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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 2013/10/20 07:29 | 추천 1 스크랩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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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7, 18, 19일 변산반도와 전주를 여행하였다. 대학교수들의 학술발표회나, 문인 세미나가 아니라 그야말로 한 나그네의 여행이었다. 이 지역은 나의 조금은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다. 50년도 더 전에 나는 내가 재학했던 고등학교(경북대 사범대학 부속고교)의 적십자단의 대표로서 변산반도에서 개최된 연수회에 참석한 기억이 있다. 정말 잊어버릴뻔한 추억이다. 그 때 바다를 처음 보았는데, 해수욕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그렇게 신비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주는 내가 대학교수로서 첫발을 디딘 곳이다. 한 40 여년 전의 일이다. 전주를 떠난 후 여기를 찾아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학술발표회나 세미나 등의 참석차 왔기 때문에 전주시내와 전북대학교를 차분이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아무런 공적 스케줄없이 그야말로 여행을 목적으로 찾아온 것은 전주를 떠난 후 40 여년만에 처음이었다.
이번 여행의 원래 목적은 변산반도의 서쪽 끝자락 채석강과 적벽강을 한번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만금 방조제 구경하러가는 길에 언제나 차량으로 지나치기만 했던 내소사를 한 번 보고자 했다. 뻔질나게 외국여행을 하면서도 국내 관광지를 가볼 기회가 잘 없는 것이 우리네의 삶이다.
고등학생 시절 변산반도 해수욕장에서 연수받던 추억과 전북대학에서 대학 첫 강의를 시작하던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뇌리에 겹쳐 떠오르면서, 나의 영혼 속으로는 알 수 없는 감동의 파도를 타고 가슴저린 여수의 물결이 흘러 들었다.
채석강이 있는 변산반도의 서쪽끝에 위치한 격포항까지 직행하는 뻐스가 서울 종합운동장 앞에서 하루 한 번씩 운행하고 있다. 대략 네 시간 쯤 걸린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나의 집이 있는 충남 공주에서 - 논산 - 익산 - 김제 - 부안 - 격포 노선을 따라 가려고 했다. 이것은 잊혀져 가던 내 추억의 시간여행이었고,추억여행이었다. 논산에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위에 적은 방법이 하나이고, 논산에서 전주로 내려가서 부안 - 격포로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전주를 거쳐가면 조금 돌아가는 듯하다. 특히 논산에서 김제까지는 기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호남선이다. 마침 공주대학을 정년하고 난 후, 출강하고 있는 집사람이 16일 강의가 끝나서,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공주 터미널에서 새벽 7시 10분 논산행 뻐스에 몸을 실었다. 수학여행 따나는 고등학생처럼 나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지키지 못하고 밤새 관련 책들을 뒤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결국 논산에서 마침 20분 후에 닿는 호남선열차를 받아 타고 김제역까지 갔다. 김제역에서 30분 간격으로 있는 부안행으로 갈아타고, 다시 부안에서 격포행으로 갈아탔다. 날씨가 쾌청한데다가, 한국 특유의 가을하늘이 드높아 여행 기분이 만점이었다. 격포에 도착하니 차를 네 번이나 갈아 탓음에도 불구하고, 오전 11시였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채석강과 적벽강의 해안으로 온 것이다.
숙소인 대명리조트에 방을 정한 뒤 곧바로 내소산 탐방에 나섰다. 격포항에서 내소사로 가는 소형 뻐스가 있었다. 시간이 맞아 즉시 이 차편을 이용했다. 내소사 관람이 길어져 회선뻐스를 노치고, 택시를 불러타고 직소폭포로 향했다. 내변산 직소폭포를 보지 않고서는 변산팔경을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꼭 찾아보아야 하는 절경이다. 길이 험하여 집사람은 폭포 출발점 까페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산길을 달려서 갔다 왔다. 한시간 이상이 걸렸다. 험한 산길을 한 시간 가량 쉬지 않고 뛰었으니 나도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집 사람이 혼자서 사람 드문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차를 파는 카페가 아니라, 마실 것을 손님이 스스로 빼먹게 되어 있는 노천 카페라고나 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벌써 산영이 내려와 조금은 을씨년스러웠다. 다시 택시를 불러서 격포항으로 돌아왔다. 오후 5시 경이었다. 이 시간대쯤이 채석강 보기에 가장 알맞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해가 지는 서해의 낙조가 절벽에 빗겨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략 7000 만년 전에 조성되어진 퇴적암이라고 한다.
과연 절경이었다. 이태백이 시상을 얻기 위해 자주 찾았다는 중국 채석강의 지명을 따왔다고 한다. 채석강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낙조가 아름답게 빗겨진 바닷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집사람은 이 지역 특미인 백합죽을 먹었고, 나는 해물탕을 먹었다. 우리들은 청하 한 병을 시켜서 주거니 받거니 했으나 결국 절반밖에 비우지 못했다. 숙소에 들어와 창문을 여니 서해의 해지는 광경이 너무나 장엄하게 시야에 잡혔다. 사람의 일생이란 어쩌면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조음을 들으면서 잠으로 빠졌다. 새벽 4시에 잠을 깨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더니, 달빛 어린 바다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신비스러움 그 자체였다. 숙소에서 주는 아침 식사가 괜찮았다. 다만 중국인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새벽 8시에 내려갔는데도 식당이 꽉 차 있었다. 식사 마친 후, 격포항 북쪽 500미터 지점에 있는 적벽강 구경에 나섰다. 적벽강은, 소동파가 시상을 얻으려고 노닐었던 중국의 지명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격포항에 있는 채석강과는 달리 전혀 개발이 되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결 자연스러웠다. 햇살과 침묵과 바닷바람소리 그리고 해조음밖에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절벽은 한결 장엄하였다. 귀실하여 전주행을 위해 퇴실하였다. 채석강, 내소사, 직소폭로, 격포항 해지는 모습, 적벽강을 본 셈이다. 변산 팔경 중에서 다섯개를 본 셈이다. 2시 쯤에 부안을 거쳐 전주에 닿았다.
전주에서는 태조궁 관광호텔이라는 데 여장을 풀었다. 관광호텔이라 하여 좀 거창한 덴 줄 알았는데, 호텔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옛 삼성생명의 건물로 쓰이던 것을 리모델링한 것이라고 한다. 시설은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었다. 호남제일문인 풍남문을 거쳐서, 곧바로 전주한옥촌 구경에 나섰다. 정말 대단했다. 사람 붐비는 정도가 명동 못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이 이렇게 변모했을까,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약 40년 전에 나는 전북대학에서 세강좌를 얻어(9시간) 대학에서의 첫 강의를 시작했을 무렵, 여기 지금 한옥촌 즉 교동에 하숙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정말 을씨년스러운 기와집들이 들어찬 어둡고 스산한 곳이었다. 지금은 한옥 고가들이 즐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새로 지은 거창하고 밝고 새로움으로 가득 찬 빛나는 한옥 동네였다. 한옥촌의 명물인 경기전도 당시는 초라한 기와건물 한 채에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한 점을 걸어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풍스러운 기와건물로 몇겹으로 중창한 속에 태조의 진안을 그린 초상화가 고이 모셔져 있었다. 수학여행온 듯한 중고교생들이 무리지어 입장하고 있었다. 오목대에 올라, 황산전투를 승리를 이끈 이성계와 조전장수 포은 정몽주 조상을 생각했다. 이성계는 조전장수 포은의 병법으로 결국 승리했지만, 포은의 뛰어난 병법에 내심 크게 놀랐고 벌써 그때부터 그의 제거를 품었다는 사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승전의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택시를 타고 전주객사를 보았고, 다시금 택시를 타고, 강암 선생 서예관과 향교를 보았다. 지리를 몰라 바로 옆에 있는 지역을 빙 빙 돌아서 가기가 일쑤였다.
당시 나는 교양과정부에서 불어강좌를 전임시간인 9시간을 배정받았으나, 불문학과가 없어서, 티오 문제로 전임 교수로 발령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전남대학교 사법대학에 불어교육과가 생겨서, 전남대학교로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전남대학 불문학과와 당시 전남대학교 사대에 재직하고 있던 집사람과는 전화로 통신하고 있었는데, 이용하던 전신전화국을 한 번 찾아보고 싶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당시 우리는 약혼을 한 상태였다. 지나가는 좀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이 3,40년 전이라고 하면 바로 저 건물이 전신전화국이었다고 가르쳐 주었다. 거창한 식당 건물로 바뀌어져 있었다. 추억 속에 떠오르는 오랜 세월 속의 건물과 거리, 그리고 다방 식당을 찾아 다녔다. 집 사람은 다리가 아프다고 그만 하자고 졸랐다. 경기전, 객사, 오목대, 풍남문, 전신전화국, 전동성당, 서예가 강암 송성용 기념관, 한옥촌, 향교를 보았으니 얼추 봐야할 것은 대략 본 것같았다.
전주에서의 첫 음식으로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퍽 중요했다. 문화일보에 일년 이래로 한국전통 음식 이야기를 수요일만다 연재하고 있는 집사람은 마침 어제(10월 16일 자 문화일보) 신문에 전주콩나물 국을 썼다. 그래서 첫 음식을 전주콩나물국으로 하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 호화찬란하고 광대한 전주한옥촌에 콩나물국집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콩나물국으로는 장사다운 장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옥촌 가이드 책자를 보고서야 한쪽 구석에 처박힌 콩나물국집을 찾아 갔다.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초라한 식당의 홀에 젊은이 한 쌍만이 앉아서 콩나물 국을 마시고 있었다. 집사람은 격포에서 마시다가 남겨둔 청하병울 꺼냈다. 우리는 그것으로 목을 축였다. 숙소로 돌아와 잠으로 떨어졌고, 집 사람은 새벽에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서 무슨 세미나가 있었서 발표자였다.
혼자 남은 나는 전북대학을 돌아보았다. 백여 개 이상의 강의동이 들이차 있는 거대한 캠퍼스의 위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강의하던 시절의 강의 건물은 눈을 씻고 보아도 단 한 채도 없었다. 돌고 돌다가 나는 어쩌면 내 기억 속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과도 같은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나무 의자에 앉아 가물거리는 기억을 추스려 보니, 옛 본관 건물이었다. 가을이 익어가는 속에 교정의 벤치에 앉아서 알 수 없이 가슴 설례는 추억 속에 빠져 들었다. 당시 나를 초청해서 데리고 온 유제식 교수님은 5년 전에 타계하시었고, 사모님은 전화번호를 모르고 존함도 몰라 연락을 취할 길이 없었다. 교수님은 심한 치매를 앓으셨다. 택시를 잡아타고 한벽루로 오고 보니 어제 왔던 오목대 아래, 향교 옆이었다. 나도 하도 오래간만에 와서 지리가 오락가락 했다. 나는 나의 최후의 목적지인 나의 옛 하숙집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전주 한옥촌 교동은 지리가 너무나 바뀌어 어디가 어딘지, 어느 집이 무슨 집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림짐작으로 이 집이겠거나 하고 돌아서는 도리밖에 없었다. <교동 석갈비>라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밥값이 어제 콩나물밥의 세배는 되었다. 혼자가 되어서 일까, 아니면 전북대학을 혼자서 둘러본 탓일까, 나는 갑자기 외로워지고 처량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내가 알고 지냈으며 내가 정을 주고 지내는 사람들이 아주 멀리 멀리 가버린 것같은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 화려한 한옥촌에 몰려 어디론가로 사라져간 전주고을의 나의 옛 하숙집은 어디로 간 것일까. 2시에 고속뻐스를 타고 상경하였다. 서울에서 호남으로 가는 뻐스는 당연히 회덕을 지나는 것으로 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으나, 오늘 보니 전주 논산 공주 천안으로 다녔다. 세상은 너무나 많이도 변해 있었다. 이틀 전 내가 변산반도에 가기 위해 출발했었던 바로 그 노선이었다. 집 사람이 호남선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신세계백화점 푸드코트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 망설이다가, 쓸쓸히 웃으면서, 전주콩나물 국! 했다. 우리는 의마가 많이도 달라진 세상 속에서 어쩐지 헛도는 것같은 감각을 느끼면서 콩나물국을 들이켰다.
ㄱ 논산역 광장에 있는 군장병 여행 안내소 김제역 광장에 서 있는 꽃탑 내소사 입구
내소사 대웅전(보물) 내소사 요사체 내소사 입구의 600미터 전나물 길, 조금 날자가 빨라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다.
내변산의 직소폭포, 건조기라 폭포물이 말라 있다. 격포항의 서편 채석강, 당나라 이태백이 시상을 얻기 위해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의 지명을 따왔다. 서해안의 백미인 낙조풍경 격포항에 있는 적벽강, 소동파가 시상을 얻기 위해 자주 찾았다는 중국 적벽강의 지명을 따왔다. 전주 도청이던 건물인데, 지금은 비어있다. 일제의 의해 없어진 전라감영을 재현하려는 부지로 계획되어 있다.
전주의 명물 전주한옥촌 건너편에 있는 호남제일성, 풍남문의 전경
절경인 내변산 직소폭포 가는 길에서 만난 호수 내변산의 풍경, 직소폭포를 보지 않고서는 변산팔경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전주시 한옥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다. 그 입구에 서 있는 전동성당 이성계의 전주이씨 본향인 경기전, 태조의 진안이 모셔지고 있다.
오목댜 모목대, 이성계가 황산에 주둔한 아치발도 지휘의 5만대군을 전멸시키고 전승연을 베푼 곳이다. 포은 정몽주는 제일 조전장수로 참전하여, 이성계의 전략을 짰다. 병장기를 사용하는 장수는 아니지만 포은의 출중한 전술전략에 놀란 이성계는 승전을 하였지만, 포은의 병술에 놀라 이때부터 그의 제거를 생각했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전주 향교의 모습 향교의 공자사당 대성전 이 지역 최고의 서예가 강암 송성용의 기념관 새로 조성된 전북대학교의 정문, 40년만에 찾아간 나그네에게 낯설음을 주었다.
필자가 재직하던 시절의 건물 중에서 지금껏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인 당시의 본관건물 지금의 전북대학교 강의동 배치도 전주 객사의 모습, 풍패지관이란 액자가 붙어 있는데, 풍패란 말은 한고조 유방의 탄생지명이다. 태조이성계의 탄생지란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건국공신 최담의 별장인 한벽루가 전주시의 서편을 흐르는 전주천변에 세워져 있다.
40 여년 전 필자가 하숙했던 집으로 추정되는 집이다. 직소폭포가는 길
전주의 서편을 흐르는 전주의 명물 전주천과 천의 다리 남천교 위에 세워진 목조건물 청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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