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세상을 비워보자
필자가 도가사상을 어설프게나마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이모네 집 책장 한 구석에 있던 학습만화들을 읽어보면서부터였다. 개중에는 썩 재밌는 이야기도 많았고 나름 유익하게 써먹을 수 있던 정보들도 있었지만 아직 학식과 견문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한 때의 추억으로 기억 저편에 뭍혀있었을 따름이었다.
이번 학기 강의에서 내가 발표할 차례가 다가오자 본 교재인 도덕경의 내용을 찬찬히 흝어보던 중 내가 맡은 부분인 20장 절학무우(絶學無憂: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내가 구한 책과 왕필본의 내용, 블로그에 번역된 글들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 해석하는 데 가장 애를 먹은 장이기도 했다.
20장의 내용은 논어의 첫구절 '배우고 틈틈히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배움이 늘어갈 수록 알아가는 즐거움이 늘어나기는 커녕, 내가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되고 세상은 아직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하는 의문들로 가득하다는 걸 깨달을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눈높이에 맞춰 더욱 정신하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남들은 다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나한테는 이게 어려운 걸까?' 왜 나는 남들처럼 즐기면서 할 수 없는 것일까?
20장 뿐만 아니라 도덕경의 내용 내내 노자와 노자의 이름을 빌려 말하는 왕필은 유가가 빼곡하게 채워놓은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비우고 그 경계를 지울것을 강조한다. 다시말해 인위로 점철되어가는 세상에서 다시 무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무위를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짐나 이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면이 있다. 현대인이 떠올리는 자연과 과거 사람들이 인식하는 자연이 완전히 똑같은가? 도가에서 말하는 자연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파괴하고 보존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닌 우주를 움직이는 삼라만상의 법칙 그 자체이다. 즉 무위자연이란 인위적인 예법과 격식으로 행동을 인위적으로 제약하지 말고 순리대로 흘러가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노자를 포함한 도가 사상가들이 줄곧 주장해온 바에 따르면 도(道)를 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심지어 그 도라는 단어조차 확실하지 않아 25장에서 굳이 말하자면 그것을 도라고 부르는 것이라 억지로 정의를 내린것이라고 한다. 즉 노자는 20장을 통해 그것을 도라고 확실히 규정하는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뜻에서 유가의 만물을 인위적으로 규정짓는 '배움'을 끊으라 말하는 것이다.
가령 장자에 나오는 한단사람의 발걸음을 따라하려다 원래 걷는 방법조차 잊어버리고 네발로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내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도가는 복잡한 예법과 격식을 무비판적으로 따라하고 점차 교조화되며 사람들의 사고가 그에 맞춰서 경직되어가는 세태를 경계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도 노자가 말하는 세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이념과 인종,종교과 문화,나이와 성별,지연과 학연 등등 모든 것을 구분짓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울타리를 쌓은 끝에 서로의 살갗이 잠시 스치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이 넓어질 수록 우리는 그저 허물어진 우물속의 개구리요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미물들에 불과하던 사실만 명확해진다.
그런 사회를 향해 도가는 말한다. 인위의 경계를 버리고 꽉 막히게 채워놓은 것들을 잠시 비워놓으라고, 그렇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채울지까지는 도가가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일 테니까
첫댓글 절학무우는 식자우환과도 상통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겠지만, 식자우환(識字憂患)은 송대 성리학의 핵심되는 이야기입니다. 글자를 알면 우환이 생긴다, 배운 게 문제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거꾸로 보면, 세상에 대한 우환의식을 가져야 하는 의무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공부하게 해준 이 사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 사회는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의무감이지요. 따라서 절학무우는 우민정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치관, 이념 등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위로 만들어진 가짜 학문, 그것에 따라 끊임없이 스스로 기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가치를 세워 나가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본래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맹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노자는 맹자와 묵가의 주장 때문에 가짜가 판을 치게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맹자와 묵자가 본래 지향한 것은 노자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