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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처님의실천!팔정도! 원문보기 글쓴이: 오로지팔정도
제 3 장 인생의 의의와 정도
3. 환경의 조건과 마음과 행위
우리의 육체적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위 속에 산이 많으면, 위산과다가 되어 혈액까지 산성화된다.
그 때문에 육체적인 부조화가 생겨, 여러 가지 병의 원인이 된다.
반대로 무산성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조화된 것이 중요하며, 음식물도,
한 쪽에 치우친 것은 육체적 부조화를 불러일으킨다.
그 증거로, 음식 가림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반드시 병약한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음식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쌀, 보리쌀, 생선, 쇠고기, 돼지고기, 날짐승의 고기, 채소류, 과일 등
모두 생명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육체보존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제공하여,
만물의 영장(靈長)에게 공양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생명을 내던져 공양하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보은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보은이란, 그들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을,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와 살과 뼈가 되어주는,
동식물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식사를 할 때, 합장하고 먹는 것만이 감사가 아니다.
마음과 행위에 있어, 감사하고 보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음식물에 대해서, 미식이나 과식, 무절제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위장을 비롯하여, 각 기관을 위해서는,
아침, 낮, 저녁, 정해진 시간의 식사가 중요하다,
잘때가 되어, 위 속에 음식물을 들여보내는 것은, 혹사로 되어, 위도 피로해져 버린다.
육체적인 부조화를 만들어 내고 만다.
위장은 위장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뱃사공인 마음의 판단으로,
제멋대로 음식물을 들여보내면, 위장이 쉴 수 있겠는가.
역시 위를 소중하게 다루어 주는 것도, 건강 유지에 제일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선장인 혼. 의식의 중심에 있는 마음이 병들거나,
지(知)가 앞질러가거나, 육체주(肉體舟)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음도 육체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마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체도 마음도,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고타마 붓다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불이일체(不二一體)이다.
위장의 컨디션도, 조화된 마음과 육체의 밸런스에 의해서 안정된다.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산소의 양도, 21%가 필요한데,
조금만 적어도, 육체는 보존할 수 없다.
공해 때문에 산소가 결핍되어,
육체적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무, 풀, 푸성귀 따위가
대기 속으로 내보내는 산소가 결핍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지 개발, 택지 조성 등으로 말미암아
초목이 제거되어 자연 파괴가 일어나고,
공장이나 자동차의 배기가스, 비행기의 배기가스, 아황산(亞黃酸)가스 등과 같은,
문명이 만들어 낸 폐기물이, 원인이 되어,
신(神)이 부여한 조화있는 대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되며,
공해 방지를 위한 운동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에 의해서 배설되는 폐수등의 영향으로
야채, 생선류마저도 정상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 육체주(肉體舟)의 보존도 위태로운 지경이 되고 있다.
신(神)은, 모든 것에 조화된 상호관계를 부여하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것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의 눈을 돌려, 대자연을 수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각(嗅覺)은 어떠한가.
만약 ‘후각따위는 필요 없다.’고 한다면,
가스 회사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우리는 가스가 누설된 것을 알지 못할 것이며
가스에 중독되어 죽고 말 것이다.
반대로, 후각이 과도하게 발달되어 있으면 어떠할까.
악취만 맡게 되어, 이것도 큰일일 것이다.
아마도 살기 어렵게 될지 모른다.
역시 중도이다.
중간 정도의 후각으로서만, 안정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불전(佛前)에 향을 피운다.
이것은 고타마 붓다의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습관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체취가 강하여, 서로가 거북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사로몬이나 사마나(修行者)들은, 숲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독벌레등에게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것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약초나 나무의 열매의 즙액등을,
몸에 발랐기 때문에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 악취를 피하기 위해서, 향불을 피워서 냄새를 부드럽게 하는 것이,
서로의 예의요, 인사였었다.
몸을 씻더라도, 탕 속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이러한 습관이 향을 피우는 형식이 되어 버렸다고, 나의 수호령이 가르쳐 주었다.
스컹크나 족제비 따위는, 강렬한 악취를 내뿜음으로써
외적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독가스 따위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후각도, 중도 조화(中道調和)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우리들의 시각(視覺)은 어떠할까.
우리들의 시각의 범위는,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의 범위밖에 볼 수 없다.
볼 수 없는 세계쪽이 훨씬 더 많다.
공중에 엇갈려 날고 있는 전파. 적외선, 자외선, 등,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운동 상태를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육체적, 물질적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완전히 볼 수 없고, 손으로 더듬는 상태이다.
하물며 차원이 다른 의식의 세계등은, 대부분의 인간은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있는 듯한, 없는 듯한, 세계를, 몸으로 느끼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들의 시각이,적외선이나 자외선, X선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아름답게 조화된 자연계의 색채, 경치도, 전혀 다른 세계로 되어 버릴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만약 X선의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해골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야단이 날 판이다.
역시 극단의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통해서 볼 것이 아니라
무지개의 아름다운 색채의 세계만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조화된, 가장 좋은 주파수의 세계만 보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신의(神意)라고 할 수 밖에
1초에 50~60사이클 정도의 주파수를 가진 전등도, 1초에 50~60회 정도,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고속도 사진을 찍어보면, 점멸의 상태를 똑똑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 눈의 특징으로서,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어도,
잔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켜져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역시 우리의 눈도 절대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대자연의, 조화된 색채만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인지도 모른다.
아름답게 꽃이 피는 화창한 봄날,
나무숲이 짙푸르고 햇살이 강렬한 한여름의 바다와 산,
황금색으로 결실한 벼이삭이 바다처럼 출렁이는 가을의 들판,
그리고 단풍잎의 아름다움,
은백색의 숲을 이루고 있는 겨울 경치,
이처럼 철따라 변해가는 사계의 아름다움,
대자연의 변해가는 풍경은, 마음속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 이것 또한 조화이고, 중도이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올바르다”라고 하는,
편협되지 않은 중도의 생활을 즐기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에게는 엄하고, 타인에게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광명에 차고, 신의 자애의 빛으로 감싸이기 때문에, 마음의 눈이 열린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열리면,
한층 더 아름다운 대자연의 광경을,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부조화한 내장(內臟)도, 자연색 그대로 똑똑히 식별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차원을 넘어선 세계의 풍경을 시작으로,
저 세상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도, 보이도록 되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나오는 부드러운, 본래 황금색의 후광이,
자색이라든가 핑크색 또는 붉은색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도 마음의 조화도가 낮은 단계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광경은,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아도,
보려고 하는 의식이 작용하면, 당장에 볼 수 있다.
내가 설법하고 있는 정도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차원을 초월한 저 세상을 포함해서,
우리들 곁에 있는 수호령이나 지도령의 모습도, 그대로 보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많다.
지옥령이 빙의하고 있는 자들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입고 있는 옷의 무늬부터 옷감의 짜임새까지,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마음의 조화를 잃은 사람들은, 어두운 영위기(靈圍氣)에 싸여
같은 마음을 가진 지옥령들에게 빙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지금, 3차원의 입체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2차원의 평면의 세계에 투영되는 영상쯤은, 간단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3차원에서 2차원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차원의 세계를 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고차원에 통하고 있기 때문에
3차원도 2차원도 모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차원의 세계로부터 저차원의 세계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교만해지거나, 겸허한 마음을 잃게 되면,
마치 전파를 통과시키지 않는 터널에 들어간 것처럼,
수신기는 전파를 잡지 못하게 되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에게는 엄하고, 타인에게는 관용하여,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벼이삭.’
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도의 생활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체온은 또 어떠할까.
역시 35도에서 37도 정도가 안정된 체온이다.
만약 이 체온이 0도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얼고 말 것이다.
반대로 100도나 된다면 어떠할까.
부글부글 끓고 말 것이다.
39도나 40도의 고열이 되면, 우리의 의식은 몽롱하게 되고 만다.
장기도 비정상이 되고 만다.
역시 우리의 체온도 적온(適溫)이어야 한다.
기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외기 온도가 40도 50도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세의 염열지옥이 될 것이다.
반대로 영하 20도의 저온이 계속된다면,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할까.
외기온도는 체온보다 12도~10도 정도 낮은 온도가, 신체에는 가장 조화된 온도라 하겠다.
이와 같이 체온도 외기온도도, 우리의 육체조건에 맞게,
중도의, 조화된 상태가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목욕시 탕 물의 온도도,
너무 뜨겁지 않고,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는 정도가 가장 좋다.
역시 신체에 알맞은 적온이 좋다는 말이다.
대지의 토양도, 산성, 알카리성의 비율이 한편에 치우치면, 작물의 결실이 나쁘다.
역시 중화된 토양이, 농작물에는 좋은 것이다.
산성분이 강한 토양에는, 비료에 중화제(中和劑)를 넣어서 토양의 개량을 꾀한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태풍이나 강우에 의해, 흙속의 독소를 흘려 보내기 때문에, 대단히 혜택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토양도 조화되지 못하면, 작물에 영향을 미친다.
대기압(大氣壓)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은, 해발(海拔)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1기압(수은주 760밀리)이 가장 안정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기압이 높아도, 또한 낮아도, 우리의 육체 조건은, 그것에 조화되기 어렵다.
저기압이거나 반대로 고기압이 되면, 육체적 조건은 매우 불안전해진다.
우리들의 생활에서도, 기압도 또한 중도로서 조화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수신기의 회로에 대해서는 어떤가.
방송국으로부터 발신되는 전파를 수신할 때에는,
전파와 수신기의 주파수가 일치되었을 때, 최고로 감도가 좋다.
다이얼의 바늘이, 희망하는 주파수의 좌우 어느 쪽이건 벗어나면
전파를 깨끗하게 수신하지 못한다.
정밀한 수신기일수록, 다이알의 바늘도 정묘한 법인데
병사구(並四球)라고 하는 구식 라디오로 수신할 경우에는 다이알의 바늘도 매우 거칠다.
주파수가 일치했을 때의 수신기의 상태는, 입력(入力)이 크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수신기도 조화되지 않는 한, 주파수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의 조화도에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신기에도 성능의 차가 있듯이,
인간의 영위기(靈圍氣)도, 사람마다 그 정묘함이 다르다.
중도의 법을 마음의 척도로 하여 생활하며,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독선적인 부조화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는,
의식계의 단계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난다.
집착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괴로움의 정도도,
스스로의 마음의 상태에 의해서 빚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현대 사회의 사상을, 크게 나누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주의(主義)도, 마음을 잃고 있다.
그것은 사상의 근본이, 물질경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스스로 이룩한 물질문명에 의해서, 보다 풍요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위대한 마음의 존엄을 망각하고
형식적 종교에 마음의 위안을 구했기 때문에 생활 속에, 습관 속에,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것은 자력을 망각한, 타력본원(他力本願)의 자기도취에 빠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으며
물질경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재산이나 경제력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하는 인생관으로 변해 버렸을 때,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의 위대함을 잃고 만다.
그래서 스스로, 족함을 잊고, 욕망의 늪으로 떠내려가서
몸도 마음도 진흙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꼴이 된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 낸
“업”이다.
이 지구는, 무-대륙, 아틀란티스 대륙의 함몰 등
몇 차례의 천변지이(天變地異)를 체험해 왔다.
인간은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면, 이 세상만이라고 생각해버려,
자아아욕(自我我慾)의 일생을 보내고 만다.
천변지이(天變地異)는, 그러한 인류에 대한
그 시대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신의 경고였던 것이다.
인류가, 이 지구라는 장(場)을 수행장으로서 선택하여
다른 천체로부터 이동해 왔던 당시는, 지구는 매우 조화된 유토피아였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눈떠 있었고,
실재계와의 연락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족이 불어남에 따라, 저마다 종족 보존의 자아가 싹터서
육체적 동족의 그룹은, 공동체로부터 분리해 갔으며
마침내 스스로의 생활의 장(場)을 확보하기 위한, 경계가 만들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종족의 분열에 의하여 다시 쪼개어졌으므로, 생활 구역상의 대립이 생긴 것이며
부족의 우두머리가, 각각 그 부족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원시 공산체제는, 자연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의 협력이 필요했었다.
인간은 거기서 갖가지 생활 수단을 생각해 내어
그것에 따라서 유목민이 되기도 하였고, 농경 민족, 어민이 되기도 하면서,
생활의 장(場)이 넓어져 갔다.
그러나 생활의 장이 넓어짐에 따라, 인간은 서로의 사이가 멀어져 갔다.
그래서 인류는 모두 동포라는 것을 잊어,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부족의 세대(世帶)가 커진다. 그러면 호족이 생긴다.
약한 부족은 멸망하고, 강한 자는 침략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동족 사이에도 싸움이 벌어져, 그 싸움이 무장을 낳고
마침내 봉건 사회가 형성되어, 엄격한 계급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무력에 의한 전란이 계속된다.
약한 자는 지배당하고, 무장은 세력을 확대해 간다.
전투력의 우열이 승패를 좌우하여, 무력이 강한 자가, 마침내 국가를 통일해 간다.
이 무렵부터, 봉건제도는 더욱 엄격한 계급 제도를 만들어,
그 지배력을 공고하게 다져간다.
밑바닥의 대중은, 그 무력이나 권력의 희생물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참고 살아가야 했다.
무력은, 약한 자들의 자유를 빼앗고, 행동의 자유에도 제약을 가하여 갔다.
일본에 있어서의 농민 봉기 같은 것은, 그 약한 자들의 단결에 의한 투쟁이었다.
그만큼 권력자에 항거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길이 없을 정도로
악정(惡政)이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상인들은, 무기나 식량이나 의류 따위를,
무장(武將)들에게 팔아, 장사로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다.
어떤 때는 스파이가 되어, 정보까지 팔아, 적과 자기편의 구별도 없이,
장사수완을 부려 재(財)를 축적해 가기도 했다.
투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무장(武將)들은, 상인들의 좋은 봉이 되어,
결국은 경제력에 의하여, 거꾸로 상인들에게 지배를 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에 드디어 자본주의의 싹이 움터 나오게 된다.
그래서 경제력은 대중을 지배해 가는데
대중은 그 속에서, 자유에 눈뜨게 되고, 물을 얻은 물고기처럼, 단결이라는 조직을 형성해 간다.
무력(武力)은, 대중을 지배하여 대중의 행동을 제한할 수는 있어도,
그 마음은 지배하지 못한다.
그 결과 스스로의 부조화하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들도 사람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릇된 종교를 이용하여, 악덕(惡德)한 그 지도자와 결탁하여, 대중을 기만하고,
마음의 속박을 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날조된 종교, 타력본원 종교(他力本願宗敎),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으로서는, 결과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칼 마르크스처럼
‘종교는 아편이다.’ 라는 것을 대중은 조금씩 깨닫게 된다.
올바른 신리에 근거한 것이라면,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구제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지식에 의하여 조작된 종교로서는,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또한 그러한 종교에 속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까지도 썩게 하고 마는 일이다.
권력자나 귀족이, 악덕 종교가들과 짜고. 대중을 희생시키는 따위의 종교는,
아편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태양의 열과 빛은, 모든 것에 평등하며, 신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일부의 특권 계급의 독점물이 아닌 것이다.
대중은 자유에 눈을 뜸과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싹터,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도, 물질경제가 기본이어서,
그들도 무장(武將)들처럼 무력(武力)으로서 지배하게 되었다.
스스로 단결이라고 하면서, 계급투쟁 속에서,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도 한다.
사상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탄압을 확대하게 되어
나중에는 그들 자신의 내부에도 불만이 생겨나게 된다.
그들은 남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잃고
언제 권좌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 떨면서 살고 있다.
오늘의 동지는, 내일은 인민의 반역자로 낙인찍히어 실각하고 만다.
인민이란 이름을 거짓으로 빌려, 행한 독재자의 주의 주장은
마침내는 스스로의 부조화한 행위에 비례한, 반작용이 돌아가는 것이다.
스스로의 올바른 생활 행위 속에서,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생각하고,
자기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대중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살아 있는 지도자야말로, 본래의 신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기면 관군, 지면 적군이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싸움 그 자체가, 만물의 영장이 할 짓이 아니다.
싸움은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는 과정의 동물의 행위임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민 대중을 향해 단결을 호소하면서
권력자와 자본가들과 함께 투쟁을 선동하고 있는 지도자는, 그것만으로도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권력욕이나 자기 보존의 마음이 싹튼다면
그것은 이미 대중을 기만하고 있는 자들이다.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라면, 투쟁의 헛됨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지도자는, 인민 대중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싸움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알고 있다면,
싸움은, 스스로의 마음에 불안을 주고,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따라올 것이다.
투쟁과 파괴에 의해 희생되는 자는, 인민 대중이 아니겠는가.
계급투쟁에 의해서, 문명이 발달해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사상가들은,
공해라고 하는 부조화한 독물(毒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공범자나 다름없다.
일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감사는,
스스로의 환경에서, 열심히 일하고,
보은이라고 하는 행위에 의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자를 자인(自認)하는 지도자들도,
대중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은, 그들에 대하여 일할 장소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한 보은을,
실적을 올리는 땀으로서 보답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경영자는 일하는 종업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환경 개선, 직업병 추방 등, 후생을 통하여 친자식처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
지도자는 그래서, 스스로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직접 가져야 한다.
지도자다운 인간성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서로가 팽팽히 맞서 있어서는, 마음과 마음의 조화는 기대할 수 없다.
자본가에게는, 품성(品性)도 교양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친절한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하겠다.
올바른 중도의 지도(指導)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투쟁의 반복은, 노사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우선이다.
마음의 교류가 끊겼을 때, 신뢰는 상실되고 만다.
지금은, 사회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서로가 마음을 잃고 있는 실정이다.
각자가 자기자신의 마음을 잃었다.
“올바른 중도”
를 마음의 척도로 하여 사는 일이야말로, 노사(勞使)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다.
인간은, 마음을 잃고 물질문명의 노예가 됨에 따라,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노이로제 환자가 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자는, 심부재(心不在)의 육체주(肉體舟)를 부조화한 지옥령에게 지배당하여,
자기가 자기를 제어할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
그런 사람도 많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사람들이다.
자기 이외의 자(者)가, 마음속에서 속삭인다.
이런 사람들은, 100% 지옥령에게 빙의되어 있으며, 분열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분열증이나 조울증의 사람들은,
거의가 스스로의 작은 마음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음의 스트레스가, 부조화한 지옥령을 불러들인 결과이다.
그 원인은, 어릴 때부터의 가정환경, 양친의 교육, 애정 과다, 애정 부족등으로부터 발생하고,
또한 스스로의 마음에 작은 틀을 만들고 만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올바른 중도의 생활을 잊고,
원한, 질투, 시기, 미움, 노여움등을, 마음에 가진 사람들인데,
타인만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반성이 없는 인간의 가련한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서(情緖)를 잃은, 좁은,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의 세계로부터
,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되찾는 일,
스스로의 부조화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
마음을 수정하는 일,
이것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사람들은, 그 병으로부터 구제받지 못한다.
“중도”
라고 하는 마음의 척도로서, 과거의 잘못을,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수정해야 한다.‘
그때, 마음의 구름은 걷히고, 부조화한 지옥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올바르다”는 그 기준은,
대자연의 질서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마음에 평안함을 만들어주는, 최선의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팔정도,
이 길이야말로,
스스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의 방법론이며,
지름길인 것이다.
마음의 원점-다카하시 신지-
(주:
안이비설신의 기능..
눈,귀,코,입,몸의 기능.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신의 배려.
곧 신의 축복.
여기 물질의 세계에서 살기 위한, 꼭 필요한 기능.
그리고 육체.
하지만, 육체만을 위한 인생은 아니 되겠지요.
육체만을 위한 인생은,
마치 주객이 뒤바뀌어 버린...
돈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돈을 위해서 살면 아니 되듯이.
* * *
인연있는 이여,
우리같이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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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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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하시고 성불하소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