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이 새벽, 나의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소서.
육신의 눈은 언제든지 바벨론의 번성함을 보기 원하오니 육신의 눈은 닫아주시고 영의 눈을 열어 주를 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거룩한 주일입니다.
매일이 거룩한 날이지만 특별히 구별된 날이 되어 주님과 더 깊은 예배와 교제로 나아가게 하소서.
흩어졌던 주의 백성들이 함께 모이는 날이오니 저들의 발걸음을 안보하여 주시고 주를 만나는 하늘의 기쁨이 넘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죄의 먼지를 씻어주시고 정결함으로 주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11:10-32
제목 :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남.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100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5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13 셀라를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았고
15 에벨을 낳은 후에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후에 43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 벨렉은 30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후에 20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르우는 32세에 스룩을 낳았고
21 스룩을 낳은 후에 2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후에 2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 나홀은 29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후에 119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205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 나의 묵상
성경은 셈의 계보를 통하여 아르박삿 셀라 에벨 등이 태어나고 계속 이어서 데라와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브라함을 등장시키기 위하여 노아로부터 무려 10대에 걸친 족보를 열거한다.
노아 이후 제9대의 조상이 된 데라는 장자 하란과 아브라함 그리고 나홀을 낳는다.
하지만 하란은 아들 롯과 딸 밀가와 이스가를 낳고 아버지 데라보다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먼저 죽는다.
아브라함은 그의 이복동생 사래와, 나홀은 하란의 딸인 조카 밀가와 결혼하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하여 자식이 없었다.
한편 데라는 그의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 그리고 며느리 사래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정착을 한다.
그렇게 데라는 205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다.
성경은 원시역사인 창세기 4-11장을 이렇게 셈의 족보로 결론을 짓는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12장부터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성경을 구속사로 보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처럼 성경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임을 분명히 밝혀준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기 이전의 아브라함의 행적이 소개된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기 전,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하란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 때 이주의 주체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이다.
데라는 우상숭배자(수 24:2)였는데 그런 그가 어떻게 우상의 소굴이요 도시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사실 가나안을 목적지로 삼고 떠났으나 중간지점인 하란에 도착하여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그곳에서 죽는다.
이처럼 그의 목적지가 가나안이었다는 것은 데라 자신의 뜻이라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가나안을 향해서 가던 데라 가족은 하란에서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곳 하란에서 죽는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내용에는 하란에서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그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행 7: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여기서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로 번역된 헬라어는 ‘메타 토 아포다네인’으로서 ‘메타’는 목적격과 함께 쓰일 때는 ‘~후에’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전치사가 되므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죽은 후에’가 된다.
즉 아브라함은 하란 땅에 거하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그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왔으며, 그가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데라는 아브라함을 70세에 낳았고(창 11:26)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므로 그 때 데라의 나이는 145세가 된다.
하지만 하란 땅에서 죽은 데라의 나이는 205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1:32).
데라의 나이가 무려 60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창 11:26절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된다.
즉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는 문장을 문자적으로 보면, 데라는 1년 동안에 3명의 아들을 낳은 셈이 된다.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은 세 쌍둥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나홀은 하란이 낳은 딸인 밀가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데라는 장자 하란을 70세에 낳았고, 60년이 흐른 130세에 아브람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나기(창 12:4) 직전 데라는 205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보면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을 너무 문자에 치우쳐서 해석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이런 나이에 대한 모순은 문자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기록방식을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예를 들면 창 5:32절에 ‘노아는 500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된 후에’는 우리 성경에 작은 글씨로 되어 있다.
이는 원문에는 없는 것인데 의역을 한 것이다.
실제로 원문에는 ‘된 후에’라는 히브리어가 없다.
단지 500세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고만 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단순히 문자적으로 읽지 않아야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세 쌍둥이가 아닌 이상, 물리적으로 세 아들을 500세가 된 그 해 곧 1년 만에 다 낳을 수는 없다.
이는 동시에 출산한 것이 아니라, 500세부터 출산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데라가 세 아들을 낳은 것도 마찬가지다.
(창 11:26)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 역시 70세부터 출산을 시작한 것이다.
데라의 아들들은 장자 하란에 이어서 아브라함과 나홀을 낳았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날 때는 데라가 주체가 되어 떠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계시가 완성된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주체가 되어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
곧 그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나안으로 떠난다.
하지만 아버지 데라에 의해서 하란에 머물게 되고, 그 아버지가 죽은 후에 가나안으로 떠나게 된다.
나는 언약을 알지 못하던 자였다.
아담과 맺은 창조언약, 노아와 맺은 무지개언약, 아브라함과 맺은 횃불언약을 비롯하여 출애굽 시에 맺었던 시내산언약 등 언약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다.
더욱이 이런 나에게 있어서 창세전 언약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복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성경의 지식만을 가지고 목회에 들어섰으니 무식해도 이런 무식한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복음을 듣게 하셨다.
이 복음을 통해서 구약에 나오는 시내산언약을 비롯한 옛 언약과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약속하신 새 언약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창조언약을 맺으셨으나 그가 하나님이 주신 조건의 규정인 말씀에 쉐마하는 일을 어김으로 그 창조언약이 깨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아담에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재적인 복음(창 3:15)을 주시고 또한 메시야적 행위로써의 복음인 가죽옷(창 3:21절)을 주신다.
이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담과 맺은 언약을 아브라함과 횃불로 다시 맺으신다(창 15:17).
이를 가리켜 횃불언약이라고 한다.
셈의 후손인 데라를 통하여 불러내신 아브라함은 구속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나 다윗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간다.
그리고 이들의 혈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 오신다.
이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약속했던 새 언약을 성취하신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중간중간에 데라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여 그 약속의 길(가나안)을 벗어나 삼천포(하란)로 빠지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신실하심으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나야말로 언약을 알지 못하여 엉뚱한 길로 빠지는 데라요 또한 그곳에서 죽어 마땅한 자이다.
이런 나는 아담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닌가?
내 안에 아담 안에 있는 본성인 옛 사람이 지금도 나를 죄의 길로 이끌고자 끊임없이 미혹을 한다.
그로 인하여 쉴 새 없이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다시 한 번 우리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일어나 담대하게 아버지 품으로 들어간다.
한없이 부끄럽고 뻔뻔하지만 나의 힘이나 의지가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나아간다.
나는 죽으나 예수로 살기 원하여 주의 십자가와 무덤에 연합하여 생명으로 살기를 원한다.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그분의 품속에 안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죄인 중에 괴수인 나에게 창세전 언약은 언감생심 너무나 과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이 아니면 나는 영적 가나안인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압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야말로 하란으로 빠진 데라요, 중간치기를 잘하는 둘째 아들 탕자입니다.
이 시간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로 살아가는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소서.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 같이, 내 안에 우상으로 가득한 데라가 죽게 하소서.
옛 사람으로 친숙한 하란을 떠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이 넘치는 그 나라를 소유하게 하소서.
나의 영원한 본향인 그 나라를 사모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