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목)
열왕기상 17:17~24
죽은 아이를 살리신 하나님의 권능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기거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기적을 날마다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했던 사르밧 과부의 생활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이 일은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증거 했습니다(12절).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계속되던 어느 날,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아들이 죽자 엘리야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절).”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던 여인의 믿음은 싸늘해졌습니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죄를 떠올렸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의 결과로 인식한 것입니다. 여인은 엘리야의 방문으로 인해 자신의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불평했습니다.
오늘날 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평안히 살 수 있도록 나의 재정과 건강을 돌봐 주실 때에는 나타나지 않던 현상들이 시련의 때에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사역자를 향한 비난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위기를 대처하는 엘리야의 행동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서 그의 죽은 아들을 달라하여, 그를 자신이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 자기 침상에 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올라가 자신의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죽은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죽은 아이가 아직 살아 있는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간절함의 표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죽은 아이를 대하는 엘리야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야가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선택은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우리는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하며, 그의 어머니를 위로했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어린 아들이 병들어 죽는 것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며, 모든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해석해 주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취할 수 있는 두 번째 선택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적극적인 자세로 죽은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방법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어떻게 기도로 살려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엘리야는 무모하게 보이는 이 일을 선택했고, 죽은 아이와 살아 있는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만약 내가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솔직히 저는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할 것 같습니다. 저는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죽음의 의미를 부각하며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일이 행할 것입니다. 제가 그런 선택을 취한다고해서 아마 저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했던 엘리야의 체험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 해답은 아마 24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저자는 이러한 엘리야의 적극적인 기도를 통해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함’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아합 왕은 그 이전의 어떤 왕들보다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했던 왕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만연해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받던 시대에, 하나님은 이러한 기적을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를 세워주시고, 그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것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죽음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죽음과 맞서야 한다거나, 기도의 능력을 과신하도록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죽음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 현상임을 인정하고, 우리가 죽음의 의미를 상기하고 슬픔에 빠진 유가족을 위로하는 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죽은 아이를 살리신 기적을 일으키심으로 영적으로 어두운 세대를 깨우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권능을 기대할 수 있고, 또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극적인 사랑의 기도를 요청하고 계심은 분명합니다. 최근 제 주변에 암이나 질병의 문제로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들이 겪고 있을 고통을 기억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의 치유를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