칫솔의 눈물
김재원
주룩, 주루룩, 주룩주룩!
아침부터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에이, 장마가 왜 이렇게 오래 가지? 끝날 때가 되었는데.’
나는 창 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를 닦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칫솔꽂이에는 여태까지 쓰던 칫솔이 온 데 간 데 없고 새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니 내 칫솔이 어디로 갔지?’
나는 화장실 안을 여기 저기 뒤졌습니다. 어제 저녁까지도 있었는데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아내는 그 전부터 새 칫솔을 쓰라고 몇 번이나 권했습니다.
아내는 벌써 두 개째 나 칫솔을 바꾸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새 것보다 쓰던 칫솔이 더 편했습니다.
새 칫솔은 마치 새 신발처럼 딱딱하고 어색하지만 헌 칫솔은 부드럽고
손에 익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칫솔은 동창회에 나가서 받은 것입니다.
정다운 친구들이 준 것이기 때문에 더 버리기가 아깝습니다.
아내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잔소리를 하였습니다.
“여보! 헌 칫솔을 오래 쓰면 이에 안 좋대요! 그러니 어서 바꿔요!”
아무리 말해도 내가 헌 칫솔을 계속 쓰자 아내가 참다못해 버린 모양입니다.
나는 한참 여기저기를 뒤진 끝에 마침내 쓰레기통에서 헌 칫솔을 찾아냈습니다.
그 헌 칫솔을 보자 지나간 날들이 디지털 카메라 속의 사진처럼 차례로 하나씩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원래 칫솔질을 규칙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나면 이를 닦고 바쁘면
안 닦기도 하고 대충 대충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충치 때문에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던 날, 의사 선생님한테 단단히
교육을 받았습니다.
“김솔지씨! 평소에 이를 잘 안 닦았지요? 이제부터 하루에 세 번 이를 꼭 닦으세요!
칫솔질은 위에서 아래로 비질하듯이 쓸어내려야 합니다. 자, 보세요. 이렇 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니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한테는 걸핏하면 이를 잘 닦으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이를
잘 안 닦았으니......
나는 그 뒤부터는 이를 열심히 닦았습니다. 다시는 이가 아파서 고생하기가
싫었거든요.
이를 닦는 습관이 생기자 회사에 가서도 이를 닦았습니다.
심지어는 여행갈 때도 집에서 쓰던 내 칫솔을 들고 갔습니다.
나는 호텔에서 주는 것보다는 내가 쓰던 칫솔이 더 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칫솔도 버릴 때가 되었나 봅니다.
하지만 선뜻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헌 칫솔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요모조모 만져보았습니다.
칫솔을 만지고 있노라니 문득 며칠 전에 미주한테 읽어준 동화가 생각났습니다.
미주는 밤마다 잠자기 전에 제 엄마나 나한테 꼭 책을 읽어달라고 조릅니다.
하루는 무슨 이야기를 읽어줄까 하고 책꽂이를 뒤적거리다가
<사랑받는 날에는>이라는 동화를 골랐습니다.
그 동화는 토끼 모양을 한 인형이 아이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나중에는
진짜 토끼가 된다는 줄거리였습니다. 천으로 만든 토끼가 겉모습은 아무리 낡아도
마음만은 낡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토끼 인형을 생각나자 이 칫솔도 어쩌면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냄새나는 이를 오래 닦았으니 이제는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래서 새 칫솔로 양치질을 한 다음에 헌 칫솔은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출근하려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을 때였습니다.
나는 구두 주걱을 찾는 대신에 칫솔을 꺼내어 발뒤축에 받쳐서 구두를 신었습니다.
회사에 간 다음에는 피곤할 때 칫솔을 꺼내 등과 옆구리를 쿡쿡 쑤시며 안마기로
썼고, 점심을 먹고 나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동료가 있으면 칫솔로 겨드랑이를
간질러서 깨웠습니다.
며칠 뒤 일요일이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모처럼 등산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미주는 가까운 할머니댁에 맡겨
놓고 아내와 집을 나섰습니다. 구름이 끼어서 약간 흐린 날씨였지만 오후 늦게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어서 산행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내와 산 정상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나는 늘 가던 코스가 싫증나서 안 가본 길로 들어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울창한 숲만 이어질 뿐 아무리 가도 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산봉우리를
두 개나 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다리는 아파 오고
주위는 점점 어두워져서 슬슬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거 큰일났네! 어떡하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모르는 길로 와요?”
아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 울상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비까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우산은 챙겨갔지만 손전등을
준비하지 않아서 큰일이었습니다.
어느 새 사방이 깜깜해져서 우리는 앞을 못 보는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갔습니다. 어쩌다 돌이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습니다. 내가 앞에서 발을 제대로 떼어 놓지 못하고 쩔쩔 매자
아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당신, 라이터 있잖아요? 그거라도 켜요!”
그제야 라이터를 켰지만 뜨거워서 오래 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휴지도 꺼내서 태우고 메모지까지 다 태웠습니다. 이제 더 태울 것은 없었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불을 켜려고 해도 비에 젖어서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사방은 더 깜깜해지고 길은 보이지 않고......
나는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아내는 발이 아파서 더 못 걷겠다며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빗물이 우산 끝에서 똑똑 떨어졌습니다.
나는 주저앉은 아내를 내려다보다가 조끼 안주머니에 넣어둔 칫솔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산에서도 쓸 일이 있을지 몰라서 조끼 속에 넣어두었던 것입니다.
나는 칫솔을 꺼내들고 나직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칫솔아! 그 동안 나를 위해 고생 많았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너를
태워야겠구나! 부디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거라!”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 나서 칫솔에 불을 붙였습니다.
활활!
칫솔 속에 들어 있던 영혼이 밖으로 나온 듯 갑자기 사방이 환해졌습니다.
칫솔 횃불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밝았습니다.
뚝뚝!
칫솔 횃불은 우산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비를 맞아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빗방울이 칫솔대를 타고 흐르자 꼭 칫솔의 눈물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습니다.
불을 보자 지쳤던 다리에 힘이 솟아 났습니다.
가시덤불을 뚫고 돌무더기를 넘어 무작정 앞으로 나갔더니
드디어 저 앞쪽에 노오란 불빛이 보였습니다.
“어머! 집이 보이네!”
“야, 이제 살았다!”
아내와 나는 동시에 외쳤습니다. 길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칫솔은 점점 타서 담배꽁초만큼 작아졌습니다.
이제는 뜨거워서 더 이상 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차마 휙 던져 버릴 수가 없어서 칫솔 도막을 발 밑에 살짝
내려놓았습니다. 칫솔 도막은 연기로 사라질 때까지 빛을 뿜어냈습니다.
나는 전등 불빛이 번쩍거리는 길 쪽으로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콩알만 하던 불빛마저 꺼진 뒤라 칫솔 도막이 있던 자리는 깜깜하였습니다.
나는 마음이 짠했습니다.
우산을 비껴들고 있어서 빗방울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 빗물 가운데는
내 눈물도 몇 방울 섞여 있었습니다.
나는 버스를 탄 뒤에도 칫솔 도막이 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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