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짓는 삶의 단점 2019101249 철학과 조현수
도덕경에서는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진리는 규정짓는 것으로는 깨닫기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규정짓는 것 다시 말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할 때 도움을 준다. 아니 거의 필수라고 봐도 될 정도다. 우리 주위에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것들에는 저마다 이름이 있다. 그래서 공자는 천하를 바로잡으려면 먼저 이름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프레임을 만드는 것과 같다. 프레임은 규정짓는 역할도 하지만 우리의 사고를 가두는 단점이 있다. 예를들어 요즘 많이 쓰이는 mz라는 이름은 2030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많은 사람이 그 이름에 갇혀서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노자는 바로 이러한 면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며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은 남이 붙인 것일 수도 내가 스스로 나에게 부여한 이름일 수도 있다. 이런 이름들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을 이용하되 그 이름에 갇혀서 살아가면 안된다. 우리의 이름은 우리를 결코 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를 이해할 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보다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에 더 집중해야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진리가 더 많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타자를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 말은 도가철학과 맥락이 비슷한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보통 “누구누구는 이런 사람이야” 같은 형식을 띈다. 그러나 그렇게 다른 사람을 규정 지으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다. 내가 규정지은 그 사람과 실제 그 사람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하면서 실망하고 화가 나는 이유가 모두 이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라고 규정을 지으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는데 그 기대가 충족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실망을 하고 때로는 화도 나는 것이다. 나 역시 얼마 안 산 인생이지만 이런 경우를 꽤 많이 겪었다. 도가 철학을 공부하면서 나의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하여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다른사람을 이해 할 때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붙이겠지만 내가 그사람에게 붙인 이름이 결코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님을 항상 명심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만약 의외의 반응이 나왔을 경우 그 사람에 대하여 더 알아간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가에서는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했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이름을 붙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편하다. 편하다는 것은 포기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대신 이름을 붙이는 것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계속 반성하고 이름을 계속해서 수정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할 때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생각들에 집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이야 말로 내가 ‘규정된 나’에 매여서 보지 못하고 있는 진짜 나의 감정과 생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가가 주장하는 ‘포월’이 아닐까? 아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레비나스가 그리는 존재에 대한 설명은 다원론적 존재이해라는 점에서 도가의 도와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본문에 "우리가 인간관계를 하면서 실망하고 화가 나는 이유가 모두 이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라는 문장에서는 '모두'라는 단어가 또 하나의 절대적 프레임 드러냄으로서 다양성을 "포괄"하고자 하는 도가적 입장에서 동의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름짓기는 그 자체로 헤게모니(권력_가 작동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프레임을 만든다"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권력 행위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을 다른 사람도 승인하게 만들려고 할 때는 권력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이 세상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진리가 더 많다"는 것은 이해의 지평이 거기에 닿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고, 권력이 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도가에서 시비를 없애고, 이름 붙이기를 유보하는 까닭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힘을 우리가 이름 붙이기를 통해서 권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박석윤학생이 "모두"에서 권력이 작동한다고 이의제기한 것도 같은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타자성에 대한 권력이 작동하지 않게 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도가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의 이야기를 도가에, 도가의 주장을 레비나스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