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2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소리 없이 아주 조용히 보슬비가 내립니다.
밤새 오염된 나의 영혼을 주의 보혈로 말끔히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 주옵소서.
주일 이후 새로운 한 주를 허락하셨으니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동행하는 믿음의 한 주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3박4일 일정으로 한국에서 동기 목사 부부가 방문합니다.
이들의 걸음을 인도하여 주시고 영육으로 황폐화 된 동토의 땅 베트남의 실상을 보고 저들을 위하여 품고 기도할 수 있는 영을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 하루도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음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12:1-9
제목 : 심령이 가난한 아브라함을 상징하는 두 단어, 장막과 제단.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75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 나의 묵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버지 데라와 함께 아내 그리고 조카 롯도 함께 동행했다.
그들이 하란에 도착하자 거기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데라는 거기서 죽었고 아브라함은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
그리고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내가 너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인데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복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할 것인데 땅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통해서 복을 얻을 것이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다.
그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라함은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하란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다.
아브라함은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노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벧엘 동쪽으로 옮겨 장막을 쳤다.
그 장막 친 곳의 서쪽에는 벧엘이 있고 동쪽은 아이가 있었다.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하였다.
그 이후 점점 남방 곧 네게브로 옮겨갔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였다(수 24:2절).
아브라함 역시 모르긴 해도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우상을 섬기는 자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상의 소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곳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아직 지정하지 않았지만 알지 못하는 길을 가던 중 하란에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을 주권적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겠다고 하신다.
무엇보다 땅의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사람들이 받는 복은 복음의 복이다.
(갈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또한 그 복음 곧 오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증거함으로 모든 사람들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복음의 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복의 근원이요 또한 복 그 자체(2절)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인가?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믿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자들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그래서 이들은 아브라함이 받는 복을 동일하게 받는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이 받는 복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이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이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는 히브리서 11장인 믿음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가 행동한 것은 다름 아닌 믿음의 행동이었다.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실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나아갔다(히 11:8).
또한 그가 이방 땅에 거하는 것처럼 약속의 땅에서 살 때조차 그의 자손 곧 이삭과 야곱과 함께 믿음으로 장막에 거주하였다(히 11:9).
그의 믿음은 단지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 발로 밟을 수 있는 가나안 땅을 넘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곧 하나님 나라를 바라는 믿음이었다(히 11:10).
아브라함을 정의할 수 있는 두 개의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장막과 제단일 것이다.
그는 옮겨 다니는 곳마다 멋드러진 집을 짓지 않고 장막을 쳤으며 또한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예배하였다.
물론 정착생활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유목민들이기 때문에 고정된 주택을 지을 수 없지만, 장막(텐트)은 화려할 수도 없으며 뭘 꾸밀 것도 없다.
그저 몸을 누이고 좀 쉴 수 있으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막은 곧 자신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는 좋은 도구이다.
또한 제단 역시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늘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한국에서는 전세이지만 그래도 몸을 뉠 집도 있고 이곳 선교지인 베트남에서도 교회에서 숙소를 마련해주어서 언제든 맘 편하게 쉴 곳도 있다.
또한 먹는 것 역시 걱정할 것 없이 육신의 배를 채울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런 내가 정말 먹어야 할 생명의 양식은 모른 채 오직 땅의 것에만 치심하여 살아온 날이 얼마던가?
그래서 나는 땅에 속한 사람이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복음의 복을 주셨다.
그 복을 나는 오늘도 누린다.
주님께서 그토록 주기 원하셨던 영생을 오늘도 현재로 누리며 그 나라를 바라본다.
내 안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생명력 있게 살아 숨쉬며 늘 주님과 함께 교제와 사귐을 갖는 이 시간이 너무 좋고 귀하다.
어떤 집사님은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하기도 하였다.
“목사님, 하나님과 교제하는 묵상을 가르쳐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님은 세상 모두가 아는 일이다.
오직 주님이 하신 일이기에 나를 드러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지금도 주님은 당신과 함께 노닥거릴 자들을 찾고 계신다.
주님과의 노닥거림이 나에게는 참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시간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보다 2,000년은 먼저 왔던 아브라함도 우리 주님 오실 것을 기다리며 기뻐하였습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비록 그는 약속 곧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약속으로 받을 것을 믿음으로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그가 사는 그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음을 압니다(히 11:13).
그리하여 진짜로 참된 본향인 하늘에 있는 나라를 바라보며 늘 그 본향을 기대하며 소망하였음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2천 년 전에 오셨고 또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믿음이 얼마나 되는지요?
여기저기 깨지고 뚫린 상처의 구멍들이 그나마 있는 믿음조차 다 새나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의한 자를 아주 내치지 않으시고 주님의 품에 안아주시며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여 주시니 그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신발끈을 매는 종으로라도 살 수 있도록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땅에서 나서 땅의 것만 위하여 일하다가 아담의 생명으로 죽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오직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종이 되게 하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주님과 노닥거림!
참 정겹게 들리네..
생명의 교제는
생명의 교제를 낳고!
ㅎㅎㅎ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