서 크고, 교회에서 큰 자가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가 바로 천국의 문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믿음대로 성취되는 곳입니다. 믿음 안에서 성령을 힘입어 봉사하십시오. 뿌리는 대로 거둘 것이며, 심는 대로 추수할 것입니다. 참으면 왕 노릇 할 것이요, 죽으면 다시 살 것입니다. 천국은 무엇이든 하나님께 부요하면 부요하게 거두는 곳입니다.
▣ 그러기에 믿음으로 기도를 쉬지 말고 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는 다윗은 기도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도할 때 응답하시며 나를 붙드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3:4~6). 기도할 때 우리들은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얻은 담대함으로 나로 매일 같이 새로운 아침을 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요일5:14~15, 애3:19~23). 천국은 결코 나약한 사람들이나 흔들리는 사람들 그리고 타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기도를 미루고, 약속을 불이행하고, 결심을 깨뜨리고, 증거를 주저함으로써는 결코 누리지 못합니다. 천국은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열렬하게 찾아야 할 가치요, 권세요 나라입니다. 천국을 상속하는 자에게는 성실한 인내와 피곤을 모르는 힘과 최선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얻을 확실한 핵심 가치라는 것입니다(눅12:32).
▣ 천국에서 상을 얻을 줄 믿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믿을 때도 있지만 주님 위해 충성하고 희생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빌3:13~14, 고후6:2). 그 때를 놓치지 말고 그 부름에 응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에 보면 에서는 그 때를 놓친 사람입니다(히12:14~17).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잘 분간하며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자기의 때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젊은 날을 다 허비하고 주께로 돌아오고, 어떤 사람은 물질을 다 허비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젊음과 물질을 주를 위하여 드리고 쌓아 둔 사람은 하늘 상급이 더 많습니다(마6:19~21). 여러분의 제일 큰 보배를 아낌없이 하나님 나라에 맡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 오늘도 천국은 계속해서 침노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속속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그 영원히 좋고 큰 아름다운 땅이 사람들에게 정복되고 있습니다. 마치 가나안 땅이 각 지파별로 점령되듯이 그렇게 분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오직 우리의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우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고후10:15).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가 갖춰야 할 다섯 가지 덕성을 군자오미라고 소개합니다. 부담스럽지 않는 배려, 명확한 임무의 선택과 지시, 탐욕스럽지 않는 욕심, 교만하지 않는 자유분방, 사납지 않는 위엄입니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고, 수고하되 원망하지 않고, 욕심을 갖되 탐하지 않고,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으며, 위세가 있되 사납지 않는 개인적 덕목을 갖추고 믿음의 전진을 하면서 천국을 침범하면서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만 생각하고 살아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던졌던 강한 사람이었으며, 자기의 전부를 바친 용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올해가 여러분에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꿈의 기족들이 천국 침공 작전에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 수1:1~9
신명기 34장은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가르는 전환점이 됩니다. 모세는 이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책임을 완수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 뒤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게 됩니다. 모세는 그의 시대를 가장 잘 담당한 선지자요 지도자였습니다(신34:10).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모세는 므리바 물 다툼의 사건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민20:8~13). 모세는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들어내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였는데 두 번씩이나 반석을 친 것입니다(민27:14, 신32:51). 둘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의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향하여 외치면 물을 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민20:10). 셋째는, 말을 조심하지 않은 이유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입술의 말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모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하여 망령되이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시106:32~33). 결국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임무가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수1:1).
▣ 사람은 누구나 그 시대의 쓰임에 쓰임 받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한 번의 실수로 그 위대한 모세도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말았음을 우리는 늘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 때를 담당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놓치면 다시금 일할 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때에 쓰임을 받았다고 해서 항상 쓰임을 받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잠16:4, 전3:11). 모세는 딱 한 번 함부로 말했다가 역사의 시간에서 퇴장명령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진정 온유하고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실패와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말씀에 기록해 놓아서 믿음의 후손들에게 자신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쓰실 사람을 보시고 계시다가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때가 되면 불러서 쓰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의 개인적인 영광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모세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조금도 변명하지 않고 사실대로 기록하면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시면서 그의 시체까지 거두어주셨습니다. 모세가 므리바 사건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못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와 긍휼의 손길을 결코 거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잠정적인 한 때를 사명을 다하면서 하나님께 멋지게 쓰임 받으면서 살다가 갔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새 시대의 새 일꾼을 또 다시 쓰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시대의 절대로 필요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시대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새 시대를 새 일꾼에게 맡기셨습니다(신34:9). 모세의 뒤를 이어서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말씀해주셨습니다(수1:1~4). 요단강 도하작전을 끝낸 여호수아는 눈앞에 여리고 성을 두고서 하나님이 주신 율례대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 축제를 지켰습니다(수5:4~5). 여호수아의 할례예식이나 유월절예식은 바로 하나님의 성민인 것을 확신시키는 일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백성임을 확인시키는 대를 잇는 행동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기를 마치매 그 곳 이름을 ‘수치가 굴러간다’는 뜻의 ‘길갈’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한 할례와 유월절예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과 성별을 받으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여리고의 많은 적군들을 눈앞에 두고 전쟁의 긴장과 공포 속에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 축제를 행하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는가를 보여주는 신앙 행동입니다. 그들은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워 이긴 것에 믿음으로 동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시대 은혜의 시대를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가나안 정복은 전쟁이 아니라 축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세상이란 전쟁터에서 영적전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다 이루어 놓으신 승리 속에 믿음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승리를 거저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확인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뿐입니다(요16:33).
▣ 오늘의 우리들도 분명한 것은 믿음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움에서 홀로 싸워서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에 믿음과 순종으로 동참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감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갈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대하17:15, 20:17). 여호수아에게는 바로 이러한 확신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먼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의 축제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바라는 것을 보지 않고도 벌써 증명을 가진 것입니다(히11:1~2). 그들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검토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다음 싸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투 전에 먼저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처럼 한 시대의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잠정적인 한 시대에 한두 가지 직분을 감당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네 때에, 내가 명한 곳에서, 네 작은 직분에 충성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신령한 여호수아의 시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기 전에 싸우기 전에 먼저 기도와 예배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모든 직임을 끝내고 부르심을 받은 모세와 같이 우리의 사명을 다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자신에게 맡겨준 직분을 최선을 다하여 이루고 달려갈 길을 마친 자들에게 주실 면류관을 바라보고 오늘도 열심을 다해 일을 하는 모든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앞으로 나갑시다” / 히 10:37~39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하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기도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신앙의 성장과 전진을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구원함을 받기 위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씀은 증거하고 계십니다(히10:38~39, 빌3:14, 딤전4:15). 영혼의 구원을 받은 우리는 주님과 같이 최후의 승리하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전진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늘은 신앙생활의 전진에 도움이 될 세 가지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믿음의 전진을 방해하는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기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있는데, 한번 나쁜 습관이 형성되면 그 습관이 나를 지배해 버립니다. 믿음의 조상 중 한 사람인 야곱을 보십시오. 약속의 땅을 향하여 돌아오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약속한 벧엘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에서를 핑계대면서 세겜 땅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야곱을 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혼내주기 위해서 하몰과 디나 사건을 일으켜 두려워 떨며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집 곧 ‘벧엘’로 돌아가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사는 동안 형성되었던 노예근성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문제를 만날 때마다 원망불평부터 늘어놓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년 광야 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삶의 습관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못함으로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는 모두 광야에서 죽고 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2세대들을 훈련시켜서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습관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좋지 못한 고집과 버릇 그리고 잘못된 교훈과 편견은 모두 다 냉정하게 떠나보낼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묵은 누룩인 좋지 못한 교훈의 풍조 나쁜 습관과 버릇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고전5:6~8). 우리의 좋지 못한 습관과 죄 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전투를 통해서 과거의 죄와 잘못된 습관을 과감하게 버리고 영적인 승리로 이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롬7:15, 22~25). 육신에 사는 동안 더럽고 악한 버릇과 습관은 우리를 언제나 공격하고 지배하려고 하지만,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강하게 의지하고 결심하고 애쓰면 성령의 능력으로 나쁜 습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믿음의 전진을 위한 신앙생활의 좋은 방법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선택의 열매는 자신이 거두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들입니다(고후5:17). 그러므로 새롭게 된 새 사람에게는 새 사람에 걸 맞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바울도 에베소서 4장 22~23절에서 새로운 심령이 살려면 새로운 생활양식 곧 의와 진리의 거룩한 습관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전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에 필요한 도구와 환경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기르시기 위하여 신학적으로는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고 성경적으로는 경건의 연습이라고 말하는 도구와 환경들을 준비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훈련 장소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교회에 경건한 예배가 있고, 정기적인 기도회, 진지한 성경공부, 거룩한 헌신, 순수한 봉사, 그리고 사랑의 교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분위기와 도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델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칼빈은 교회를 “신앙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의 분위기와 교회가 제공하는 은혜의 방편들, 경건의 훈련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신앙의 보금자리요 어머니의 역할을 해 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예배에 꼭 참석해야 합니다. 정기적인 기도의 시간과 성경 읽는 시간을 작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편히 쉼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와 짐을 메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11:28~30).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본을 보이신 멍에와 짐인 예배와 기도, 헌신과 봉사 없이 우리의 새 생명은 풍성한 삶을 거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신 짐과 멍에는 절대로 무겁지 않는 것입니다.
▣ 믿음의 전진을 위해서는 신앙의 성장 속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성장하고 또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히5:11~14). 우리들은 신앙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엡4:13).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과거집착주의로서 과거에 집착하여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냉소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신앙에 대한 회의에 빠져서 허덕이는 신앙적인 회의주의입니다. 오늘 아침 성령의 간절한 부름을 느끼고 세미한 주의 음성이 들리는 성도는 성장하는 신앙인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 주의 말씀에 갈증을 느끼고 주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그 사람은 지금 성장하고 있는 성도입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오늘 주님의 명령이 무엇인가?’ 그 말씀을 따라 움직이십시오.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서 뒤를 돌아보고 괴로워하지 말고 앞만 보고 좇아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조용하게 헌신하고 말없이 봉사하며 헌금하고 기도하는 성도를 통하여 교회가 유지되고 성장되고 초신자의 울타리가 되고 환란자의 위로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은 일하는 데서 옵니다. 능력이 와야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일을 행할 때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더욱 주님의 일에 힘쓰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준비된 하나님의 축복을 보게 됩니다. 마침내 신앙의 큰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은 6개월이 여러분에게 생애 최고의 해가 되시고, 우리 교회에 진정한 부흥과 축복의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 엡 5:15~18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목숨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과 마귀와 죄와 싸워서 이기도록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여러 차례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을 자가 받을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요4:13~14, 7:37~38).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미 예언되어 있는 말씀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사12:3, 겔47:5,8,9,12).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요한복음 7장39절에서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에 대하여 요한복음 14장 16~18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혜사’를 알아야 하는데, 보혜사는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이십니다(요일2:1, 요14:26).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다가 다시 사명을 다 마치시고 아버지에게로 가야 하신다고 말씀합니다(요16:5~7).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며, 예수님 것을 가지고 영광을 나타내시며,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우게 함으로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게 하십니다(요14:26).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가운데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요16:13~14).
▣ 그러므로 성령님은...!
보혜사 성령님은 영, 육간에 목말라 있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와주시며, 뱃속에서 생수의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 같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주의 생명과 능력과 기쁨이 교회 가운데 넘쳐흐르게 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죄, 중생, 의로움, 성화와 함께 또 하나의 충만한 복음, 성령 충만의 복음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성령 충만의 복음이 어떻게 실제 합니까?
오순절 날 충만히 강림하신 성령님은 불과 바람처럼 세차게 역사하심으로 제자들은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게 했습니다. 이때에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의 복음을 증거하였으며(행2:38), 성령 충만의 복음은 이방인 고넬료를 비롯하여 에베소에 이르러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 일행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과 성령세례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안수할 때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행19:1~7). 에베소 교회의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의 세례만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주 예수님의 세례는 곧 성령님의 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을 당시 이방 도시였던 에베소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성령 충만의 세례는 원칙적으로 예수 믿을 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선물로 받아서 곧장 능력과 지혜와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로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후일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령 충만의 체험이 보편화된 교회들에게 성령의 충만 속에 거해야 한다고 편지하였습니다(엡5:18~21). 바울이 안수함으로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도 이 성령 충만의 약속을 믿고 기도함으로 곧장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 충만의 오순절을 지내야만 정상적인 신앙생활, 새 생명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임하시고 내 마음에 왕좌에 앉으시면, 그분을 인격적으로 환영하고 모셔 들이면, 그분이 내 영혼과 마음과 생활을 온전히 지배하심으로 그분의 빛과 영광과 사랑이 내 마음과 생활을 찬연히 빛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에게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면 나타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위로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로서 우리를 돕기 위하여 부름을 받아 우리 곁에 계신 분인데 그 가장 분명한 뜻은 안위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보증자, 계시자, 인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되시지만 또한 우리 상한 영혼, 목마른 영혼, 부족한 영혼, 연약한 영혼의 따뜻한 위로자가 되십니다. 분노와 상처가 치료됩니다. 심령은 은혜로 강건하게 됩니다. 내 영혼에 위로가 충만할 때 우리는 주님께 받는 위로로써 환난 가운데 있는 자를 능히 위로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권능을 가지신 성령님께서 우리 영혼을 사냥꾼의 올무에서 건져내시고 생수로 축여주시면 그 위로 때문에 슬픔과 허전함이 극복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모든 문제에 대해 어느 때든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으며, 감사와 찬양과 기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님의 열매가 나타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께서 성도의 인격과 삶을 통치하실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거스려 이기었을 때 생기는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온전히 소유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할 때 우리 안에는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합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임재한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계시면 성령님의 베푸시는 은혜의 체험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실 때까지 영적 목마름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계속적으로 성령 충만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며 신앙으로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으로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삶은 우리 모두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 은혜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이 충만한 은혜는 우리의 100%의 최선과 성령님의 100%의 은혜가 만났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200%의 하모니입니다. 우리교회는 지식과 이론의 나무만 키울 것이 아니라 하늘의 창을 열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에베소에 임한 성령 충만한 역사인 오순절을 계승해 나가는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으로 불황을 이겨냅시다” / 눅 5:1~11
세계 경제의 어려움과 유럽의 경제 상황의 악화 등 세계 도처에서 불경기의 조짐 때문에 우리 모두 걱정이 많을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역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성공의 전설로 알려져 있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나는 하나님이 주신 3가지 역경 덕분에 성공했다"고 했습니다.("가난"의 역경-구두닦이, 신문팔이를 하면서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경험을 쌓았다. "허약"의 역경-태어날 때부터 약골이라 항상 운동에 힘썼기에 늙어서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다. "배움"의 역경-초등학교도 못 다녔기에 열심히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신앙생활의 초기에 흉년을 만났습니다. 예배도 그치고, 기도도 슬슬 그치다가 결국에는 자기 살자고 애굽으로 피난을 갔을 때, 자기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는 비겁한 행동을 하다가 낭패를 당할 뻔 하였습니다. 흉년과 불경기는 이같이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위기상황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도 떨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지금도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싸우지도 못하고 져서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을 원망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신앙인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살던 어부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이 불황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경기 가운데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통하고 문제가 없을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빈 배에서 아무 소득이 없어 씁쓸해 할 때, 밤새 일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어 허탈해 할 때, 빈 배에서 탄식하며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불황을 이길 수 있을까 해답을 찾기 바랍니다.
▣ 우리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당한 불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을 보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불황으로 인해서 생긴 빈 배에 올라 불황의 늪에 빠진 우리 사업과 직장과 가정과 취업 전선에 함께하시는 것입니다(엡4:6, 시29:10, 50:15, 107:20, 마28:20, 요14:16).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면한 불황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의 기근으로 인한 불황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들과 함께 이제 남아 있는 밀가루로 떡을 한 번 빚어서 먹고 죽으려는 여인에게 엘리야를 보내셔서 구원시키셨습니다. 왜 수 많은 과부 중에 사르밧 과부에게 보냈을까요? 그녀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눅4:25~26). 사르밧 과부는 어떤 불황가운데서도 자신의 것을 믿음으로 결단하고 드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보냄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경제적인 흉년이 왔을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 교훈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교훈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보면 첫째, 시험이 시작될 때가 있으면 끝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기간 동안 주님이 시험 당하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 당할 즈음에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신다는 것입니다(고전10:23). 넷째, 시험이 성취할 목적을 다 이룬 다음에는 반드시 시험을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되는 것을 체험한 후에 우리들은 하나님께 바칠 것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내 소용으로 쓰는 것 사이에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전부를 엘리야에게 바친 과부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날름 받아 잡수신 엘리야는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생의 문제는 사실 자녀문제, 건강문제, 경제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에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그 관계 설정을 제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 년 육 개월 간 불황 가운데서 그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할 때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께 바치는 신앙을 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불황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남은 것 가운데 먼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즉,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설정이 된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는다고 약속했습니다(시34:9~10). 경제적인 불황은 여러분의 신앙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한 방법이십니다. 야곱은 빈 털털이로 경제적 난관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 앞에서 십일조를 서원했습니다(창28:20~22).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씨앗으로 삼고 그 같은 행위를 믿음으로 보시고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축복하는 계기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십일조로, 헌금과 기도와 봉사로 여러분들의 믿음의 실상을 보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믿음의 실상 위에 축복과 기적을 넘치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세계, 신앙의 세계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시몬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순종함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말씀의 세계, 순종의 세계는 너무도 깊고 큰 세계이기 때문에 불가능도 없고 부족도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영광으로 말미암은 모든 부유와 풍성이 항상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불황은 어느 나라나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황을 이기려면 말씀과 같이 3가지의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불황 가운데도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불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먼저 바치는 참 신앙의 순종을 믿음으로 보여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세계, 신앙의 세계는 결코 불황이 없음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못할 것이 없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 우리들의 예수님이십니다(막9:23, 빌4:19, 마6:31~34). 세상은 불황가운데 힘들어 한다고 하여도 우리 하늘꿈의 성도들은 믿음을 가지고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베드로같이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이겨내셔서 풍성한 채워지는 축복을 받으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바울을 참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