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리본
144분동안, 나는 숨을 쉬지 않았다.
한 편의 영화가 전해줄 수 있는 완벽한 재미와 감동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섬세하게 느끼는동안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은
당신이 볼 때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범인이 누구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이상한 스릴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을 꿰뚫는 차가운 이성과
그것을 조화롭게 형상화하는 부드러운 감성의 연출은
나를 전율시켰다. 이것이 진짜 영화다.
이미 나는 [퍼니 게임](1997년)을 본 후부터
그의 완벽한 팬이 되어 있었다.
[피아니스트](2001년)나 [히든](2006년)은
나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국내 개봉되지 않은 [베니의 비디오](1992년)나
[미지의 코드](2000년), [퍼니게임] 리메이크(2009)도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하얀 리본](2010)만큼은 아니다.

제 1차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독일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건들,
특별하지는 않지만 매우 수상한 어떤 공기,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과 저 멀리 있는 지평선 끝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어떤 불안과 공포를
이렇게 뛰어나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제 62회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은,
집단적 폭력 앞에 맞서는 힘없는 약자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집단과 개인, 광기의 역사와 폭력적 세계를 관통해가는 대응방식을 보여준다.
영화 전편을 사로잡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세계에서 발생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하얀 리본은,
순결의 상징이다.
목사 가정에서는 소년들이 잠들 때, 침대에 고정된 하얀 리본으로 양손을 묶는다.
그것은 충동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기 쉬운 10대 소년들이
순결한 몸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명분으로
기성세대들에 의해 가해지는 강압적 폭력행위였다.
하얀 리본은 순결의 상징이지만
십대 소년들에게는 억압의 상징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말을 타고 돌아오던 마을 의사는
집 앞에 누군가 설치해 놓은 투명한 줄에 걸려 낙마하면서 뼈가 부러진다.
그 이후 마을에서는 또 다른 사건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또 다른 사고로 크게 몸을 다치는 사람이 생겨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화가 일어난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거행되는 예배는
매우 상징적인 씬이다.
일요예배는 신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는 인간들의 참회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집단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신에 경배하는 아름다운 화음의 노래를 보르는
2층 성가대 소년들의 모습은
맑고 순수한 영혼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타락한 세계의 모습이 드러나고,
타락한 세계의 폭력 앞에 노출된 위태로운 아이들이
무엇인가 말 못할 비밀을 안고 있는 것이 묘사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크게 5명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교사, 목사, 의사, 농장관리인, 그리고 마을 최고의 권력가인 남작이다.
교사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작 집안의 어린 유모와 사랑을 속삭인다.
목사는 타락한 세계에 맞서 자신의 아이들이 타락하지 못하도록
하얀 리본으로 아이들의 손을 침대에 묶어놓는다.
의사는 자신의 일을 돌봐주는 산파와 관계를 맺고 있고, 자신의 딸을 근친상간한다.
농장관리인은 남작에게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이 남자의 어린 아들에게 지배당하도록 한다.
남작의 부인은 남작에게 이혼을 통고한다.

이 모든 비밀을 가장 모를 것 같은 아이들이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직접적으로 입을 열지 않는다.
사건의 정확한 실체도, 그 해결방법도 끝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 생산자의 무책임이나 회피가 아니다.
희망이 없고 출구에 대한 그 어떤 전망도 봉쇄되어 버린
절망적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 영화가 흑백으로 찍혀져서 모노톤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감독의 이러한 세계이해 방법론 때문이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에 많은 영감을 받아 연출된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화면은
[하얀 리본]의 주제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들은 삶의 근원을 응시하고 있다.
인간 존재의 어두운 내면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그리고 불가해한 세계의 폭력성은 인간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는 섬세하게 조직된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