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역에서 용문행 전철을 탔다. 주말처럼 붐비지는 않아 편한 자리를 잡았다. 승객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가벼운 몸차림이나 등산복장을 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담소하는 광경이 한가롭다. 3월, 예기치 않은 건강 이상으로 몸 치료하느라 병원과 가까운 곳만 오가며 지내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9월이다. 새해 들어 계획했던 걷기 여행에 대한 숨어있던 욕구가 슬그머니 머리를 쳐들어 나선 길이다. 양수리 운길산 역에 내렸다. 11시쯤이다. 한참 만에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 몸은 배낭에 구겨 넣고 마음만 끄집어내 북한강 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며칠 전만 해도 노도처럼 퍼붓던 폭우는 어디에 감추었는지 날씨는 태연하다. 바람은 하늘거리며 강물 흐르는 방향으로 불고 있다. 친구처럼 다정하다. 양수대교 위로 마디 벌레 같은 중앙선 전철이 철거덕거리며 달리고 있다. 강물은 유유하고, 물결은 흐르는지 멈추어 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잔잔하다. 하늘에는 남색 바탕에 솜털 같은 하얀 구름이 떠 있고, 구름의 자태가 강물 위에 내려앉아 강물과 한 몸이다. 양수(兩水)가 아니라 운수(雲水)라고 이름 붙이면 더 정겨울 것 같다. 운길산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은 치마폭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화천, 춘천을 거쳐 흘러내려 온 북한강물은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머리를 맞대고 한 몸으로 합쳐져 유순한 양이 되어 운우의 정을 즐기며 한 살림을 차린 듯하다. 산 쪽에서 개울을 타고 내려온 물길이 강으로 흘러드는 길을 따라 발길을 옮긴다. 갈대 무리가 바람결에 찰랑거리고, 웅덩이에 고인 물속에는 연꽃들이 바람이 부는 방향 따라 누웠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길 중간중간에는 커다란 수양버들이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나무 아래 벤치가 놓여있어 길 걷는 사람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준다. 알맞은 온도를 품은 햇살, 파란 하늘에 핀 구름 꽃, 물 내음 풍기며 흐르는 강물, 여기저기 피어있는 색색의 예쁜 꽃 무더기들, 그 사이사이로 꿀을 찾아 비행하는 벌들의 바쁜 행보, 가슴 터진 듯 울어대는 매미들의 애절한 울음소리, 이 모든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천국이 이런 모습일까. 벤치에 앉아서 물 한 모금 마시며 회상에 잠긴다.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말을 되새기며 발걸음을 서서히 움직이니 무수히 많은 생각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물의 정원’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넓은 수변 가운데로 흐르는 개울 위로 현수교를 본뜬 다리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한껏 운치를 더해준다. 하얀 현수교 위로 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이 사진 속 배경처럼 선명하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강에서 올라온 바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산들산들 살갗을 스치는 감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쾌적하다. 정원 가운데로는 자전거 도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 위로 페달을 밟고 쾌주하는 사람도 보인다. 흐르는 물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물은 고이고 흐르는 곳에 따라 계곡물, 강물, 샘물, 도랑물 등으로 이름이 붙지만, 모든 물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모를 세우지 않고 부딪치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 어떠한 장애물이 나타나더라도 항상 보듬고, 품고 비켜서 흐른다. 내 옆으로 흐르는 북한강 물도 북쪽에서 이곳까지 흘러내려 오면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품고 흘러 왔을까. 말없이 흐르는 강물은 출생지가 어디였든 일단 몸을 합치고 나면 따지지 않고 오순도순 서로 가슴을 맞대고 마음을 합쳐 조용히 흐르고 있다. 저 물속에는 많은 생물체의 보금자리가 인간의 마을처럼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물은 모든 생명체에게 텃세 부리지 않고 포용하며 말없이 흐르기만 한다. 이 한강 물은 팔당댐까지 흐르면 다시 이산가족이 될 것이다. 어느 물은 수도관을 타고 흘러 사람들의 식수를 위해 밀폐된 관속을 흘러갈 것이다. 또 어떤 물은 계속 흘러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또 한차례의 변신을 강요당할 것이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마음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물처럼 마음을 다스리라는 계명인가. 잔잔하게, 그리고 무심히 흐르는 강 언저리에는 굵고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넓은 그늘을 펼쳐놓았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일찍이 부처님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근심과 걱정거리에 갈팡질팡한 때도 있었고, 마음과 행동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순간순간의 결정에 장애물로 작용했던 적이 많았다. 간사함과 욕심이 마음을 흔들고 정신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한주먹도 안되는 자존심과 명예, 돈 욕심에 온몸으로 부딪쳤던 일들이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 소요유(消遙游)의 경지를 흩트려 놓는다. 욕심 없이 분수에 맞는 삶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니 수많은 욕심을 품고 살아온 것 같다. 이곳 ‘마음의 정원’에서 마음속에 끼어 있는 욕심 한 줌 털어내고 돌아가면 남은 생이 더욱 가벼워지려나. 마음의 정원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끄집어내 도란도란 얘기하며 걸으니 머리가 개운하고 몸도 한결 가볍다. 에너지가 소진되고 피곤이 쌓일 텐데도 몸은 가볍고 개운하다니. 광활한 북한강물의 얼굴에서 쏟아내는 미소 때문인지, 가을 햇살과 산들거리는 바람 때문인지 기분이 좋고 마음이 개운해진 느낌이다. 정오다. 나무 그늘에 앉아 샐러드 도시락 하나, 우유 한 팩으로 강물을 반찬 삼아 시장기를 메웠다. 자연밥상이 별건가. 바람 한 숟갈, 햇살 한 움큼, 매미 소리도 한 음절 싹둑 잘라 두루두루 비벼 먹고 다시 길을 걸었다. 나에게 있어서 일상의 틀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오솔길이나 강변길, 바닷길, 숲이나 산길을 걸으며 자연과 내가 일체가 되어 날것의 풍경을 나의 눈 속으로 줌인하여 감상하는 기쁨은 곧 행복이다. ‘풀꽃 정원’이다. 구절초, 코스모스, 고마리, 도라지 꽃, 쑥부쟁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외국 종 꽃들이 집단 주거지를 이루고 꽃을 피우고 있거나 지고 있다. 이곳의 꽃들은 그들의 본향을 떠나 사람들의 손에 의해 강제로 옮겨져 살고 있을 것이다. 자연이지만 자유스럽지 못한 생을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측은한 생각이 든다. 이 또한 인간의, 강자의 횡포가 아닌가.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보전이 진정한 의미의 자연보호일 텐데,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작하는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 주변의 모든 생물은 그들이 사는 그곳이 고향이고 삶의 터전이므로 자연 그대로 살도록 놓아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강물과 마주하며 걷는 길, 길 위의 정원이 끝났다. 찻길과 자전거 길이 병행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강을 조망하기 좋은 벼랑이나 언덕 위에는 어김없이 펜션이나 예쁜 카페가 자리 잡고 있다. 유럽 여행지에서 본 것 같은 알쏭달쏭한 이름들이 버섯처럼 피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강가에는 수상스키나 유람 보트를 탈 수 있는 보트장이 군데군데 보인다. 대성리에 도착했다. 울긋불긋한 글씨들로 음식점, 모텔 간판이 즐비하다. 다시 세속으로 돌아왔다. 서울행 전철에 올랐다. 오후 4시 30분. 왁자한 사람들의 소리가 소란스럽다. 강물과 나무와 풀꽃들의 수런거림이 귓전을 맴돈다. “마음을 열어라, 겸손하여라, 가벼워져라.” (2020 올해의 작품상) |
첫댓글 좋은 작품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