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7
1월1일[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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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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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63GH65iCA (조정래 시몬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8055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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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방황하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 늘 함께 동반하시고, 우리 곁을 지켜주시는 성모님!>
아기 예수님의 복된 성탄 팔부 축제 기간 중에 갑작스레 어머니와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린 대축제 기간이라 직천당하셨을 것이라는 덕담에 큰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워낙 황급히 떠나시는 바람에 미처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해 황망하고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이젠 고인이 되신 어머니께서 희미하게나마 당신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살짝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주시더군요.
장례 절차가 다 끝나고 마지막 가시는 길 화장장 가족 대기실에 홀로 앉아있는데...어머니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애야! 그동안 나 때문에 애썼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이제 또 다른 어머니께서 네 엄마가 되어주실 것이란다.”
돈보스코께서도 엄마 잃고 슬퍼 울부짖으며 오라토리오에 살러 들어온 가엾은 아이들을 볼 때 마다, 당신의 크고 따뜻한 가슴에 그들을 꼭 끌어안아 주시며 똑같은 말씀을 되풀이했습니다.
“애야!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저기 저분 보이지? 앞으로 저분,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네 어머니가 되어주실 것이란다. 그러니 앞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만사 제쳐놓고 성모님께 매달리거라.”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제 나이를 만만치 않게 먹은 저도 어머니를 여윈 슬픔이 이토록 큰데, 부모를 일찍 여윈 열두 서너 살 아이들, 열여덟 열 아홉 청소년들의 마음은 얼마나 더 찢어질 것인가 하는 생각을 오늘따라 많이 했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사람들 앞에서는 그럭저럭 통제가 되더니, 모든 예식이 끝나고 홀로 남으니 갑작스레 큰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더군요. 주체할 수 없는 폭풍 눈물을 닦느라 혼났습니다.
엄마를 일찍 여의고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큰 구멍이 나 있는 분들, 그 큰 구멍으로 불어오는 삭풍에 언제나 마음이 시리고 휑한 분들, 오늘 천주의 모친인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현존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방황하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 늘 함께 동반하시고, 우리 곁을 지켜주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극심한 고통과 상처에 힘겨워할 때, 외로움과 절망감에 허덕일 때,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오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성모님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힘겹게 살아오신 한해였습니다. 잘 견뎌내시고 극복하셔서 오늘 이렇게 또다시 한해와 작별하고, 또 다른 한해를 맞이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새로운 한 해를 축복하시고 필요한 은총 베풀어주시며,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힘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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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HFuwCFky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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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고 그만큼 큰 은혜의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그 은혜의 선물이란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다니, 이 얼마나 벅찬 기쁨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할 일인데 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니,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새해의 첫날부터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교의는 네스토리우스 주교가 성모님은 그저 인간 예수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해야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라 하느냐는 주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단죄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해도 되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해서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의 불과 나무처럼,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숯불은 나무와 불이 서로 다른 두 본성이지만 결국 하나입니다. 숯불은 숯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그저 선악과 따 먹으면 벌을 줄 그런 분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부모의 지위까지 올려주실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앞에서 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담과 하와의 불신의 죄를 그대로 짓는 것입니다. 밀가루까지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신성은 우리 인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진심이 될 수 없습니다.
천연두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터 자국을 가친 채 도시로 이사 온 그레이스는 친구들에게 ‘괴물’이란 놀림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상처받아 울고 있는 그레이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적에 천연두라는 큰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단다. 그 병은 네 오빠와 동생의 생명을 빼앗아 갔지. 이웃의 많은 아이도 죽었단다. 하지만 하느님이 너만은 살려주셨단다. 네 얼굴에 생긴 상처는 하느님께서 네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표징이란다.”
그레이스는 엄마의 말을 믿었고 누구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였고 잘생긴 남학생과 결혼하여 미국 하원의원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가 어머니를 공경하고 기념하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나는 괴물이야!’라고 자기 비하를 하는 것일까요? 어머니의 말을 믿고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고 하느님은 될 수 없다고 믿으며 같은 인간으로서 하느님 어머니의 지위까지 올라가신 성모님을 공경한다면 말이 될까요? 성모님은 지금 인간이 어떤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머니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아수라’란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인육까지 먹는 사람이 생길 정도의 기근이 들었을 당시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습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살리려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길에 쓰러진 사람의 고기까지 먹습니다. 아기도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으며 자랍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아이 눈에는 모든 사람이 고기로 보입니다. 그래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이때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스님과 한 여인입니다. 스님은 제발 인간이 되라며 자기 팔을 잘라줍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에 아수라는 인육을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구해준 여인이 굶어 죽어가자 말을 죽여 고기를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고기가 인육인 줄 알고 죽기까지 먹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수라는 굶어 죽으면서도 동물의 수준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는 여인과 자기가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팔까지 자른 스님에 의해서 이제 타인을 구제하는 스님이 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셨습니다. 모기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면 아수라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한 공경이었듯이 우리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인간이기를 포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품은 여인이요, 하느님을 낳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공경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기를 믿으신 분 앞에서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으로 공경한다고 하는 거짓 기도를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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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23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새로운 한 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모두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은 계묘년 토끼띠의 해입니다. 저는 토끼띠이고 생일은 5월 16일입니다. 토끼가 좋아하는 풀이 자라나는 때에 태어나서인지 크게 부족함은 모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형제들과는 원만하게 지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부모님께서는 신앙을 물려 주셨습니다. 어려서 토끼에 대해서 들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토끼는 잘 뛰는 동물이고, 거북이는 느린 동물입니다. 잘 아는 것처럼 잘 뛰는 토끼는 한참을 먼저 가서 느긋하게 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느린 거북이는 쉬지 않고 걸어서 토끼보다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습니다. 새해에는 능력이 있다고 먼저 가기 보다는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쉬는 교우가 있다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긴 이웃이 있다면 깨워서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면 좋겠습니다. 저도 토끼처럼 자만하지 않고, 주어진 일이 있다면 충실하게 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겠습니다.
토끼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겁 많은 토끼’입니다. 어느 날 토끼가 낮잠을 자는데 나무 위에서 도토리가 떨어졌습니다. 겁이 많은 토끼는 지진이 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물어보니 지진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동물들도 모두 토끼를 따라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왜들 그렇게 뛰어가는지 물었습니다. 토끼는 지진이 났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그럼 그 장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도토리 하나가 떨어져있었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태산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거짓이라는 도토리에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도토리에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아니야 내가 그리스도다!’라며 나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동요하지 마라.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새해에는 부화뇌동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별주부전’입니다. 용궁으로 갔던 토끼이야기입니다. 바다에 사는 용왕이 병이 들었습니다. 토끼의 간을 먹으면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북이는 육지로 와서 토끼를 감언이설로 속여서 용궁으로 데려갑니다. 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토끼는 기지를 발휘하여 간을 집에 놓고 왔다고 합니다. 결국 거북이는 토끼를 육지로 데려다 주었고 토끼는 도망을 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유혹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한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사탄들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술과 도박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재물과 권력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큰 방법은 ‘다음에 하지’라는 생각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새해에는 뒤로 미루기보다는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지능지수로 보는 산토끼의 반대말은 알아보겠습니다. (지능지수 30의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 끼토산, 지능지수 5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집토끼, 지능지수 8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죽은 토끼, 지능지수 10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바다토끼, 지능지수 12의 산토끼의 반대말은 판토끼, 지능지수 150의 산토끼의 반대말은 알칼리 토끼) 새해에는 우리의 신앙도 성숙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길가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자갈밭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가시밭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기름진 밭에 떨어져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 있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2023년 새해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2023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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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6-21: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며,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68년부터 이날을 세계 평화의날로 제정하셨다. 마리아께서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 주시면서 새해의 모든 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목자들이 천사가 그들에게 알려준(루카 2,11) 구세주를 찾아가는 장면이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목자들의 관심은 오직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있다. 그들이 찾고 있던 것도 아기였고, 그들이 본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도 그 아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아기에 대해 말하면서 그 옆에 있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19절) 간직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목자들이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기쁨이 퍼져나가도록 하지만, 마리아는 그 일에 담겨있는 보다 깊은 의미와 주님의 가르침들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리아의 모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아들의 신비에 언제나 보다 철저히 참여하고자 하는 사랑에 불타는 모성이다. 그 모성은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까지 동화하는 그런 모성이다. 이런 내용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21절). 할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 계약의 징표였다.(창세 17,11) 남자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예수께는 구원업적인 수난의 전표이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십자가의 죽음에 처할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 때문에 마리아의 모성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더욱 풍요롭다.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피로써 생겨난 자기의 자녀들(요한 19,26)로 받아들인다. 마리아는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는 모습을 우리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과 율법을 대립시키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갈라타서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주신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극하여 악의 힘에 억눌렸던 우리를 속량하시어(참조: 갈라 4,5), 당신 자신의 신적인 자녀 관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5). 이 자녀는 법적인 권리를 얻는 것보다도 우리의 존재 자체를 다시 나게 하는 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로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7)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기 위해 마리아가 필요하셨다는 것이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갈라 4,4-5). 때가 찼을 때, 즉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려는 때,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율법의 속박을 없애기 위해 율법의 지배하에 태어나신 것처럼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 여자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갖는 우리의 하느님의 자녀 관계도 어느 정도 마리아의 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의 구세사 안에서의 역할을 볼 때, 마리아가 어떻게 평화의 주인(이사 9,5)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해의 평화에 대한 표징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평화는 바로 자녀들-형제들의 관계를 생기게 하는 모성이라는 표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녀-형제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용서하고, 섬길 수 있게 된다. 결국 평화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선물이며, 그 모성을 통하여 생명의 신성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공격은 모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태중에 잉태된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또한 젊은이들을 그릇된 길로 몰아가는 사회적 폭력의 원인이란, 바로 폭력을 쓰는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모성적 사랑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 즉 그 사랑의 결핍으로 모든 것을 헛되이 여기고 누구에게나 반항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평화의 상징이며, 마리아의 모성을 펼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평화의 창출자이시다. 이 평화는 나약함이나 겁 많고 비겁한 이들의 무감각과 혼동되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51-52)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민수기의 대사제가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이유를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제 이 축복이 마리아의 미소와 함께,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한 해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새해를 봉헌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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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베들레헴은 유다의 작은 고을로 다윗 임금의 고향으로 언급되었으며(1사무 17,12 참조), 메시아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리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성취하시면서 바로 이 고을에서 태어나십니다. 아기 예수님을 찾아낸 목자들은 천사가 전한 말씀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탄생의 목격 증인입니다. 한편 요셉과 마리아는 유다교의 율법에 따라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들과 베들레헴은 모두 다윗 임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었던 다윗은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임금의 자리에 오릅니다. 히브리 말로 ‘기름부음받은이’라는 뜻을 가지는 메시아는 이후에 구원자를 의미하게 되고, 그 말을 그리스 말로 옮기면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구약 성경의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것과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이름을 기억하게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며 새로운 구원의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과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음에 품고 줄곧 생각하며 묵상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이미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때부터 마음으로 그분의 길에 함께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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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나약함’ 안에 깃들어 있는 신비>
오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교회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신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하며 경축하고 있습니다. 이 축일의 성서적인 증언은 성모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 성녀의 기쁨에 찬 외침인 “내 주님(κριο)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에서 비롯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오 1,18.23ㄱ)라는 말씀에서 분명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일관되게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강생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신 나자렛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심은 성령의 위대한 업적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위격적인 특징은 ‘하느님의 자기 비우심(케노시스)입니다. (이브 콩가르 신학자)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온전히 인성을 취하시어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간성이 지닌 온갖 허약함, 나약함이 하느님의 신적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전능(全能)함은 자신의 전무(全無)까지도 허용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존재입니다. 이제야 밝혀진 새로움은 인간의 나약함 또한 하느님의 모상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위대함은 이 ‘나약함’이 타인과 외부 세계와 더 나아가서 하느님에게도 개방되어 서로 간의 관계성 안에서 자신을 풍요로움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위대함은 나약한 존재로서 자신의 허약한 전 존재를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하여 하느님의 신성 안에 참여하심에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 안에서 인간이 자유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하느님의 신비에 내어 맡길 때 인간의 나약함이 위대함으로, 하느님의 신적 생명의 온갖 충만함으로 도약하고 비상할 수 있습니다! 한 나약한 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기까지….
여기에서 인간의 나약성의 특징인 죄스러움(罪性) 또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구원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서 5,20)
2023년 새해에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부족함과 온갖 허물까지도 인간의 고귀함과 품격으로 받아들이고 힘차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웃 형제들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따뜻한 긍정과 사랑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는 마음과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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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인구 스테파노 신부님]
어릴 적, 꽤 오랜 시간 엄마가 집을 비울 때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란다 창을 다 닫아걸어도 창문 흔들리는 소리가 꽤나 요란한 밤.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형아~ 무섭다~” 동생의 칭얼거림에 애써 담담한 척... “무섭긴 뭐가 무섭노 ~ 형아가 안 무섭게 해 줄게.”라고 허세를 부리고는 텔레비전 소리를 높이고, 온 집에 불이란 불은 다 켜놓으며 무서운 내 마음을 다스리지만, 텔레비전 소리도 온 집에 켜놓은 불빛도 두려움을 없애주진 못했지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요란한 창문 소리와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를 뚫고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날쌘 동생이 후다닥 뛰어나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묻습니다. “누구세요?” 그러자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응, 엄마~”
“응, 엄마~” 이 가녀린 여성의 한 마디는 창문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조차 아무것도 아니게 만듭니다. 이 가녀린 여성의 한 마디는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로도, 온 집안을 밝힌 불빛으로도 없애지 못했던 두려움을 온전히 사그라들게 만듭니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그런 존재지요.
왜 아이들은 “응, 엄마~” 이 한 마디에 모든 두려움을 잊을까요? 엄마가 있으나 없으나 ‘요란한 밤’이라는 상황은 그대로인데도, 왜 엄마가 있으면 괜찮아지는 걸까요?
‘엄마와 아이들 간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 그 존재가 지금 내 곁에 있기에, 상황은 그대로지만, 그대로가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는 겁니다.
‘엄마’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가 거센 바람이 부냐 고요하냐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니, 그것이 채워지면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대축일인 오늘, ‘관계성’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생각해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 내가 아버지의 뜻을 살아낸다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가?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도, 언제나 그랬듯 ‘요란한 밤’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르려 애쓴다면, 우리 영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닫힌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서서“딩동~ 응, 엄마~”라고 해주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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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종현 도미니코 사비오 신부님]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 되기를 ...>
오늘은 새로운 해의 시작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사람이신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성모)라는 호칭이 가능한 것은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사람이시며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마리아는 사람의 어머니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적인 것이 신적인 것이 되고, 지상의 것이 천상의 것이 됩니다.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관련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채움으로써 마침내 우리를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그 첫 번째 수혜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다음 수혜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제, 자매 또는 예수님의 벗이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형제, 자매, 벗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감히 청할 수조차 없는 것을 얻는 것입니다.
새로운 한 해가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거룩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덧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우리의 삶 전체가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보내는 모든 순간을 우리는 잊어버릴지라도 하느님은 영원히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은 사람의 어머니이시며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삶과 존재,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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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해 첫날 새로운 우리>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갈라티아 4,4-7 (종살이에서 자유로)
형제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루카 2,16-21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할례와 작명)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새해 첫날 새로운 우리>
새로운 나
새로운 너
새로운 우리가
정의와 평화와 자유와
자비와 살림의
하느님께서
몸소 활짝 열어주시는
새해 첫날을 맞습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빼앗고
누군가는 빼앗길지언정
빼앗김도 빼앗음도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러
정의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억누르고
누군가는 억눌릴지언정
억눌림도 억누름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러
평화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얽매고
누군가는 얽매일지언정
얽매임도 얽맴도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이루러
자유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버려질지언정
버려짐도 버림도 없는
자비로운 세상을 이루러
자비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죽이고
누군가는 죽임 당할지언정
죽임 당함도 죽임도 없는
살리는 세상을 이루러
살림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바로 오늘
하느님의 축복인
새해 첫날에
정의로운 나 너 우리가
평화로운 나 너 우리가
자유로운 나 너 우리가
자비로운 나 너 우리가
살리는 나 너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
온 누리 모든 이에게
곱게 스밀 수 있기를
바래고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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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장 큰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새해에 복 많이 지으시고,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고 적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니, 따르는 자체가 복입니다. 복은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화려함이 아니라 내면의 충만함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길이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목자들이 구유에 누운 아기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은 놀라워합니다.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감당하는 분이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삶의 여정에 주어지는 모든 일에 곰곰이 되새기며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발아래 굳건히 자리를 함께하며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우리도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그런 의미에서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끝까지 흔들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성모님께 청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하십니다.”
시편 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놓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활용하지도 않으면서 남과 비교하고, 남의 탓을 하는 가운데 받은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는 세속적인 복을 찾으려 헤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중에 가장 큰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와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2023년의 사목중심을 “더 큰 사랑으로!” 정하였습니다.
1. 기쁨 전하기 2. 봉사하기 3. 일치하기
더 큰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신앙의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을 위해 희생 봉사해야 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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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53년 미국 예일대는 졸업생들에게 장차 이루고 싶은 꿈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만이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써서 제출했다고 합니다. 97%는 그저 생각만 하고 있거나 생각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했더니, 놀랍게도 3%의 졸업생이 나머지 97%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1979년에 하버드대에서도 똑같은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같았습니다. 3%가 나머지 97%보다 무려 10배나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큽니다. 실제로 심리학에 ‘자기실현적 예언 효과’라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발언하면 거기에 맞춰 자신의 태도를 변경하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은 씨가 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표를 세우고 이를 말로써 계속 밝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목표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목표 자체를 세우지 않아서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면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2023년 1월 1일. 계묘년이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목표를 세웁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뚜렷한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목표, 헛된 목표, 남과 비교하는 남의 목표만을 세워서 자기만의 뚜렷한 목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성모님의 모습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성모님의 목표 역시 아들의 목표인 인간 구원에 동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 후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이렇게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섣부른 판단보다는 늘 곰곰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과연 어떤가요? 자기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주님과 함께 할 것인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목표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목표를 곰곰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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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새해가 아니라 새 시대를 여는>
“하느님, 온갖 좋은 일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니 저희가 즐거운 마음으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새 시대를 열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그 은총의 완성을 기뻐하게 하소서.”
오늘 축일의 이 예물 기도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잘 담고 있습니다. 전부터 새해 첫날을 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의문의 한 실마리가 풀린 것도 같아 기쁘기도 합니다.
세상이 세상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음을 기념할 때 우리는 교회 달력으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기념하자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새해가 아니라 새 시대이어야 하고, 우리에게는 새해가 열리는 정도를 넘어 새 시대가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해가 열리는 것의 의미는 잘 알겠는데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성탄 신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느님이신 분이 이 세상에 탄생하심으로 인간인 우리가 신화하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연결 고리가 되시고, 그 중심에 계시는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십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심으로써 당신은 천주의 어머니가 되시고 당신의 아드님처럼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신 겁니다.
이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연결하면 하느님이신 분이 성모의 아들이 되시고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종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시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는 종일 뿐 자녀가 아니었으며, 하느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고 당연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상속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는 옛날에 정실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종에게서 태어난 서자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종의 자식으로 아무런 상속을 받지 못하던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런데 이 새 시대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고작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가 아니라 새 시대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냐는 말입니다.
작년에 못 이룬 또는 작년에 실패한 것을 올해는 이루고, 지금까지 하지 않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올해 시작하는 그런 정도를 넘어 죄의 종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는데 새해를 맞아 이 새 시대의 삶을 본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민수기의 말씀처럼 자신이 복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복이 되는 사람, 악마의 자식처럼 입에서 저주나 욕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늘 축복을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 저와 저의 <여기 선교 협동조합>에 베풀어주신 여러분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새 시대를 열고 살아가는 한해가 되시고, 주님의 복 많이 받으시고, 받으신 복을 이웃과 많이 나누는 새해가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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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 받은 인생>
-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
오늘 2023년 1월 1일 새해 첫날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제56차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새해 첫날부터 하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는 날입니다. 저절로, “평화의 모후여, 감염병과 전쟁, 기후위기로 고통받는 이 땅을 위해 평화를 빌어주소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어머니께 전구를 청하게 됩니다. 정순택 천주교 서울 대교구장 2023년 새해 메시지 다음 성구도 절실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평화의 축복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평화의 사람이 되기 위해 모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겹고 은혜로웠는지요! 해마다 부를 때마다 감동합니다. 오늘 하루종일 화살기도 노래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어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저에게는 지난 2022년 한 해도 크나큰 축복의 해였습니다. 오늘도 밤12:30분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듯이, 지난 한 해 역시 이런저런 사유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서든 1년 365일 매일 밤 1시 전후로 일어나 그날 강론을 한결같이 써올려 나눴다는 것은 무엇보다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2023년 올해는 물론 남은 생애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매일 강론에 산책시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 매일미사를 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도 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온통 향년 95세로 돌아가신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선종에 즈음하여 교회 각층 지도자들의 찬사 말씀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축제와도 같은 죽음이란 느낌과 더불어 새해 교회에 주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축복의 죽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네딕도 교황님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찬사를 소개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바로 베네딕도 교황님의 열쇠말이셨다.”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휘하에 계실 때는 신앙의 수호자”
“포도밭의 겸손한 일꾼”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회를 말씀하신 분”
“교회내의 참 주요한 인물”
“부드러운 아버지의 모습”
“신사이자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도”
“슬픔과 더불어 감사를 드린다.”
“충실한 종”
“친절한 교황”
“위대한 교황”
“교회를 섬기는데 최고의 하느님의 사람”
“그분의 교황직 사임은 거룩하고 겸손한 행위”
“박물관의 조각이 아닌 하나의 관례(institution)인 분”
“평생 예수님의 얼굴을 찾은 분”
정말 고전적인 분이자 교회의 사람, 성인이신 교황님이셨습니다. 새해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축복의 죽음 선물이란 믿음입니다. 오늘 새해 첫날은 출력한 수십쪽의 교황님에 대한 기사를 읽을 계획입니다.
살만한 인생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축복의 선물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지들에게 가장 많이 선물하는 것은 수도원 십자로에 있는 예수 성심상 사진과 더불어 보내는 문자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 예수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정말 축복기도 바치는 마음으로 드리는 축복인사입니다. 축복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즐거워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축복주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하느님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탄의 축복이 참 고맙고 기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 성모님을 찾았던 목자들이 받은 축복을 전해 줍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하느님 축복에 대한 참 좋은 응답이 하느님 찬양과 찬미입니다. 정순택 대주교님의 성탄 새해 축복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나타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이제는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지극히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유한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더러운 마구간에 오시니, 누추한 곳이 거룩한 곳으로 변하였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강생의 신비와 기쁨을 함께 나누며 은총 충만한 새해 맞으시길 기도합니다.”
새해를 맞이한 성탄 축복이 얼마나 큰지요! 작년 12월28일은 교회학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의 서거 400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이날 교황님은 수요일 알현 강론에서 성탄 축복에 관한 일련의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자신의 영광을 내려 놓으시고 자신을 한없이 겸손하게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처럼 소유적이 아니고 이기적 사랑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순수한 선물이자 순수한 은총이다. 그것은 모두가 우리를 위한, 우리의 선익을 위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구유엔 누운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소유의 완전한 포기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거친 구유의 침대는 부드러움과 거침, 사랑과 슬픔, 감미로움과 조잡함을 연결한다. 크리스마스는 단순함과 검소함안에서 기쁨의 축제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고,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직 우리의 선을 원하기 때문이다.”
둘째, 탄생하신 성자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 성모님의 축복에 이어 성령의 축복입니다. 제2독서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의 축복이 하느님 자녀로서의 축복입니다.
“진정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이, 무지의 종이, 죄악의 종이, 탐욕의 종이, 율법의 종이 아니라,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성령의 사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게 하시니 도대체 이 축복보다 큰 축복이 어디있겠는지요! 정말 종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주신 축복을 저는 천주교 사제로써 계속되는 성탄 축제중 맞이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세계 평화의 날 새해 첫날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께 새해 축복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매일의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복덩어리,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축복 선물을 가득 받으시고 새해에는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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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2,19)
<다시 출발하자!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 첫 날인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새해 첫 주일'이자, '제56차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루카2,16-21)은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는 말씀'과 '예수님의 할례와 작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민수6,22-27)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즐겨 썼던 '아론의 축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아론의 축복이 복음묵상글 안에서 만나는 모든 형제자매들과 그 가정에 내려지기를 빌면서 이 축복으로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주시리라."(6,24-26)
오늘은 '제56차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무도 혼자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19에서 벗어나 평화의 길로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다시 출발하기.' 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통해서,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우크라이나 전쟁 바이러스'를 물리치고, 함께 평화의 길로 나아가자고 권고하시면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우리는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교황은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시면서, 코로나 19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 더 나아가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나만, 우리만, 우리나라만' 이라는 개인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 끝은 '공멸'(共滅)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관심 사랑 안에서 평화의 길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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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0peVxgAI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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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신
분이십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의 일이
펼쳐집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이 여정을 기쁘게
걸어가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낳으시고 기르십니다.
사랑의 신비이며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의 이여정은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끝까지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말씀을 믿으셨기에
십자가 곁에서도
꿋꿋하게 계실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의 말씀은
마리아를
순종의 여인이
되게 하며 드디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한 해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가는
가장 행복한 새해이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말씀을 받아들인
마리아에게
탄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한 여인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영광스러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으셨기에 정녕
복되신 믿음의
어머니십니다.
교회는 그 길을
따라갑니다.
새 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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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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