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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3
#벨기에신앙고백서 18.#성육신 (2)
And he not only assumed human nature as far as the body is concerned but also a real human soul, in order that he might be a real human being. For since the soul had been lost as well as the body he had to assume them both to save them both together.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육신에 한해서만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영혼도 같이 취하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실제 인간이 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영혼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육신과 더불어 거룩함이 상실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모두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 본성의 두 요소인 영혼과 육체를 모두 취하셔야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영혼유전론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교묘하게 왜곡하고 억지를 쓰면 영혼창조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직관적이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다. 만약에 이 고백이 영혼창조론에 입각한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영혼을 취하셨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영혼을 부여하셨다라고 명시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육 원리는 영혼창조가 아니라 영혼유전이 옳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두 요소인 영혼과 육체가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존재해오셨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혼창조는 물론이거니와 영혼유전에도 해당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인성의 공로가 효력이 있는 이유는, 그분의 영원하신 인성이 바로 모든 사람의 원형이 되시고, 모든 인류는 그분의 인성을 모방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Therefore we confess, against the heresy of the Anabaptists who deny that Christ assumed human flesh from his mother, that he "shared the very flesh and blood of children"; that he is "fruit of the loins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born of the seed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fruit of the womb of the virgin Mary"; "born of a woman"; "the seed of David"; "a shoot from the root of Jesse"; "the offspring of Judah," having descended from the Jews according to the flesh; "from the seed of Abraham"-- for he "assumed Abraham's seed" and was "made like his brothers except for sin." In this way he is truly our Immanuel-- that is: "God with us."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것을 부정하는 재세례파의 이단사설에 대적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혈과 육에 속한 자녀들과)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따라 “다윗의 허리에서 나온 자손들의 열매”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따라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의 열매”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씨”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새의 뿌리에서 일어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따라 “유다로부터” 나셔서 유대인의 자손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나셔서, 즉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셔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이단들 중에는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서가 아니라 하늘에 이미 별도로 지정된 인성을 입으시고 단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이 주장 자체로만 본다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리아에게서 취한 것이라는 고백보다는 일면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하늘의 인성이라는 것을 빌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수준의 비천한 인간으로 계셨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인성을 가지고 계신 것과 마리아의 몸을 그저 잉태와 출산을 위해 빌리시고 통과하신 것 까지는 맞지만, 그분의 하늘의 인성은 피조물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창조주이시고,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실 때에는 하늘의 영광된 속성을 모두 그대로 가져오신 것이 아니라 비천한 수준으로 한없이 낮추신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성경의 진리에 정확히 부합한다.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비로소 인성을 취하여 입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로서의 영광스러운 인성을 이 땅의 비천한 인성으로 한없이 낮추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원래 죽으실 수 없는 하늘의 영원한 혈과 육을 지니고 계셨으나, 창세 전에 당신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된 성도들을 죽음으로써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죽으실 수 있는 혈과 육으로 낮아지셨다.
사도행전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을 통해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고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과 맹세는 이미 창세 전 영원 전에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논의하시고 협약하신 것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로마서 1: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사도가 언급한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와 같은 낮아지신 인성을 가리킨다. 그 육신이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은 실제 육체적인 혈연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인 계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씨로 말미암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양자가 되셔서 요셉의 계보에 들게 되신 것으로 알 수가 있다. 마리아의 육신의 형질을 취하셨다는 주장으로 그녀와의 혈연과 계보를 따지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누가복음 1: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고대 교부들은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면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수호하려는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하며 양육한 마리아를 감히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완전하게 거하신다 하더라도 마리아는 단지 그분의 인성만을 잉태하고 출산한 것이지, 하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것이 아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주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도 우리를 비롯한 만유의 주님이 되시면서도 동시에 사람으로서도 만유의 주님이 되시므로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은 하나님이신 성자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자와 연합하신 사람이신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인성을 보내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성자 하나님과의 연합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지된 상태이셨다.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기 전에는 여자에게서 나실 필요도, 당신께서 제정하신 율법의 지배를 받으실 필요도 없으셨으나, 보내심을 받으신 후에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시기 위해 태아 세포로부터 시작하셔야 했고,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정하신 율법대로 어김없이 행하셔야만 했다.
디모데후서 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씨라고 한 것은 혈육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셉의 아들로서 다윗의 계보에서 나신 것이라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요셉의 씨를 통한 혈육이 그리스도께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양자와 다름없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계보를 통해서 나신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이는 마태와 누가가 모두 요셉의 계보를 명시하고 있는데다가 여자의 계보를 내세우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리아의 육신의 형질에서 취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마리아의 계보에 대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땅의 육신 또는 혈육에 대해서는 무익한 것이라 하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도 바을이 말한 다윗의 씨라는 것도 하늘의 신령한 언약, 더 거슬러 올라가서 창세 전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으신 구원협약의 관점에서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15: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사실 이새는 다윗의 아비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록도 활약도 없는 인물이다. 그는 늦은 나이에 다윗을 막내 아들로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이 찾아왔을 때나 사울 왕의 부대에 심부름을 보낼 때의 태도를 보면 그렇게 다윗을 귀하게 여겼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이사야가 이새를 그리스도의 조상으로서 특별히 언급한 것은 사람의 아무런 공로없이 무조건적으로 확실하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예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히브리서 7: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 하는 것은 비단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께도 해당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분의 인성을 주님이시라 함으로써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과,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과, 인성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에게까지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이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레위 지파의 제한적인 제사장 자격과 그리스도의 영원무궁한 제사장 자격을 비교대조하기 위해서이다.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여자를 통한 잉태와 출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죽음까지 사람이 영혼과 육신으로 겪을 수 있는 모든 인격적인 비참함을 똑같이 겪으셨다는 것과, 그 고난들이 형제라 불리는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과, 그렇게 구원하신 성도들을 형제와 같은 지위로 격상시켜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이전에는 사람으로 계시지 않으셨으나 때가 되어 사람으로 조성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하늘에서 영광의 사람으로 계셨다가 때가 되어 이 땅의 비천한 사람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과 고통과 질병과 유혹을 당하신 것이 아니신데 어떻게 모든 시공간의 성도들의 연약함을 체휼하실수가 있으시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자라 그 비참함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의 관점에서 생기는 의문에 불과하다. 이 땅의 사람도 갑자기 부유했다가 몰락해서 거지가 되었다거나, 누구보다도 건강했다가 갑자기 전신불수 또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거나, 누구나 부러워하는 고위직에서 갑자기 말단으로 떨어져버리거나 하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자괴감에 괴로워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서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이셔서 모든 존귀와 영광과 권세를 지니시고 누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부패한 인성으로 태어나실 정도로 낮아지셨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의 몰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그 낮아지심의 수준이 이 땅의 모든 인류가 겪는 모든 괴로움의 정도보다 무한하게 크시기 때문에 특히나 성도들의 연약함을 넉넉하게 체휼하시고 도우실 수가 있으신 것이다.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처녀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라 해서 오로지 하나님이시기만 하신다거나 그 처녀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거나 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엄연히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를 낳은 처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 땅의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실 때 그녀에게서 육신의 형질을 취하셔서 비로소 피조물로서의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던 하늘의 영광의 인성을 이 땅의 비천한 인성으로 무한히 낮추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땅의 사람으로 계실 때에도 여전히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과의 연합과, 성부 하나님과의 교통과, 성령 하나님의 완전충만함이 단절되신 적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인성을 통해서 한 분 하나님과 그 세 위격들을 바라보고 섬길수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분 하나님과 그 세 위격들은 창세 전후 때나 구속사역의 때나 세상의 종말 때에나 하늘의 새 예루살렘 때에나 항상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
#20200213 #창세기 #Genesis 33장.
야곱이 에서를 만나다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결과를 모르는 상태에서라면 에서가 4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에서 복수심에 불타올라 야곱과 일행을 멸하러 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야곱은 아무리 천군천사들에게서 영접을 받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밤새도록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축복을 받았어도 만에 하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서 아내들과 자식들의 일행을 나누어 나아간다. 우선순위가 가장 떨어지는 두 여종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가장 앞세우고 그 다음에는 첫 아내이나 애정은 없는 레아와 그 자녀들을 세우고 가장 마지막에 원래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아들 요셉을 두어 그들이 받을 위험을 최소화 한다. 그러나 야곱 자신은 그 무리의 족장이므로 가장 선두에 서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험을 먼저 받아내고자 하였다. 이렇게 가장 앞장서서 위험을 감수하려는 야곱의 태도는 세상 모든 리더에게 귀감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렇게 앞장서서 책임지고 위험을 감수하려는 참된 리더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가 순조로울 때는 담임목사로서의 모든 지위와 권리를 아무 거리낌 없이 취하면서도 정작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때에는 해결사가 되어 앞장서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 보전을 위해 비겁하게 뒤로 숨고 힘없는 부교역자들을 총알받이로 앞장세워서 교회에 쏟아지는 비난을 혼자만 피한다. 그러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힘쓰지도 않고 오로지 어떻게 하면 담임목사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만 궁리하며 교회 내 파당을 나누고 선동하고 고생한 부교역자들을 모조리 쪼아내기도 하며 자기를 지적하는 교인들더러 교회를 떠날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맡은 교회에서 얼마나 더 이익을 취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여 마치 불륜을 저지르듯이 교회 몰래 다른 사역할 교회를 알아보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다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본래 서약했던 교회를 버리고 몰래 내통했던 교회로 떠나 버린다. 그렇게 파렴치하게 떠나는 와중에도 노회장에게는 본 교회를 중상모략 하고 뻔뻔하게도 교회에는 후원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한 담임목사에게는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의 저주가 임하고 마지막 날에는 그리스도의 진노의 잔이 주어질 것이다. 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6.25가 터지자 혼자 몰래 부산으로 도망하고서도 방송으로는 마치 안전한 것처럼 국민들을 속이고 그것이 들통나 서울 시민들이 피난하려고 하자 이를 막으려고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서울을 수복하자 피난 가지 못한 수많은 국민들을 소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이승만 같은 파렴치한 지도자들이 이끌어 왔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에 무슨 뜻이 있으신지 꺼져가는 불꽃 같은 위태로운 이 민족을 지금까지 보호해 오셨고 이제서야 야곱 같은 책임감 있는 국가 지도자를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마땅히 지금의 국가 지도자가 임기 동안 책임감 있게 끝까지 임기를 잘 마칠 수 있도록, 그리고 임기 후에는 악인들에게서 해를 당하지 않도록 그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야곱은 이전에 에서와 같이 지낼 때에는 어떻게든 형을 깔아 뭉개려고 했다면 이제는 자기가 형에게 저지른 잘못을 통회함으로써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자 그 앞에서 일곱 번이나 몸을 굽혀 절을 한다. 이는 그만큼 용서를 구하는 야곱의 마음이 진실된 것임을 드러낸다. 이런 야곱의 행동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때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참된 모범이다. 오늘날 교회를 오염시키는 심각한 이단 사상은 신천지나 통일교 따위가 아니다. 이웃에게 범죄하고도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이유로 자기는 하나님께 회개 했으니까 정작 범죄한 이웃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뒤틀린 회개관이다. 설령 그 이웃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정말 미안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대의 용서를 권리차럼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밀양'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부패한 회개관을 꼬집으며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기도 하였다. 교회를 좀먹는 그런 부패한 회개관 때문에 교회에서 성범죄나 인명사고가 발생해도 교회를 살린다는 미명하에 피해자를 외면하기에 급급해 한다. 그러다 교회 내 여론이 급격히 안좋아지면 보여주기 식 회개를 하지만 거기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떠하였는가. 그는 형 에서가 자기를 용서할 것을 기대하고 그에게 나아간 것이 아니다. 오랜 동안 라반에게 착취를 당하면서 자기가 에서에게 했던 그 속임수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한 것임을 통감하였고 에서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은 에서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굳이 에서에게 가는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변명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야곱은 진정하고 참된 회개는 마음으로만 하나님께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에게까지 용서를 구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격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이전에 범한 과오들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으려면 교회 차원에서의 공적인 회개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건과 과오들로 인해 피해를 당한 개개인에게 가능한대로 교회 차원의 공적인 용서를 구하기까지 해야 한다. 성범죄와 사고를 당한 피해자 가족, 부당하게 내어쫓은 부교역자들, 교회의 불의한 행태에 상처받고 실망하여 떠난 교인들을 찾아가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참된 회개인 것이다.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사실 야곱에게 다다른 에서의 이같은 반응은 야곱을 비롯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깜짝 반전이다. 에서는 지난 날의 복수심에 불타올라 야곱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산가족 상봉한 듯한 감격으로 반갑게 맞이한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에서의 반응을 두고 그가 원래는 야곱을 죽이기 위해 출발했으나 라반처럼 도중에 하나님께서 급작스럽게 나타나셔서 공격하지 못하게 하신 결과라고도 하지만 난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에서의 반응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진정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하나님께 날 때부터 미움을 받은 자가 아니었던가. 비록 에서가 하나님께 미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허락하신 은총 덕분에 동생 야곱과 헤어지고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자기의 미련함을 깨닫고 야곱을 용서하는 마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야곱이 오랜 기간 동안 형 에서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소망하였다면 에서 또한 동생 야곱을 용서하고 화해할 기회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과 결별한지 거의 60여 년이나 지난 후에야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었다. 에서의 용서가 진실된 것은 이후 야곱의 예물을 받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한 것과 야곱의 아내와 자녀들에게서 인사를 받는 것과 혹시나 야곱의 무리가 노상에서 다른 무리에게 해를 당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자기 사람들을 남겨 지키게 하고자 했다는 것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에서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미움을 받았고 한 그릇 음식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망령된 자라고 가르치고 있어서 에서의 용서까지도 폄훼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우리의 왜곡된 선입견에 불과하며 에서의 용서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미움받은 에서의 탁월한 용서에서도 마땅히 우리에게 적용할 교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세속인 중에서도 자기 형제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자가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적어도 에서보다는 더 높은 용서의 덕목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르침인 것 같다. 신자의 선행이나 세속인의 덕행이나 겉모습만으로는 그 차이를 구별할 수도 없고 도리어 세속인의 덕행이 신자의 선행보다 더 탁월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께는 세속인의 덕행이 아무리 높고 탁월하더라도 오로지 신자의 미미한 선행만을 인정하시지만서도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도 세속인의 탁월한 덕행을 폄훼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속인의 덕행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자만하지 말고 오직 겸손하여 저들의 덕행 수준을 본받아 더욱 선행에 힘쓰라는 채찍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알지 못하고 단지 세속인의 덕행은 하나님께 아무 소용이 없다는 원론적인 해석으로 마치 여우가 따먹지 못한 포도를 보고 신포도라고 하듯이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0190213 [#설교묵상, 마 10:32-42]
검을 주러 왔다(눅 12:51-53; 14:26-27)
(마 10: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검을 주러 오셨다는 것은 우리더러 불화와 분열을 일으키라고 하신 뜻이 아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천국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득이하게 주변과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 10: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우리와 관계가 먼 사람들도 복음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의 복음을 대적하고 괴롭히기도 한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무시하면 그만일 수 있으나, 나와 아주 가깝고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복음을 대적하고 괴롭히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다. 때문에 다윗은 시편에서 자기와 가까운 이들의 배신에 그렇게 괴롭고 힘든 감정을 토로했던 것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은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도 될 수도 있고, 학교나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같은 신앙 공동체라고 하는 교회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신앙으로 모인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신자들로서는 더욱 미묘하고 까다롭고 갈등으로 인한 상처가 더욱 클 수 있다. 어떤 이는 담임목사의 설교에 별다른 불만 없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떤 이는 담임목사의 설교가 과연 그러한지 따져보기도 하고 문제제기도 하고 불만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편이 타당한지 마땅한 답을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 두 부류의 신자는 같은 설교를 두고 각자의 검을 들게 된다. 교회에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교회가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대해서도 편이 갈린다. 어떤 부류는 담임목사와 당회의 결정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편은 그 처리 과정이 참으로 일반 상식과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한 것인지 하나하나 따진다. 교회에서 벌어진 같은 사건과 같은 처리 과정을 두고 서로 반목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내가 믿는 예수님과 복음을 비난하고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우리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식으로 똑같이 그들을 비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들의 검은 그렇게 우리를 아프게 찌르더라도 우리의 검은 그들을 사랑으로 품는 것이다. 상대가 우리의 오른뺨을 후려칠 때 우리의 검은 왼뺨을 돌려대는 것이다. 상대가 강제로 우리를 오 리를 가자고 할 때 우리의 검은 그들과 십 리를 같이 가 주는 것이다. 상대가 우리 겉옷을 빼앗으려 할 때 우리의 검은 그들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는 것이다. 상대의 검이 불의와 부당함과 억지라면, 우리의 검은 공의와 정당함과 사랑인 것이다. 우리의 검은 그들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세상 정사와 권세들을 찌르는데 쓰여야 한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의 귀를 자르는 것이 우리의 검이 아니라, 그 군병의 귀를 고쳐주신 예수님과 같이 행하는 것이 우리의 검이다. 자신을 군병들에게 팔아넘길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시고 떡을 건네주신 것이 예수님의 검이었다. 동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알면서도 말없이 바라보시는 것이 예수님의 검이었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 겨눠야 할 검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검이다.
교회 내에서 이런저런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 편이나 저 편이나 동일하게 가져야 하는 태도도 이와 같아야 한다. 설령 내가 맞고 상대가 틀렸다고 할지라도, 또한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억지를 부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 보시기에 교회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 정당하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에게 우리가 옳다는 것을 사랑으로 권면하여야 한다. 상대가 받아들이면 감사한 일이거니와, 설령 그러지 않더라도 그들을 저주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검'인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입장을 어떻게든 관철시키기 위해서 투명하지 못한 부정적인 권모술수를 쓰는 것도 금하여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정당하고 격식있는 방식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검'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복음의 진리와 순종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함 없이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화합과 화평이라는 미명하에 잘못된 것을 묻어버리는 것에 타협하는 것은 또다른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며, 우리가 마땅히 들고 싸워야 하는 '검'을 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바로잡을 때까지 끈기있게 문제 제기를 하고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교회를 정결하게 하는 '검'인 것이다.
(마 10: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나 자녀를 사랑하되 ‘주 안에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되,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설령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들과 불화가 생기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주 안에서 우린 하나라며 고백하는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주 안에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부모와 자녀처럼 사랑하되, 혹여 그들이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행한다면 그들과의 불화를 무릅쓰고서라도 주님의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 담임목사나 장로 등의 중직자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들의 직분 자체는 존중하되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지적해야 한다. 교인 중 누군가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의 신앙의 미숙함을 안타까워 하면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 줄을 그 교인이 인지하고 돌이킬 때까지 끊임없이 권면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는 잘못을 행한 그들을 미워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평생동안 주님의 뜻에 따르며 살아가야 한다. 불의한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은 많은 고난과 손해를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인 것이다. 우리가 능히 각자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보다 더 큰 것을 질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 받았다 하면서 주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손해를 거부한다면, 그의 구원의 확신은 마땅히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임받은 담임목사나 장로 등의 중직자들에게는 이 주님의 말씀을 더욱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청지기로 위임되었다 하면서 추진하는 교회 사역이나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뜻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한다면, 그리스도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그 교회 직분자의 소명 자체가 의심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담임목사나 장로 등의 교회 중직자들은 매사에 자기들이 과연 예수님께 합당한 자들인지를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땅히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며, 교인들보다 교회가 먼저 예수님께서 지우신 십자가를 지고 심지어 그 십자가를 지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순종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교회는 그리하지 않으면서 교인들에게만 십자가를 질 것을 종용하는 것은 결국 독사의 자식들과 같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별반 다르지 않다.
상을 받을 사람(막 9:41)
(마 10: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너희’는 당시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하나, 오늘날에는 특별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교회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교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영육간에 필요한 것들을 기쁨으로 제공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는 것이 바로 교회 사역자들을 세우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물론 이 관계가 정상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교회 사역자와 교인들 간의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교회 사역자는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유익과 영광을 위해 교회 사역을 하여야 하며, 교인들은 그런 교회 사역자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것을 방해하는 교회 내의 부조리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담임 목사를 비롯한 교회 사역자들이 그 맡은 본분을 성실하게 행하지 않으면서 교인들로부터 영접 받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정작 담임 목사는 교인들에게 부실한 설교와 열매 없는 사역만을 제공하면서도 교인들로부터는 담임 목사로서의 권위를 억지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두꺼비에게 헌 집 줄테니 새 집 달라는 심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둘째는 교인들이 담임 목사만 영접할 줄 알고 부교역자들은 그만큼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교역자들을 담임 목사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꾼이나 하인처럼 하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정작 복음 사역에 힘쓰지 못하도록 교회의 여러 잡다한 일에 소환하는 것이 그러하다. 셋째는 교회가 부교역자들의 처우를 박대하는 경우다. 이는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인데, 담임 목사에게는 온갖 권위와 혜택을 제공하면서도 정작 실제로 교회 사역의 전반을 담당하는 부교역자들에게는 교회 사역자로서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일용할 양식 조차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소명 페이’다. 또한 교회의 힘든 시기에는 그들을 소나 말처럼 온갖 힘든 일에 부려 먹고나서, 그 시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 싶으면 파리 목숨처럼 토사구팽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 교회와 같이 한 번에 모든 교역자를 갈이치우는 경우가 얼마나 빈번하게 발생하는지 매우 궁금하다. 교회가 부교역자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교회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고, 이는 결국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마 10: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 10: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외면과 핍박을 당하여 고독한 삶을 살았다. 모든 선지자/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특별한 사모함이 있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을 보면서 거룩한 울분을 토한 자들이었다. 죄악이 관영한 백성들과 어울려 불의하게 화합하느니, 차라리 혼자가 되는 고독한 길을 택했다. 그들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저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입다물고 있으려 해도, 거룩한 열정이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열정에 자기들을 불사른 그런 자들이 선지자/의인들이었다. 그런 선지자/의인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한다는 것이고 선지자/의인들이 처한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려 할 때, 오바댜가 자기 목숨을 걸고 1백 명의 선지자들을 동굴에 숨겨 먹여 살린 것이 선지자를 영접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다가 왕궁의 물없는 우물에 던져졌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왕궁의 어느 이방 흑인(구스인) 신하가 목숨을 걸고 시드기야 왕에게 간언하여 예레미야를 구출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가 참된 선지자와 같은 교역자들을 핍박할 때, 그들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살펴 주는 것이 바로 오늘날 선지자들을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특별하여서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교회에서 소외되는 교역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지자/의인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선지자/의인들의 고난과 고독을 함께 감당할 각오로 한 것이므로, 그들과 방불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작은 자’들은 비단 주님의 제자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가복음 9:41절에 보면 작은 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 중에서 작은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작은 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받게 되는 인식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통상적으로 손해만 보고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작은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서로가 세상에 대하여 ‘작은 자’들임을 인정하고 서로서로 돌보고 도와야 함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의 ‘작은 자’이다. 한 교회 내에서도 힌 믿음을 고백하는 무리 가운데서도 세상의 여러 신분이나 재력이나 지위 등의 격차가 있게 마련이다. 또한 교회의 직분 가운데서도 알게 모르게 지위와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성숙하지 못한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런 ‘작은 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천대 받게 마련이다. 교회에서 조차도 작은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작은 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서는 일이 빈번하다. 그러나 제자들이 뿌리친 아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영접하신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긴다면 그런 작은 자들에게 더욱 신경을 쓰고 돌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는 이런 작은 자인 부교역자들을 실컷 부려먹다가 집단 토사구팽을 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에게 주는 냉수 한 그릇에도 상을 주시는 주님이시라면, 그런 작은 자들을 한꺼번에 내쳐버린 교회가 받을 징벌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 것인지를 과연 누가 알고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